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後苑)은 글자 그대로 궁궐 뒤쪽에 있는 동산 혹은 정원이다. 왕의 동산이라는 뜻으로 금원(禁苑)이라 불리기도 했다. 비원이라는 이름으로도 자주 쓰이기도 하는데, 이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민족말살정책으로 궁궐 이름을 잊게 만들기 위해 사용한 이름이다.
비원(秘苑)은 일제가 설치했던 창덕궁 후원의 관리소 이름이었는데, 창덕궁의 이름을 잊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널리 사용하도록 퍼뜨린 이름이다. 아직도 포털사이트에서 창덕궁을 쳐도 추천 검색어로 비원이 많이 나오고, 비원이라는 검색어로 검색을 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비원이 '비밀의 화원' 줄임말이라며 더 좋다고도 하는데, 비원은 명백히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악용된 이름이다. 그러니 창덕궁과 창덕궁 후원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지키는 것이다.
국가브랜드위원회 이배용 위원장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자존심은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며, 미래의 대한민국 정체성을 위해서, 그리고 '얼 빠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얼과 본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했다.
굳이 거창한 이유나 애국심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비원'이라는 단어는 바로 고쳐서 알고 있도록 하자. 세계 속의 자랑스런 우리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비원이라는 단어를 쓴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 창덕궁 후원으로 가는 길. 숲이 우거져 있어 마치 수목원에 온 듯 한 느낌이다.
창덕궁 후원
창덕궁은 휴일만 제외하면 아무 때나 입장료만 내면 들어갈 수 있지만, 창덕궁 후원은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후원은 10시부터 매 시간마다 한 번 정도 있는 특별관람 시간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 때도 안내원과 함께 안내에 따라 움직여야 관람할 수 있다. 후원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창덕궁 입장권과 별도로 또 후원 관람권을 구입해야 한다.
그래서 후원은 자주 들어갈 수도 없고, 비용도 많이 드는 곳이다. 그래도 문화재 보존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투정을 하지는 말자. 외국인의 경우는 외국어 해설 안내가 더욱 드물다. 오히려 외국인이 그런 조치에 대해 투정을 부리면, 우리 문화 유산의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잘 설명하도록 하자.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하니까.
▲ 부용지 일대의 모습.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규장각이 있던 곳이고, 오른쪽이 영화당이다.
과거시험이 펼쳐졌던 부용지 일대
후원 관람은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 북동쪽 외곽에 있는 함양문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울창한 숲길로 이루어진 언덕을 넘어가면 부용지라는 연못을 볼 수 있다.
부용지는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사상으로 만들어진 연못으로, 네모난 연못 안에 하늘을 상징하는 동그란 작은 섬이 놓여져 있다. 이 섬은 물을 썩지 않게 하는 과학적인 기능도 있다고 한다.
부용지 옆쪽에는 영화당이 있는데, 영화당 앞마당은 춘당대라 부른다. 춘당대는 옛날 과거험장으로 쓰였는데, 여기서 최종 합격한 사람을 영화당에서 축하해 주었다 한다. 그렇게 합격한 사람은 부용지 바로 옆에 보이는 높은 건물인 주합루의 규장각을 이용할 자격이 주어졌다.
규장각은 책을 모아놓은 일종의 도서관으로, 이중 일부를 외부로 옮겨놓은 것이 바로 강화도의 외규장각이었다. 외규장각 서적들은 옛날 서양인들의 노략질로 유출되었다가, 최근에 프랑스에서 임대 형태로 일부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아마 다들 잘 알 테다.
부용지 한쪽 구석에는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이 물고기는 '어수(魚水)'의 물고기를 뜻하는데, 이 말은 '왕과 신하가 물과 물고기처럼 서로 긴밀히 의기투합한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 마리 작은 물고기였던 백성이, 과거시험을 통해 뽑혀 왕이라는 물을 만나, 규장각 앞의 어수문(魚水門)을 통해 하늘로 날아간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마도 왕과 함께 신하들이 조화롭게 화합해서 온 사방, 만 백성에게 선정을 배풀자는 의미로 이런 장치들을 해 놓은 게 아닌가 싶다.
▲ 부용지 한쪽 구석에 조각되어 있는 물고기.
▲ 주합루. 규장각이 있던 곳.
▲ 규장각으로 올라가는 문에 어수문이라고 쓰여져 있다. 이곳에는 취병(翠屛)이라 불리는 담장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생울타리로 된 담장으로, 속에 키 작은 나무나 덩굴식물을 심어 자라게 해 놓은 담장이다. 담장 하나도 이렇게 자연을 이용해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영화당 내부.
▲ 연경당으로 통하는 불로문. 통돌을 깎아 만든 문으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연경당과 애련지
부용지 춘당대 앞으로 이어진 길을 계속 걸어나가면 사대부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그들의 양식으로 지은 연경당이 나온다. 사대부들의 집을 본따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100칸이 넘는다고 한다. 어쨌든 궁궐 안에 이런 사대부 양식의 민가 형식의 집을 지었다는 것은, 왕이 그들과 소통을 하고자 했다는 의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연경당 너머로 넘어가면 애련지라는 연못이 나온다. 연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이 연못에는 애련정이라는 정자가 새워져 있다. 연꽃은 더러운 물에 있으면서도 그곳에 물들지 않고, 향기를 널리 퍼뜨리는 지조가 굳은 군자의 덕을 닮았다 해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 애련지와 애련정.
▲ 어쩌면 그 옛날 왕자들도 궁궐 내부를 거닐다가 이런 열매를 하나씩 따 먹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부채꼴 모양으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관람정.
왕자의 공부방, 폄우사
연경당 다음으로 나오는 곳은 존덕정과 폄우사다. 존덕정은 육각정자 형태로 겹지붕의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쪽에는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는 독특한 모양의 정자인 관람정도 있다.
폄우사 앞쪽에는 디딤돌이 특이한 모양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이 돌은 왕자들이 팔자걸음을 연습하던 곳이라 한다. 촐싹거리지 말고 여유롭게 위풍당당하게 걸으라는 뜻으로 놓여진 돌들이다. 이곳에서 뒷짐을 지고 팔자걸음을 걷는 왕자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나즈막이 웃음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렇게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다달은 곳은 폄우사다. 폄우사(砭愚榭)는 '어리석은 마음에 돌침을 박는다'라는 뜻으로, 마음의 깨우침을 얻으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그 이름에 걸맞게 이곳은 왕자들의 독서실로 이용된 곳이라 한다.
▲ 폄우사 앞에 놓인 팔자걸음 연습용 돌.
▲ 폄우사.
▲ 소요암과 옥류천
궁궐 정원에 논이 있었던 이유는?
폄우사를 벗어나면 다시 울창한 숲길이 펼쳐진다. 과연 이곳이 궁궐 안이 맞나 의심이 갈 정도로, 길은 마치 산길과 같이 되어 있다. 창덕궁 전체가 이런 형태다. 언뜻 보면 체계가 없이 되는데로 여기저기 건물이 지어진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자연경관을 훼손하지 않고, 그 속에 어울릴 만 한 곳을 찾아 적재적소에 건물을 세웠기에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이 궁궐 안을 네모 반듯하게 정비하고, 땅을 편평하게 고르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걸 못 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창덕궁이 이런 형태로 지어지고, 계속 보존되어 온 것은, 그만큼 우리 조상들은 자연과의 어울림을 중요시 하고, 자연을 존중했다는 의미다. 자연 그대로를 좋아하는 마음이, 창덕궁 후원에 호랑이가 심심찮게 출몰했을 정도라 하니, 참 대단하다 싶다.
정원이라기보다는 산길이라 할 수 있는 울창한 숲길을 걸어 몇 개의 정자들을 만나며 가다보면, 궁궐 북쪽 끄트머리에서 옥류천을 만날 수 있다. 옥류천은 사실 작고 보잘것 없는 개울인데, 큰 바위를 깎아 둥근 홈을 만들어, 물이 바위 둘레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말이 폭포지, 막상 가보면 개울물이 그리 높지도 않은 바위 위에서 조르르 떨어지는 것 뿐이다.
하지만 옛 임금들은 이곳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폭포를 보고, 세상을 보고, 우주를 보았다. 개울 속에 뜬 달을 보며 마음 속에 온 백성을 품으며, 그들을 아우르는 정치를 하고자 다짐을 했다.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옥류천 옆쪽에 마련된 작은 논이다. 세계 어느 궁궐이나 궁전 뒤뜰에 이런 공간이 있을까.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논에서 왕과 왕자들이 함께 직접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논 옆에는 초가지붕을 얹은 정자가 있는데, 이 지붕 역시 왕이 직접 엮어 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소통이다. 굳이 직접 말을 주고 받고 떠들지 않아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이심전심 마음으로 통하는 소통 말이다. 이것으로 임금은 배려와 나눔의 정신을 가질 수 있고, 더 나아가 화합과 통합을 이루는 올바른 지도자로써의 자격을 가질 수 있었을 테다.
창덕궁 후원의 이 작은 논은, 지도자로써 주어진 자리를 유지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창덕궁 전체와 이 논을 놓고 본다면, 임금의 존재와 정치는 자연과 백성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고, 오랫동안 유지해 온 우리의 궁궐 문화다.
서양처럼 돌로 단단하게 지어진 궁궐이 아니다. 가까운 이웃나라들처럼 인위적으로 크게, 혹은 작게 인위적으로 만들어 가꾸어 놓은 정원도 아니다. 우리의 궁궐은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그 분위기와 모습이 완전히 바뀌는 변화의 유연함을 가지고 있어, 계절마다 다시 찾아도 새롭게 보이는 곳이다.
게다가 건물의 용도 또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바뀌는 유연함. 그리고 신하들과의 의사소통은 물론, 새로운 인재들과의 교류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짜여진 치밀함. 또 사대부 민가를 체험할 수 있게 해 놓고, 심지어 농민들의 노고까지 직접 겪어볼 수 있게끔 해 놓은, 그 소통과 배려의 공간. 그러면서도 지도자로써의 품격을 갖추기 위해 곳곳에 설치해 놓은 공부와 수양과 사색의 공간들.
그속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붕이 무슨 양식이고 건물이 몇 칸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어떤 정신이 담겨 있고 어떤 뜻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의 법고창신(法古創新) 정신으로, 지금 현재에 그 배움을 사용해서 미래를 열어가는데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렇게 궁궐을 한바퀴 돌며 사색하며 배운 것을 통해, 어떤 지도자가 되어야 하며, 어떤 지도자를 선택해야 할 것인지를 깨달을 수도 있을 테다. 아무쪼록 새로운 시대에는 옛 우리 궁궐의 정신을 본받아, 소통과 화합, 배려와 나눔의 정신, 더 나아가 인류를 지향하는 아름다운 문화가 꽃피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옥류천 근처, 왕과 왕자가 벼농사를 지었던 작은 논.
▲ 돌아나가며 다시 찾은 애련지.
▲ 효명세자가 지어서 독서도 하고 나라 일도 생각하고 했던 의두합. 단청도 칠하지 않은 소박함에서 그의 진심이 보이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