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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이 있는 한, 갈 수 밖에 - 허트 로커
    리뷰 2010. 5. 5. 21:39



    영화 '허트 로커'는 다른 전쟁영화와는 다르게, 엄청난 규모의 전투장면이나 격렬한 총격전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도 있는 폭발물 제거반 EOD의 폭탄제거 수행 행위만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영화 초반에는 다소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담백한 화면과 단순한 스토리 라인이 느껴졌다. 하지만 매번 반복될 때마다 점점 더 강도가 높아지는 에피소드들로, 큰 규모의 총격전 없이도 전쟁영화의 긴박감을 잘 살려내는 솜씨에 감탄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아카데미에서 여섯 개 부문 상을 휩쓸었다는 수식어가 전혀 무색하지 않은 영화다.



    작렬하는 태양, 황폐한 사막같은 도시 그리고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힘든 낯선 얼굴들의 낯선 땅. 이라크라는 이름만큼이나 생소한 지구상의 어느 한 지점에서, 더군다나 전쟁터의 한 복판에 서서 그들은 일상처럼 폭발물을 제거한다. 아니, 사실 폭발물을 제거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다. 다른 팀원들은 다른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역할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한 팀이지만 말이다.

    이미 폭발물 제거에 이골이 난 주인공 '제임스(제레미 레너)'. 어떻게 보면 베테랑다운 자신만의 노하우로 주어진 임무를 잘 완수하는 사람이지만, 다른 쪽으로 보면 자신만의 독단으로 팀원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위험하고 이기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굳이 자기 일을 피하려고도 하지 않고, 굳이 좀 더 편하고 안전한 길을 찾으려 하지도 않으며, 또 굳이 팀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 주어진 일을 수행하며, 그것을 즐길 뿐.

    그런 성향이라 그런 걸까. 임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는데도, 그 날을 애써 손꼽아 기다리거나 기뻐하거나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임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 속 몇 개의 에피소드를 보면서 문득 나는 '여행'이 생각났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장면들은 '여행'이라는 행위와 무척이나 닮은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낯선 곳으로의 발걸음,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낯선 사람들. 때로 일행이 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혼자 책임 질 부분에서는 큰 도움 안 되는 아군. 처음에는 좋아서 나왔다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이것이 좋아서 하는 건지,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건지 헷깔리는 상황. 그 속에서 일상처럼 반복되는 위험한 여정, 그리고 목적하는 임무 수행. 그리고 휴식. 또 반복되는 하루.
     
    혹시나 말라리아같은 질병에 걸리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고, 사기꾼을 만난다면 가진 것들을 많이 잃을 수도 있다. 천 길 낭떠러지 위를 내달리는 너덜거리는 버스에서 현실적인 목숨의 위협을 느낄 때도 있으며, 때로는 사전지식 없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위험지역에 발을 딛기도 한다. 어떤 때는 목적지를 못 찾아서, 혹은 또 다른 어떤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해 화가 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미완성으로 남겨두고 안타깝게 발을 돌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런 세세한 것들을 끼워맞춰보니 정말 이 영화에 나오는 폭탄 제거원은 한 사람의 여행자와 많이 닮아 있었다.

    때론 반복되는 여정 속에서 여행 자체가 일상이 돼 버렸을 때, 하루하루 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그 날이 다가오면 그게 딱히 좋기만 한 것은 또 아니다. 뭔가 시원섭섭한 마음, 알 수 없는 두려움. 그 때는 이미 예전의 일상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또다른 모험으로 내 앞에 버티고 서 있음을 온 몸으로 느낀다.




    어릴 때 궁금해하고 신기해 하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별 게 아니라고 느껴지고, 이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많아야 하나 둘. 그리고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뿐. 보들레르의 시 구절처럼, '한 번 하늘의 끝자락을 본 자는 결코 현실에 안주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사랑도 중독이고, 전쟁도 중독이고, 여행도 중독이다. 세상은 이미 미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고, 이왕 미칠 바에야 목숨이 위험해도 차라리 내가 원하는 일에 미치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어차피 전장으로 나가지 않아도, 위험한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어디선가 달려드는 운 없는 자동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 그럴 확률이 더욱 높은 이상한 세상이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진정 원하면 떠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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