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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는 진정성의 공명 - 이배용 이화여대 총장님과의 대화
    취재파일/인터뷰 2010. 8. 5. 17:57

    정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본관까지 쭉 뻗은 도로가 눈길을 끌었다. 그 길 양편으로 계곡처럼 들어선 독특한 건물 또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화여대의 새얼굴이라 할 수 있는 '이화캠퍼스 복합단지(ECC)'는, 그렇게 처음 이 학교를 들어서는 사람에게 독특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연면적 2만여 평, 총 6층으로 이루어진 캠퍼스 공간. 그 공간을 중심으로 많은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을 하고, 그늘을 즐기고 있었다.

    지상인지 지하인지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는 그 복합단지는 사실 좀 삭막한 데가 있다. 건물 전체를 투명한 유리로 처리해서 열린공간이라는 느낌을 주긴 했지만, 어쨌든 엄청난 규모의 인공구조물은 사람에게 위압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공간을 지나서 본관을 넘어가니, 본격적인 교내 공간이 시작되었다고 느껴질 만큼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이 펼쳐졌다. 초록과 꽃들이 아기자기하게 배치되어 마치 잘 꾸며진 정원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이화여대의 진면목이라 부를수 있는, 본관부터 그 너머로 쭉 펼쳐지는 초록 우거진 캠퍼스. 그 중에 어느 작은 우물터 앞에 소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진선미관'에서 이배용 이화여대 총장님을 만났다.





    이배용 이화여대 총장님을 만나다


    "요즘 이대 땅을 밟으면 부자가 된다는 소문이 퍼져서, 외국인 관광객들, 특히 중국인들이 우리학교에 많이들 찾아오고 있습니다".

    역시 총장님답게, 자리에 앉기도 전에 첫 운을 학교 자랑으로 시작하셨다. 옛날에 이대 앞에 기차길이 있을 때 기차 꼬리를 밟으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한다. 요즘 이대 땅을 밟으면 부자가 된다는 소문도 거기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겠냐고 추측을 하셨다. 외국인들에게 이화여대는 서울관광의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며, 지인들이 모금함을 두고 관람료를 받으라고 했다며 환한 웃음으로 너스레를 떠셨다.


    이화여대는 졸업생 수만 18만에 이르는 전통있는 학교다. 그 졸업생들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그리고 해외에서도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으니, 이화여대 땅을 밟으면 부자가 된다는 소문이 난 것 아니겠는가라는 추측도 내놓으셨다. 어쨌든 학교가 인기가 많으니 학교 앞 상가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그래서 때때로 장학금을 내는 상인들도 있다고. 그 정도면 관람료로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하신다. 

    "이화여대는 역사의 맛과 멋이 살아있는,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캠퍼스입니다". 한국문화 전도사로써 캠퍼스와 자연을 조화롭게 꾸미고 아름답게하기 위해, 어느 곳에 어떤 꽃을 심을지 결정하는 작은것부터 직접 챙겼다는 총장님. 그녀의 첫인상은 넉넉한 웃음에 묻어나오는 섬세한 감성이었다.






    한일 병합 100년, 외면당한 우리 문화



    "올해가 '한일 병합 조약'이 있은지 딱 100년 째 되는 날입니다."

    이대가 역사적인 학교이고, 한국 여성사 개척사의 중심이라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사극 드라마 쪽으로 이어졌다. 대장금, 선덕여왕 등의 사극 소재를 제공한 장본인이며, 자문 역할을 했다며, MBC는 이대에 장학금을 좀 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웃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끌고 가셨다. 그러다가 은근슬쩍 다다른 곳이 바로 '한일 병합 조약'이었다. 가히 놀랄만 한 솜씨의 이야기꾼임에 틀림 없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때는 관세가 뭔지도 몰라서, 통상조약임에도 관세권까지 고스란히 남의 손에 넘겨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1882년 한미수호조약 때는 미국이 가르쳐줘서 관세권을 행사할 수 있었죠. 그렇게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정보도, 방향 정립도 없이 외래 문물들을 받아들였고, 결국 강제합병까지 간 것입니다."

    그 당시 외래문물과 우리것에 대해 별다른 자각 없이 급변하는 시대를 맞이해서 혼란에 빠졌듯, 지금도 그런 상황에 있는 게 아닌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말을 이었다.


    "내 나라는 남이 지켜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우리 문화를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뭘 알아야 지키지요. 우리 문화를 이해하고,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컨텐츠와 스토리를 개발해야 합니다."

    그녀는 다시 우리 문화에 대한 컨텐츠와 스토리의 예로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궁궐 기둥 옆에 조그마한 물동이가 있는 것은, 불귀신이 찾아오다가 물거울을 보고는 '다른 귀신이 이미 있구나'하고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놓여진 것이란다. 그리고 창덕궁에 손바닥만 한 논이 있는 것은, 임금이 직접 농사를 체험해 봄으로써 농민들의 어려움을 겪어본다는 의미라고 한다. 
     








    세종대왕의 보이지 않는 문화



    궁궐과 임금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자연스레 세종대왕 이야기가 나왔다. 세종대왕은 그녀가 굉장히 존경하는 인물로, 이미 여러 언론에 여러번 이야기를 한 적 있을 정도다. 때마침 나온 정성이 돋보이는 닭백숙을 함께 들며 가벼운 분위기로 세종대왕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세종 8년에 들길을 가다가 만삭인 여자 노비를 보게 되었죠. 임금이 '저 노비도 인간인데 얼마나 힘들겠느냐'하시며, 바로 노비출산휴가 제도를 만들었어요. 출산 후에 100일을 쉴 수 있게 하라고 어명을 내린거죠."

    세종대왕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출산 후 휴가 100일을 주라고 명한 후 4년 뒤에, '아무리 노비라도 자기 산달은 알고 있을테니 만삭 노비에게 산전휴가 한달을 주라'고 다시 어명을 내렸다. 그래서 총합 130일의 휴가를 준 것이다. 그리고 또 4년 뒤에 남편에게도 육아휴가를 주라고 해서, 산후휴가 한 달을 주도록 했다.


    "이런 제도는 동서고금 어디를 찾아봐도 없어요. 바로 세종대왕의 인간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죠. 세상을 넓히는 따뜻함이 있을 때 사람이 희망을 가져요."

    이후 성종 때는 이 휴가를 80일로 축소시켰다. 지도자의 성격에 따라 정책이 달라진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처럼 세종은 백성에 대한 사랑과, 배려, 소통을 가진 인간애 가득한 지도자였다.

    거기다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지만, 우리의 정서는 따로 있다'는 생각이 더해져서, 종묘제례악, 향약집성방 등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급기야 한글 창제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 총장님은 이런 것을 이 시대에 대한 메시지로 받고, 또 다음 세대로 넘겨줘야 하는 귀중한 문화자원이라고 강조하셨다.


    "보이는 것만 문화가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마음도 문화지요."









    공명과 진정성



    "무기보다 무서운 건 분열이에요.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것은 결국 분열과 괴리감 때문이었죠.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에 소통이 없었어요. 전쟁 나가서 싸우는 사람들은 피지배층인데, 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부려먹기만 했으니 제대로 나가서 싸웠겠어요? 그에 반해 신라는 결집력이 있었죠. 특히 선덕여왕은, 사극에서는 존재감이 부족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리더쉽을 가진 강한 여왕이었어요."


    이 총장님은 '우리는 문화를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라며 안타까워하셨다. 그러면서 선덕여왕의 이야기를 하시며 '황룡사 9층 목탑' 이야기를 꺼내셨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가 물리쳐야 할 9적(敵)을 나타낸 일종의 부적이었어요. 기원의 도량이었고, 마음을 모으는 곳이었고, 절실한 기원의 탑이었죠. 그렇게 결집된 마음은 그 시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어요. 그래서 그걸 다시 똑같이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하지만 우리는 그 마음, 그 시대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사용했던 자연염료를 지금에 와서 인공염료로 재현하려 해도, 그 색감이 그대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렇듯 문화유산들도 아무리 잘 복원한다 해도, 원형 그대로 복원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창덕궁 같은 문화유산도 반만 복원하고 반은 놔둬서, 왜 파괴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낫다. 대신 우리는 그 시대의 그 마음을 이어 나가며, 진정성을 가지고 공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사랑을 실천하고 평화를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문화를 귀중히 여기고, 아끼고, 공유하고,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르니까 지나치는 거지, 알면 다같이 다가와 뭉칩니다. 창조력은 진정성과 공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문화로 퍼뜨리는 것입니다. 사람들끼리, 다른 인종끼리, 그리고 다른 시대와 더 나아가 자연까지도, 진정성을 가지고 공명하면 문화로 창조되는 것입니다."

    대화 내내 '진정성'과 '공명'을 강조하셨던 이 총장님은, 소통을 하자는 말만 하지말고 진짜 소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중구난방인듯 한 내용을 마지막 한 마디로 멋지게 마무리 해 주었다.


    "문화의 공명을 통한 인간의 진정성을 찾아야합니다. 진정성은 격려와 칭찬으로 나타날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화합과 소통, 통합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문화는 크기로 비교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총장님은 우리 문화 유적들이 작다고 무시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다.

    "문화는 당당하게 내 놓으면 다들 다가옵니다. 종묘가 중국의 왕릉보다 왜소하다고,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창덕궁이 자금성보다 작다고 '그거 뭐 보여줄 것도 없어'라며 넘어가서야 되겠습니까. 다 잘 몰라서 그런 겁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문화 전도사답게, 이 총장은 외국의 총장들을 모시고 창덕궁을 돌기도 했다. 비록 중국의 자금성에 비하면 크기로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굽이굽이 숨어있는 의미들을 설명했더니 다들 감탄하며 좋아했다 한다. 옛날에 캠브릿지 총장도 방문해서는 감탄을 금치 못한 곳이 바로 창덕궁이라고.


    "문화는 크다, 작다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들어있는 정신과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는 거죠. 우리가 우리 문화를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입니다. 문화를 알아야 우리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고, 우리의 품격이 오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 문화는 옛부터 자연의 품에 안기는 문화라고 설명했다. 원형이정, 즉 자연의 순리 속에서 인간의 이치를 찾는 문화가 바로 우리 문화라고 한다. 왕릉에 가보면 나무들이 왕릉을 중심으로 안쪽으로 굽어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라 했고, 이대 강당 주위의 나무도 강당쪽으로 굽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다.
     
    그것이 바로 나무의 마음이고, 자연의 마음이라 한다. 문화를 말하고,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문화를 인간의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자연의 마음으로 볼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끝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4대강도 문화로 다가갔으면 합니다." 
     








    나가는 길에서



    이배용 총장님은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인터뷰 자리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느라 질문을 던질 생각도 감히 못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보통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자리는 편하지만은 않은 것이 일반적인데, 이번엔 정말로 넋 놓고 이야기에 빠져들었을 정도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총장님의 넉넉한 미소 때문이었을가, 아니면 특별히 준비한 정갈한 닭백숙 때문이었을까.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 나오는 길은 배도 부르고, 머리도 채워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둘러본 이화여대 교내 모습은, 들어올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밤이 되어 어두워져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들어올 때는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구석구석의 초록들이 보였다. 초록 뿐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잘 어우러진 오래된 건물들도 눈에 들어왔고, 특히 최근에 지어진 ECC라는 엄청난 규모의 복합단지 건물 위에도 공원처럼 꾸며진 아기자기한 공간들이 돋보였다. 

    총장님의 말씀대로 이화여대는 그렇게 역사의 맛과 멋이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캠퍼스로 가꾸어져 있었다. 물론 앞으로도 잘 가꾸어 나가야 그것이 유지될테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오래오래 그렇게 아름다운 캠퍼스로 남아주길 바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배용 총장님은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이화여대 총장 자리를 다음 사람에게 물려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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