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없는 서울의 밤에 관하여>



여러 독자님들, 내 말 좀 들어보소.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말이 좋아 공주지, 따지고 보면 노숙자 아니오.

나무 우거진 시골에서 잠을 자는 거나,
빌딩 우거진 도시에서 잠을 자는 거나,
나무 숲이냐, 빌딩 숲이냐 차이일 뿐,
어찌됐든 둘 다 숲은 숲이지 않소.

그래서 나도 지나가는 공주의 키스나 받고,
잠에서 깨어 인간 좀 되어 보려 했소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서울에는 공주가 없더이다.
참으로 안스럽고, 슬픈 일이지 않소.



혹자는 이렇게 말 할 것이오.
공주가 있다 해도 그 꼬라지 하고 있는데 키스 하겠냐고.

그건 이미 동화 속 이야기에서도 나오는 내용이오.

제아무리 공주고, 미녀고 해도,
숲 속에서 뒹굴뒹굴 잠만 자며 씻지도 않았는데 샤방샤방 빛 날 리가 있겠소.
검댕이 묻고, 먼지도 앉고, 옷은 꼬질꼬질, 때는 더덕더덕,
사람이 한 달만 씻지 않아도 어떤 꼴이 되는지 아실테요.

그러니 그 입술에 키스하는 왕자가 더 대단하다, 이 말씀이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런 이야기들에 나오는
이 왕자라는 인물이 참 이상하오. 실명이 나오지 않는단 말이오.
어쩌면 이 왕자라는 사람이 모두 동일인물이 아닌가 싶소.

아마도 백설공주가 깨어나서 좋아라하고 따라갔더니,
왕자의 성에는 이미 '잠잤던 숲속의 공주'가 있더라.
그래서 왕자 따라가는 대목에서 어영부영 '행복하게 살았데요, 끝',
이렇게 얼버무린 것 아닌가 싶소.

다시 말하자면, 이 왕자는
노숙녀를 수집하는 변태일 지도 모른단 말이오.

그러니까 노숙자를 수집하는 공주가 있다면
나도 어엿한 컬렉션으로 수집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능...



그만하겠삼.
이거, 내가 봐도 너무 아스트랄해서 감당하기 버거워... ㅡㅅㅡ;




*
<삼년이에 관하여>



충북도청이라는 데서 연락 왔을 때,
나는 지금 지방에 살고 있으니 다른 데서 합류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더니,
일언지하에 안 된다고 하더이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막차 타고 서울 올라가서 노숙하고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 몇몇 사람들이 청원 IC인가에서 합류하더이다.

앗, 왜 저들은 청원 IC에서 타는거지?
왜 나는 IC에서 타면 안 되는거지?
아이씨... ;ㅁ;



그래서 내게 연락했던 행정인턴 양에게 앙심을 품고,
'내 이번 여행기는 3년 후에 올릴테다'라고 마음 먹었소만,
생각해보니 아무리 내가 A형이라도 그건 너무 쪼잔하매,
관대함을 위장하여 이제 여행기를 쓰기로 했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저 어두운 마음 구석 앙금으로,
'여행기 3년 후 = 행정인턴 양' 해서
이 분을 '삼년이'라고 이름붙이기로 한 것이오.

여행기 쓰면서 이런 식으로 이름붙이는 사람이 또 나올지도 모르는데,
저를 계속 지켜보신 분들이라면 다들 익숙하신 이 말 한마디를 남기겠소.
"꼬우면 니가 만화 그리시든지~"



아, 그렇다고 삼년이를 미워하는 건 아니오.

그 태가 어여쁘고, 아리따워 가만히 있어도 빛이나매,
행실은 어찌나 곱고 수려한지 티 나지 않는 일도 혼자 묵묵히 잘 하고,
언행도 화려하지 않으나 수수하면서도
제 할 말 못 할 말 가리면서도 똑똑하게 일을 처리하니,
영특하기도 이루 말 할 것 없는 수려한 처자인지라,
나이 맞는 주위 솔로 남정네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소.

하오나 사람이 어찌 작은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할 수 있겠소.
삼년이도 사소한 결점이 하나 있으니, 정말 사소한 것인데,
열 살 짜리 딸이 하나 있다는 것이오.

넓은 아량과 이해심으로 포용할 수 있는 자는 관심가져 보시기 바라오.




*
<노숙에 관하여>



노숙을 해 본 적 있소?

노숙은 집 없는 자의 심벌이기도 하지만,
여행자의 특권이기도 하고, 유목민의 일상이기도 하오.

서울같은 대도시는 사실 노숙하기 좋은 곳은 아니오.
하지만 단지 여행이라는 명목으로 세계 여러 도시에서
이미 노숙을 한 적 있는 바,

서울도 내게는 고향도 아니오, 이제 삶의 터전도 아니오,
수많은 여행지 중 한 곳일 뿐이니,
이제 거기서도 거리낌없이 여행자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소.



혹자는 좀 더 편하게 휴식할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 하겠소만,
단 한 시간 짧은 잠을 자기 위해 힐튼 호텔을 갈 수는 없지 않겠소.

그렇다고 새벽부터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꾸벅꾸벅 졸면서
노선을 빙빙 도는 것은 오히려 노숙보다 못한 짓 아니겠소.

그래서 노숙은 택하였소만, 정착민 여러분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그 무언가가 있소.



세상에 태어나 노숙 한 번 못 해보고 떠나는 자의 삶이란
얼마나 무의미하고도 허탈하겠소.

노숙은 밤샘이나 캠핑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오.

세상 어느 곳도 받아줄 이 없다는 막막함과,
내 몸 하나 따뜻하게 누일 곳 없다는 비애,
그리고 피곤함과 경계심, 부끄러움 속에 자괴감 같은
복잡한 감정들의 파도 속에 몸을 내맡기는 일이오.

거기에 더하여 '돌아갈 곳 없다'라는 절망감까지 합세하면,
비로소 쓰러질 듯 비참한 완벽한 노숙의 밤이 완성되는 것이오.



그 어둡고 축축한 구렁텅이 속에서,
'아아, 나도 저들처럼 집을 구해야지'하면 정착민인 것이오.

그렇지않고, '아아, 이 세상 어느 곳 나의 집 아닌 곳이 없구나.
오늘의 샹들리에는 오리온 자리로 해야지.'
라는 식이면 진정한 유목민인 것이오.

무엇이 옳다, 그르다 혹은 좋다, 나쁘다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정착민이 유목민이 되기는 한 순간이지만,
유목민이 정착민이 되기는 삼 대가 지나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오.



그러니 그대, 봄이면 봄꽃같은 아지랑이 너머 신기루가 보이고,
여름이면 무지개 끝 닿아있는 수평선 너머로 눈길이 가며,
가을에는 먼 하늘 바람의 냄새에 코끝이 시려오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세상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보고픈 그대,

망설임을 접고 한 번 즘 죽지 않을만 한 곳에서 노숙을 해 보시오.

대자연이 얼마나 화려하고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지,
가이아가 얼마나 자상하고 상냥하게 보살펴주는지,
나 자신은 또 얼마나 강인하고도 부드러운지,
그 속에서 분명 깨달음이 오는 날이 있을 테요.

그러니 그대, 지금 당장이라도 좋으니 길을 떠나도록 하시오.

망설이는 사이에도 한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있으니,
다 지나고 나서 이럴려고 했는데, 저럴려고 햇는데 해봤자,
그 때 가서는 그저 망령난 노인의 한숨밖에 아무것도 아니오.

그러니 그대, 길을 떠나시오.

그리고 떠날 때,
집은 내게 주시오.
명의이전은 하지 않아도 좋소.



Posted by 빈꿈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블루제리 2010.03.08 15: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광주에 사시는 군요~~

    • 빈꿈 2010.03.08 15: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어쩌다 그렇게 됐네요 ^^;
      혹시 광주 사시면 심심한 날 밥이라도~

      근데 블루제리님 블로그를 가보니,
      '열 수 없다'라는 에러메시지 뜨면서
      빈 페이지로 넘어가버리네요...;;;

  2. 페니웨이™ 2010.03.08 1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도 아침,밤으론 쌀쌀한데 그 와중에 노숙을 하시다니;;;;

  3. 산다는건 2010.03.08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컥 고생하셨을 듯.....저는 군대 가기 전에 친구녀석하고 에버랜드 갔다가 기차 끊겨서 서울역에서 노숙했다죠...ㅡ.ㅡ;;

  4. ytzsche 2010.03.08 23: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빈꿈님 정말..멋진 서막..!!!^^

  5. 2010.03.09 0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학생때는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까 했는데 20대 중후반부터는 얼굴이 두꺼워지더군요.

    용산역에서도 첫기차 탄다고 기다리다 지쳐서 의자서도 쭈구려 자고, 근처 천변에서 운동하다가 지치면 벤치에서도 퍼질러 잡니다. ㅡ.ㅡ

  6. 2010.03.10 15: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민트초코 2010.03.10 15: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와~ 너무 재미있네요^^ 정말 기발하시고 짱입니다!!!
    삼년이~~ 저인가요?? ㅋㅋ
    저는 딸이 없습니다!!! 맘껏 소개해주세요~~^^

    저도 이런거 그려보고 싶다는.... 대단하세요~ㅠㅠ

  8. 빅마우스 2010.03.10 15: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빈꿈님!!!!
    작품하나 나왔군요~
    너무 재미있어요!
    서막부터 가슴을 쿵쾅쿵쾅 울리는데요?^^
    다음이 궁금해지옵니다~!!^^

    앗.. 근데 노숙을?... 대..대...대단하십니다...
    그래서 그리 피곤해 하셨군요~ㅜ

  9. 처음처럼γ 2010.03.10 15: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역시 기다렸던만큼 빈꿈님의 카툰 대박입니다.
    밑에 붙혀주신 설명도... ㅎ

    10살 딸에서 빵터져 사무실에서 완전크게 웃었다는...

    다음편도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