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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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 쿨하게 얼어붙은 마음으로사진일기 2010. 1. 23. 04:22
세상이 내 마음같지 않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처음보는 사람 뿐만 아니라,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일지라도,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대한다는 것이 이미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고 아둔하고 바보스러운 짓이 되어버린 세상. 누구를 탓 할 수도 없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세상을 욕 할 수도 없고, 인생을 슬퍼할 수도 없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그래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되뇌이고, 되뇌이고, 또 되뇌이는 말.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뜻하지 않게 씹어버린 내장처럼, 잊을 만 하면 불현듯 다가와 다시 머릿속에 새겨지곤 한다. 내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당신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세상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래, 그러니까 포기할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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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식당한 영혼에도 평화 있기를사진일기 2010. 1. 12. 06:35
한동안 숙식을 빌었던 그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한 건, 함께 기거한지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서 부터였다. 긴 여행동안 아직 닫히지 않은 감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지내어서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 누적된 피로속에 그의 행동은 또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왔는데, 한 편으론 알 수 없는 호기심과 끌림으로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빙의였다. 낮이건 밤이건 시도때도 없이 그의 언행은 여러 형태로 돌변했다. 불과 얼마전에 한 말과 행동도 곧잘 기억하지 못하고는 자기 자신은 그런 적 없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순간 순식간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돌발행동들. 여러 밤들을 거쳐 기이한 행위들을 목격했다. 밤새도록 혼자 중얼거리며 좁은 방 안을 맴돈다거나, 어두운 방 한 쪽 구석에 혼자 우두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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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키델릭 생리 불순사진일기 2010. 1. 5. 09:40
떠오르지 않는 생각들의 동굴 속을 걸어갈 때도 괴롭지만, 너무 많은 생각들이 거친 풍랑 빗줄기처럼 내리쳐도 곤란해. 더이상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넘쳐 흐르는 강둑처럼, 미처 표현하지 못한, 표현할 수 없었던 감각들이 넘쳐 흐르고, 흐르고, 또 흐르다가 급기야 콱, 하고 막혀버렸어. 정말 이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야. 심각한 건, 일정한 주기는 없지만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건데, 이를테면 주기가 불순한 정신적 생리인 것 같아. 정말 고통스럽고 찝찝하기 그지없는 일상 속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언제 짜증 비슷한 뭔가가 터져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나도 주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말이야. 아, 표현하지 못 한 감각들은 그대로 버려져야 하는 걸까. 태어나지 못 한 생명들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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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천년을 기다려 질리안사진일기 2010. 1. 4. 04:24
오랜 세월이 흘렀어. 당신은 저 어두운 하늘 어느 구석을 부유했지. 갈 곳도 없었고, 가야할 곳도 없었어. 마치 처음부터 그래야만 했던 것처럼, 꿈도 없이 길고 긴 방황을 해야만 했지. 마침내 천 년이 흐르고 약속한 날이 왔어. 당신은 꽁꽁 언 몸으로 이 땅에, 다시, 내려왔지. 하지만 이미 세상은 당신이 기억하던 그 세상이 아니야. 시간이 흐른 탓도 있겠지만, 이제 당신은 더이상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니까. 차가운 눈빛, 얼어붙은 마음, 고단한 발걸음. 당신은 이미 너무 늦어 버렸어. 그 하늘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대지에서도, 또다시, 바람에 날려 여기저기 떠돌며 눈물을 흘렸지. 나는 왜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걸까. 오랜 세월이 흘렀어. 당신은, 질리안, 잊혀진 사랑의 전설이야. 천 년을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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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솜사탕사진일기 2009. 11. 26. 02:59
시간이 한없이 늘어져간다. 나는 자판을 잡고는 있지만 마땅히 쓸 말이 없다. 희뿌연 하늘처럼 머릿속이 까마득해진다. 그리고 시간은 나를 용서치 않았다. 나도 매일 똑같은 시간 속에서 한 번 즘은 작고 달콤한 솜사탕을 음미할 시간 정도는 가져도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상하게도 찾을 때면 보이지 않다가도, 어느날 문득 길 가다가 불현듯 잊고 있던 옛 추억이라도 되는 양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지. 그럴 때면 어쩐지 빛바랜 추억처럼, 그래 나도 달콤한 솜사탕을 먹을 정도의 자격은 있다고 봐 라고 생각하다가도 바삐 발걸음을 옮기지. 사실은 딱히 바쁜 것도 아니야, 사실은 딱히 가야하는 것도 아니야, 사실은 딱히 내가 있어야만 하는 자리도 아니야.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나도 이렇게 바삐 걸어간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