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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만나서 뭘 어쩔건데 - 티끌모아 로맨스
    리뷰 2011. 11. 19. 04:08

    최근 나는 무료 시사회나 어쩌다 생긴 무료 예매권이 아니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않는다. 극장의 횡포와 상업적 마인드도 마음에 안 들고, 가기도 귀찮고, 사람도 싫고, 기다리기도 싫고, 콜라묻은 손으로 만지작거렸던 의자 손잡이도 드럽고, 수천억명이 머리를 비벼댔던 등받이에 머리 대기도 두렵고,

    무엇보다 그 돈이면 삼겹살 일인분! 


    마음속 아주 작은 한구석에는 인디영화 사이트에서 인디영화 한 편이 2천 원이라고, 대형영화 한 편 볼 돈으로 인디영화 여러 편에 투자할 수 있다는 대의명분(?)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도 결국 돈 문제. 자원이 많으면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마음놓고 보고 다닐 테니까.

    어쨌든 그런 나에게 '티끌모아 로맨스'는 꽤 관심이 가는 영화였다. 사랑보다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연애보단 소중하고 귀중한 돈 이야기를 현실에 가깝게 표현한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어느날 펩시콜라 이벤트 응모해서 받은 무료 예매권으로 뒤늦게, 볼 만 한 사람들은 이미 다 본 시점에서 보러 갔다. 막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속을 뚫고.






    가난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행복은 창문을 열고 도망간다


    영화 초반부터 한예슬이 쓩~하고 날아오더니 현실적이고도 충격적인(?) 대사를 읊어댄다. '맥주병 하나에 50원. 하루 3병씩 1년을 모으면 54,750원. 그 정도면 1년치 수도세는 된다!'

    평소 예쁜 모습과는 다르게, 좀 퀭한 모습으로 일부러 화장도 모르고 돈 모으기에 열중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스크린에 나와서는, 시종일관 거의 항상 우울한 캐릭터의 음울한 대사를 토해내는 한예슬. 독특한 목소리로 음울한 시를 읊으니 색다른 맛이 나기도 했다.


    "영양이 표범한테 안 잡아 먹히려고 빨리 달리는 줄 알아? 다른 영양보다 빨리 달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라는 철학(?)을 가지고 하루하루 전쟁처럼 돈을 버는 구홍실(한예슬).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옥탑방에서 쫓겨나게 된 청년 백수 천지웅(송중기). 영화는 그들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둘이 돈 때문에 얽히게 되어,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은, 고물 팔기부터 시작해서, 맛집에 액자 팔기, 연예인 사인 팔기, 예식장 하객, 각종 장사 등. 그리고 돈을 아끼기 위해서는 남의 집 쓰레기 봉투 남는 공간에 쓰레기를 쑤셔 넣는 일도 서슴없이 해낸다.

    이런 작은 일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는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개발, 펀드, 된장녀, 돈 많은 남자 등등이 나와서 영화는 철저하게 돈에서 시작해서 돈 이야기로 나간다. 심지어 한강에 뛰어들어 구조되어 나온 상황에서도 병원에서 돈 얼마 내라는 대사도 빼놓지 않고 꼭 끼워 넣어주는 센스. 



    "세상에 쓸모 없는 물건은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내게 종교, 연애, 병은 없다. 돈이 드니까" 등의 주옥같은(?) 대사들을 뱉어내는 한예슬을 보고 있노라면, '가난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행복은 창을 열고 도망간다'라는 서양 속담과 함께, 영화 '비커밍 제인'의 '가난만큼 영혼을 타락시키는 것은 없다' 같은 주옥같은 대사들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영화가 현실을 다루어도 영화는 영화일 뿐


    다소 음울하고 심각한 내용들로 흘러갈 수도 있었지만, 주로 송중기의 몸을 내던지는 코믹 연기로 관객들의 폭소가 터지기도 했는데, 일반 로맨스 영화였다면 그 정도 웃음을 줬으면 평점이 상당히 높았을 테다.

    하지만 사람마다 평가가 좀 엇갈리고, 평점도 그리 많이 높지는 않은 것은, 아마도 너무나 현실적인 소재들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특히 별 생각없이 극장을 찾았다가 자신의 아픈 상처를 뜨끔하게 찔린 사람들은 상당히 불쾌할 수도 있겠다 싶다.



    영화 보면서 틈틈이 신경쓰이게 만들었던 옆자리 커플. 뭔가 무엄한 짓거리 좀 해 보려고 아예 작정하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잘 앉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더니, 남자는 계속 내 눈치를 보며 (근처에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까) 여자의 가슴과 다리를 공략하려 했고, 여자는 귀찮은 듯 손을 뿌리치며 영화를 단 한 번의 웃음도 없이 지켜봤다.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그대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듯 한 느낌. 그러다가 영화 끝나니까 화가 난 듯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 여자. 아마도 이 남자는 애꿎은 영화 탓을 하겠지.

    그리고 일부러 뒤늦게 나가면서 사람들 속에서 영화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는 이걸 즐긴다), 신기하다 할 정도로 이 영화를 보고 나가는 사람들은 영화 내용에 대해 거의 얘기를 안 하더라는 것.

    겨우 한다는 얘기가 한예슬 화장 안 한 것 같네라든가, 송중기때문에 웃었네 정도였다. 코미디 로맨스에서 영화 내용 이야기할 게 뭐가 있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내용이 조금은 독특해서 이야기가 좀 나올 줄 알았는데.


    그 중에 여자애들끼리 이 영화를 보러 온 한 무리에서, 한 여자는 한예슬이 '천 원 주면 뽀뽀 해 줄 게'라는 대사와 포즈가 너무 애교스럽다며 꺅꺅거리며 그 대사만 몇십 번 반복하며 '나도 연애 하고 싶다'를 반복하다가, 옆에서 가만히 참고 듣던 친구가 '너 연애할 돈 있으면 저번에 꿔 간 돈 좀 갚아!'라고 딱 쏘아붙이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 반응들을 보면서,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알게 모르게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감정적으로 그리 편하지 않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었다.

    뭐 그리 현실을 깊게 파헤친 것도 아닌데, 이 정도에 그렇게 우울해하면 어쩌냐. 난 오히려 부자들이 '아, 저런 식으로 돈 모으면 5년 만에 2억도 모을 수 있는 거구나. 가난뱅이들은 노력을 안 해서 가난한 거구나'라고 생각할까봐, 그게 더 걱정되더만.


    사실 요즘 가난한 동네에서는 빈평이나 폐지, 고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쓰레기 봉투가 찢어질 정도로 꽉꽉 채워넣어서 빈 공간도 없고, 결혼식 하객도 할 사람 많아서 일당도 낮은 편이고, 당장 주위를 둘러봐도 일상에서 10킬로미터 이내를 걸어서 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고 등등, 현실에 근접했을 뿐 이마저도 영화는 영화다. 언제나 항상 현실은 영화보다 더 못한 거다.








    우리가 만나서 뭘 어쩔건데


    그러니까 사실 현실적으로 이 둘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당장은 외롭고 쓸쓸해서 어떻게 한동안 서로를 위로하는 존재로 위안삼아 만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남자가 꽤 괜찮은 곳에 취직을 한다든지, 둘이 함께 적당히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다든지 하는 등의 변화가 있지 않는 한은, 언제든 어느 때든 깨져도 별로 이상할 것 없는 커플이다. 게다가 여자가 젊을 경우에는 좋은 남자 만나서 신분상승을 노려볼 수도 있는 일이고.

    따라서 이 영화에서 현실적인 것은 한예슬의 대사 딱 하나 뿐이다. "우리가 만나서 뭘 어쩔건데? 우리같이 거지같은 인간들이 만나서 뭘 어쩔 거냐고!". 



    그럼에도 대중성을 인식했는지 영화는 해피엔딩이니, 이제 갓 연애를 시작하려는, 혹은 시작한 가난한 연인들이라든지, 아니면 돈 없어서 연애 못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솔로들이라든지, 혹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는 방법으로 대를 끊는 방법을 선택한 사람들은 한 번 쯤 영화적인 현실과 그 속의 판타지 로맨스로 대리만족을 얻을 수도 있겠다.

    ...라지만, '가난해서 연애 못 해'라며 누군가의 고백을 거절한 경험이 있다거나, 아예 시도조차 해 볼 엄두를 못 내거나 하는 사람들이라면 애써 찾아 볼 필요는 없겠다. 이미 상처는 여기저기서 많이 받을테니, 극장에서 또 받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런 분들은 언젠가 이런 영화를 보며, 저럴 수도 있겠거니 하며 즐길 수 있는, 초월한 경지에 한 시 바삐 도달하기 바란다. 이런 나를 이해해 줄 사람 있을거야라는 영화같이 판타지적인 사고방식은 어서 빨리 버리고, 현실의 땅으로 내려오기 바란다. 물론 주변을 둘러보면 일부 예외적인 사람들이 보이긴 하지만, 예외는 예외일 뿐. 그 예외는 로또 1등 당첨자가 매주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 누군가의 행복들이 나에게도 틀림없이 찾아오게 되리라고 생각하면 불행이 시작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위안이다, 정말 어쩔 수 없다면 깨끗이 포기하라.






    아아, 막 풀어내면 좀 잔인할 것 같아서 말을 많이 아꼈더니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돼 버렸네. 그저, '죄수가 탈옥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면, 가난뱅이도 연애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거겠지'라는 말을 남기며, 한예슬이 환경부나 용기순환협회 광고 모델로 섭외되어 빈병 수거 운동에 앞장 서 주길 바랄 뿐이다.

    (이 부분도 할 말 많은데. 정부에선 일반인들보고 빈 병 모읍시다 외치지만, 빈 병 가지고 가게 가면 싫어하는 티 팍팍 내는데, 핀란드 같은 곳에선 빈병 수거 자판기를 설치해서 수거율이 거의 70%에 달한다든지 하는 내용들. 에이 그만하자, 이런게 한둘인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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