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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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떻게 사랑했을까사진일기 2010. 10. 13. 13:29
* 핫초코와 브라우니의 달콤한 향기가 아직 눈에 아른거리는 늦은 밤, 푸른빛의 레몬같이 따스하고 편안한 카페 불빛을 뒤로하고 올라탄 지하철. 이미 막차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전철 안은 승객이 별로 없는 조용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졸거나, 신문을 보거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각자 나름대로 하루를 마감하며 조용한 귀가길에 올라 있었다. 그때 정차한 어떤 역에서 들어온, 술냄새가 확 풍기는 두 남자. 어깨동무를 했지만 단순한 어깨동무라기보다는, 서로서로 뒤엉켜서 보듬어 안고 들어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모습. 들어올 때부터 조잘거리며 낮은 웃음을 웃던 그 둘은, 승객이 없는 텅 빈 길쭉한 의자에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고, 거의 포개앉다시피 딱 붙어 앉았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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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사진일기 2010. 10. 12. 18:14
하늘이 진다 꽃이 저문다 파아란 구름따라 바람이 분다 당신은 꽃이 되고 싶다 했다. 굳건한 대지에 힘차게 뿌리를 박고 있는 꽃이 당신의 입술만큼 갸느린 바람보다 좋다 했다. 오랜 방황의 터널 중간에서 어디쯤 왔는지 알 수도 없는 어둠 속에서, 당신은 이제 그만 길을 벗어나고 싶다 했다.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은 완강했고, 나는 확신이 없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우리는, 함께할 수 없었다. 그곳에도 지금즘 별이 지는가. 알록달록 만발한 코스모스가 우주처럼 차가운 꿈을 꾸는가. 꽃이 진다 네가 저문다 까아만 별빛따라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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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사랑하지 않았을 뿐사진일기 2010. 9. 23. 04:06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수천가지 이유와 변명을 갖다 붙이며 나는 거부했지. 우린 분명 사랑했었고, 그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고. 추억 속에, 기억들이 빛 바랜 사진처럼 변해간다 해도, 아무리 아무리 용서할 수 없는 이별에 분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버둥거릴 수도 없이 싸늘한 가슴의 텅 빈 구멍에 아픔으로 차오른다 해도,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수천가지 이유와 변명을 갖다 붙이며 나는 거부했지. 우린 분명 사랑했었고, 그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흘러 흘러간데도 그것만큼은, 그 시간, 그 장소, 그 사람만큼은 진실이었을거라고. 그렇게 외면하고 거부하고 귀를 막고 눈을 막아도 결국은 알고야 말았지, 그건 마치 서서히 스며드는 새벽녘의 이슬과 같아 어떻게 막을 수도 없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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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광화문점 재오픈을 맞이하며사진일기 2010. 8. 27. 16:46
옛날에 옛날에 곰과 호랑이가 동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던 시절, 호랑이가 나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그 무렵에, 부산에는 교보문고가 없었다. 그 때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것은 교보문고의 누런 종이봉다리. 그당시 부산에선 일상에서 그 봉다리를 접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서울'의 상징인 양 의기양양하게 들고 다녔던 거다. 그걸 보는 사람들 또한 알게 모르게 '저것봐라'같은 눈초리로 그걸 또 눈여겨 보기도 했고. 특히 대학가에서 그런 일들이 빈번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지방의 어린 사람들은 '서울'하면 뭔가 동경의 대상인듯 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서울에 올라와서 한동안 교보문고의 누런 종이봉투는 내게 희망의 상징이었다. 빌어먹을 자본주의에 돈을 위해 하고싶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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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 옆의 꽃은 꽃이 아닌 걸까사진일기 2010. 6. 17. 01:41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갔다. 한 시간 삼만 원이라는 꼬임에 넘어간 것도 있지만, 호기심이 발동한 탓도 있었다. 어디든 그렇듯 부리는 자들은 약속했던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원했고, 어디든 그렇듯 일하는 자들은 자신의 부당함에 화를 내며 항의했다. 단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조금 더 거칠었고, 조금 더 살벌했다는 것. 그나마도 선착순에 밀려버린 잉여인간들은 시간만 날리고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어떤 험한 꼴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서였을까, 그래도 차비 정도는 쥐어주며 화가 분노로 치밀지 않도록 대충 수습을 하는 모습이, 아니꼽기보다는 애처로워 보였다. 많은 군상들이 있었다. 절반 이상은 대학생이거나 젊은 백수였다. 나머지 절반은 어떤 부류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 방세 이십만 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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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꽃보다 추한 세상에사진일기 2010. 6. 16. 00:38
비가 오고 꽃이 졌다. 꽃이 진 것은 비 때문이었지만, 비가 온 것은 꽃 때문이 아니었다. 빗물 속에 잠긴 꽃잎들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세상이 사람들을 그리 만들었지만, 세상을 그리 만든 건 사람들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어쩌면, 이 세상은 사람들의 노력과 의지와는 무관하게 스스로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사회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자연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한 마리 미꾸라지가 흙탕물을 만들지만, 미꾸라지는 원래 그런 물에 산다는 거다. 세상에 나쁜놈이 많다면, 세상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그럼 대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 걸까. 무척이나 무기력한 사실이라 애써 외면해야만 하는 걸까. 요즘 내 주위 사람들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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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끝을 본 적 있었다사진일기 2010. 6. 15. 01:44
언젠가 중국에서 하루 밤낮을 꼬박 달리는 기차를 탄 적 있다. 한 쪽 벽에 세 개씩 침대가 층층이 있었고, 각 침대들이 양쪽으로 각각 마주보는 형태의 침대칸. 침대칸 중에는 가장 싼 객실이었지만, 중국인들 특히 시골 사람들 물가로 봐서는 그리 싸다고 할 수는 없는 가격이었다. 시골에서 출발한 기차라 그런지 승객도 별로 없었는데, 내 자리 맞은 편에는 내 또래의 중국 소녀 하나만 조용히 앉아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주춤주춤 흐르는 어색한 시간 끝에, 먹거리를 판매하는 사람이 통로를 지나왔다. 소녀는 보잘것 없이 아무렇게나 포장된 듯 한 투명한 비닐봉지에 싸여진 먹거리를 샀고, 느닷없이 내게 그걸 건네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야'라고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물고를 트게 된 대화는 서로 알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