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박스를 샀더니 과자가 있었는데 과대포장 아니고 발리가자
추워서 마트에 갔다. 마트는 더울땐 시원하고, 추울땐 따뜻하고 언제나 에너지 빵빵, 도심의 놀이터. 사실은 라면 사러 간 거지만.
라면 한 팩 사려고 마트까지 가는게 과연 효율적인가라는 고민도 해봤지만, 돈은 시간보다 소중하니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분배되지만 돈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돈이 모자란 사람은 시간을 팔아 돈을 아낄 수 밖에 없는게 자본주의.
계산대에 늘어선 긴 줄을 보며 한숨이 나오던 찰라, 신기한 걸 하나 발견했다. 며칠 전까지 못 보던 과자가 놓여 있었다.
플라스틱 박스로 큼지막하게 떡하니 포장돼 있는데, 단돈 3천 원. 마트 PB 상품이라 이 가격에 판매되는 듯 했다.
여기서 PB 상품은 자체개발상품(Private Brand Products)를 뜻하는데, PL(Private Label Products) 혹은 OL(Own Label Products)도 다 똑같은 거다. 마트 자체 브랜드를 찍어 나온 상품이다.
크기가 꽤 큰 편이다. 높이도 있어서 일반적인 과자들의 종이 포장에 비해 크고 넓다.
살짝 고민을 했다. 안 그래도 수납용 플라스틱 박스 하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다이소 가면 천 원 정도면 살 수 있지만 그게 또 사려니 괜히 돈 아까운 거라.
그래서 안 사고 버티고 있었는데 마침 이런게 눈 앞에 딱. 이건 나 같은 사람을 노리고 나온 건가.
포장 옆면을 보니, "과자를 다 드시고 난 후 수납용 상자로 활용하기에도 좋습니다"라고 깨알같은 글씨로 적혀 있다. 오호라, 이걸 노렸구나.
사실 과자 몇 개 사 먹는데 이런 큰 플라스틱 쓰레기가 나오면 구입하는데 좀 부담이 간다. 이 통을 쓰레기라 생각하면 누가 이런걸 사겠냐 싶을 정도다. 그래서 내가 샀다.
뚜껑을 열어보니 과자 14봉지가 들어있다. 한 봉지엔 과자 4개가 들어있다. 딱 보기에도 참 거시기하다.
어릴때 크리스마스에 기대를 품고 열어본 박스 안에 초코파이만 열 개 들어있는 걸 발견한 그런 기분이다. 난 그 때부터 초코파이를 싫어했지.
사실 어떻게 보면 3천 원 치고는 적당량이 들어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 과자 가격에 비하면 그리 부실하지는 않은 편이다.
아마도 박스가 너무 강렬한 인상이고, 크기도 크고 해서, 안에 뭔가 엄청난 것이 들어 있을거야라고 기대를 해서 실망도 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과자는 맛이 있었다. 제과점에서 파는 마늘빠게뜨 맛 그대로였다. 식감은 비스켓이고.
갈릭 브레드맛 크래커를 선택해서 그런 거였는데,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희끄무리한 표지가 붙은 거였는데, 그건 별로 맛있게 보이지 않았다.
Kokola Biscuit
수입판매원은 롯데쇼핑. 제조원은 'PT. Mega Global Food Industry'라고 돼 있다.
이게 뭔가 싶어서 찾아봤더니 인도네시아 과자 회사다. 'Kokola Biscuit'이라는 브랜드로 유명하다. 홈페이지를 봤더니 내가 이미 먹어봤던 과자들도 있다.
위치는 수라바야 쪽이다. 발리하고 가깝다. 나중에 혹시나 발리에 놀러가게 되면 찾아가보는 것도 재밌겠다. 가서 너네 과자 먹어봤다고 자랑하고 다시 돌아가는 거다. 생각만해도 즐겁다. 좋은 여행이 될 것 같다.
근데 박스 옆쪽 표기엔 '비닐류'라고 돼 있다. 아무리봐도 플라스틱인데. 비닐로 버리면 되는 건가. 안 받아줄 것 같은데. 박스에 붙인 스티커가 비닐이라는 뜻인가. 대체 뭐가뭔지 모르겠다.
헌데 뭐가뭔지 모르겠는 거는 이것 뿐만이 아니다. 이건, 내가 보기엔 과대포장이다. 과자를 꼭 이렇게 플라스틱 박스로 포장을 할 필요가 있나.
하지만 환경부의 과대포장 방지 기준에는 제품의 포장공간비율과 포장횟수만 있다.
제과류는 포장횟수 2차 이내, 포장공간 비율 20% 이하만 지키면, 포장을 플라스틱으로 하든, 금덩어리로 하든 상관이 없다.
제품의 종류별 포장 방법에 대한 기준
위 표는 환경부에서 제시한 '제품의 종류별 포장 방법에 대한 기준'이다.
제품 종류별로 포장공간비율과 포장횟수를 정해놨다.
여기서 제과류는 포장공간비율이 20% 이하면 합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설날이나 추석 쯤 되면 마트의 종합선물세트 과대포장 단속한다며 기사에 나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종합제품'에 들어간다. 25%이하로 돼 있다.
상품의 제품체적 및 필요공간용적 예시
'포장공간비율'은, "전체 포장용적(부피)에서 제품체적(부피) 및 필요공간 용적(부피)를 제외한 공간이 차지하는 비율"이다.
전체 공간에서 제품의 부피와, 어쩔 수 없이 차지하는 포장의 부피를 뺀 것이라 할 수 있다.
식으로 나타내면 이렇다.
실제로 과대포장 단속 할 때 쓰이는 공식이다.
이 기준을 지키지 않아서 걸리면, 제조사나 수입사에게 최대 30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근데 여기 걸리는게 더 이상할 정도다. 선물세트 안쪽을 보면 플라스틱이나 종이로 '고정재'를 사용한다. 제품을 고정시키려고 넣어둔 쓸 데 없는 그것.
그걸 사용하면 가산 공간을 부여해서 '필요 공간'으로 쳐 준다. 그래서 실제 소비자가 느끼는 과대포장과 계산상의 과대포장이 달라지는 거다.
또한, 치약 같은 것을 계산할 때, 포장된 부피를 계산에 집어넣는다. 그러니까, 선물세트 부피를 계산할 때는, 치약 본체 부피가 아니라, 상자에 포장된 치약의 부피를 계산한다.
이러면 오히려 단속에 걸리는 제품들이 더 이상할 정도다. 우리가 느끼기엔 과대포장인데도 단속할 땐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는 이유다.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아래 기사를 읽어보자.
> [뷰엔] 빈 공간이 반인데 과대포장 아니라고? 고정재의 함정 (한국일보)
그리하여 이 제품 또한, 내가 보기엔 포장이 너무 과한거 아닌가 싶지만, 공식과 계산법에 따라 계산해보면 절대 과대포장이 아니다. 아주 규정을 잘 지키고 있다.
뭐 어쨌든 나는 플라스틱 상자가 필요했으니 그걸로 된 것일까. 지금 이 박스는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잔돈을 넣어두는 용도로 쓰고 있다.
환경부가 일반 국민들에겐 박스를 없앤다 어쩐다하며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면서, 기업들은 이렇게 봐줄거 다 봐주고 느슨한 규정을 취하고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국민들은 일회용품 쓰지 말라고 쪼으면서 마트 시식코너의 일회용품 사용에 대해서는 입 꾹 닫고 있다는 것도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나는 플라스틱 박스를 샀더니 과자가 들어있었다는, 일상의 아기자기한 체험을 가볍고 아름다운 감성적인 느낌으로 소개한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