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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서울 284, 시간여행자의 시계 - 공간과 잘 어우러진 인상적인 전시전시 공연 2017. 5. 23. 21:58
'문화역서울 284'는 '구 서울역사'를 복원해서 전시, 공연 등 문화예술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공간이다. 284가 옛 서울역의 사적번호라는 것은 몰라도 별 상관 없고.
어쨌든 서울역 앞에 있는 문화역서울 284에서 '서울로 7017' 개통에 발맞춰 새로운 전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제목은 '시간여행자의 시계(The clock of time traveler)'.
'시간'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예술가들의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고, 주제에 맞는 공연도 열린다. 또한 전시기간 중 영화 상영 일정도 나와 있는데, 이것도 시간여행이라는 주제에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예를 들면, '백 투더 퓨처' 원투쓰리를 상영하는 식으로 말이다.
문화역서울 284
본 전시를 보러 들어가기 전, 문화역서울 284 앞마당부터 이미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슈즈트리. 서울로 7017 개통과 함께 상징적인 조형물을 만든 것인데, 논란은 있지만 어쨌든 사람들의 이목은 확실히 끈다.
완성된 모습을 보니 신발 위에 식물도 있고, 신발 터널에는 신발끈을 늘어뜨려서 마치 정글을 연상하게 해놨다. 슈즈트리는 문화역서울284 전시를 보러가는 김에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기서는 핵심이 아니므로 더 언급하지 않겠다. 어쨌든 이 슈즈트리는 5월 28일까지만 전시된다고 하니, 보려면 서두르는게 좋다.
다시 '문화역서울 284'로 돌아가서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해보자. 일단 입구 앞부터 작품으로 꾸며놨다. 뭔가 참 오묘하기는 한데... 셀카 찍는 사람들에게는 인기 좋더라.
시간여행자의 시계
입구 안으로 딱 들어가면 로비 공간부터 전시물들이 놓여 있다. 아크릴 같은 걸로 식물을 비롯한 여러가지 형태들을 만들어놨는데, 주위 조명과 어우러져 예쁘고 아련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사진으로 보기엔 그냥 플라스틱 판떼기 같지만, 실제로 보면 꽤 예쁘다.
이쯤에서 어떤 노인 일행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옛날 서울역 보러 들어왔는데 이건 뭐 이상한 것들만 늘어놓고... 표 끊는데는 어디였던 거여". 그러면서 연신 전시실 내부를 두리번두리번.
이것 또한 '시간 여행'의 장치 중 하나인 것인가. 혹시 일부러 퍼포먼서를 배치해서 마치 NPC 처럼 활용하는 것인가(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시간여행스러운 사건들이 은근히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재미도 느껴볼 수 있다.
로비를 돌고나면 여기저기 전시실로 이동하며 작품들을 감상하면 된다. 사실 현대미술은 감상이라는 거창한 단어로 관객들을 압박해서 더더욱 어렵다는 반응을 유도해내는 건지도 모른다. 감상은 무슨, 그냥 구경하면 된다. 해석따위는 걔네들 노는 물에서 지지고 볶고 하라고 맡겨두고, 관람객은 그냥 슬렁슬렁 구경하다가 내 눈에 딱 들어오는 것에 집중해서 한 번 파고들어 보든지 하면 된다.
'시간여행자의 시계'라는 전시는 크게 세 파트로 구분해놨다. '과거: 긍정시계', '미래: 지향 시계', '현재: 쾌락 시계'. 이렇게 과거, 미래, 현재로 분류해서 작품을 전시해놨는데, 그냥 보다보면 뭐가뭔지 모르겠고, 이게 과거인지 미래인지 알게뭐야.
관람객들도 세상 모든 것을 분석해서 이해하고, '나는 안다'라는 허세를 부릴 수 있어야만 한다는 태도를 버리면 이런 예술품 관람이 한층 즐거워진다. 세상은 넓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많으며, 딱히 이해 안 해도 사는데 아무 문제 없는 것들도 많다.
고양이를 본다고 고양이의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듯, 현대미술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비우자. 비우다보면 어느덧 산으로 향하게 될 위험은 있다.
여하튼 작품들이 여기저기에 놓여져 있는데, 문화역서울284의 공간적 특징상 조그만 방 하나하나가 전시실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마치 작품을 위해 방 하나하나를 만든 듯 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떤 공간은 작품과 방이 너무 잘 어울려서 원래부터 여기엔 이것이 있었던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문화역서울 284'에서 전시를 관람할 때는 전시물과 함께 '구 서울역' 실내 공간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는 것이다. 즉, 전시물과 함께 전시공간 자체도 관람할 기회다.
애초에 유물 몇 개 갖다놓고 박물관으로 활용해도 됐을 공간이지만, 이렇게 전시관으로 활용하니 공간이 좀 더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전시물과 함께 건물도 구경하는 일석이조 효과가 있다.
한참 관람을 하면서 이 방 저 방 전시실을 옮겨다니고 있는데, 한 노인이 복도에서 멍하니 꼼짝도 안 하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마침 방금 본 전시물에서 동남아를 배경으로 한 영상이 나왔던 듯 했고, 노인의 복장도 정글 탐험용 의복 비슷해서 무슨 퍼포먼스인가 했다.
그런데 갑자기 움찔!하고 ON 스위치가 켜진 듯 몸을 떨더니 복도를 걸어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아직도 이것이 게릴라 퍼포먼스인지 그냥 관람객이었는지 의문이다. 어쩌면 유령이었을지도.
그걸 겪고난 후에 '다니엘 피르망'의 정교한 인체 모형 작품을 보게 됐는데, 혹시나 이것도 진짜 사람이 벽에 기대고 있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사람이 지나가면 갑자기 뒤 돌아서 놀래키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고, 뒤를 돌면 피칠갑을 한 월하의 공동묘지 귀신 분장을 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정말 사람과 똑같은 모양새여서 그런 상상을 해봤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을 연장해서 작품 해석을 해보자면, 이 인체모형은 뭔가 일어날 듯 하면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흐르지만 침잠해 있는 시간의 메타포로... 그만하자, 재미없다.
이렇게 전시물 자체가 공간에 너무 잘 어울려서 마치 애초부터 이곳의 장식물이 아니었던가 싶은 것들이 있다. 아이들 데리고 와서 옛날에는 건물을 이런 것들로 장식을 했단다하면 그대로 믿을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니 재밌겠는 걸.
이건 전시물인지 원래 이런 공간이었던 건지 헷갈릴 정도. 대자로써의 자아가 한계를 느끼고 좌절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옆으로 지나가면 되므로 한계를 타파하여 무한성을 얻게 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냥 텍스트 너무 없어서 썰렁할까봐 넣어봤다.
자전거에 올라타서 페달을 저어보라는데 싫다. 작품의 프레임을 벗어나야 진정한 초월자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으므로, 아이스크림을 먹고싶다.
전시공간 중 한 곳에선 해시계를 만들어봅시다 코너도 있었다. 종이로 된 해시계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코너. 이때 너무 피곤해서 참여하지 못 했던 게 아직도 아쉽다. 조만간 다시 한 번 가서, 아주 창의적인 해시계를 만들어보겠다.
타임 이즈 킬러. 스모킹 킬 유. 따라서 스모킹 이즈 타임. 잇츠 타임.
너무 길어져서 사진을 많이 추려냈는데, 공간 자체도 아름다운 곳이 많다. 전시물들과 어울려서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예전에 이곳을 가봤던 사람들도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을 테다.
전시실이 작은 방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중간에 동선이 좀 헝클어진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동선따위 꼭 효율적일 필요 없다, 봤던 것 또 보고 지나가면 되지.
큰 동선을 따라 관람을 이어나가면 어느새 밖으로 나가게 돼 있다. 이제 끝인가 싶을때 마지막 작품이 남아있다. '올리비에 랏시'라는 작가의 작품인데, 이건 정말 감동이다. 막판에 반전이랄까.
커튼을 열어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웅웅 소리와 함께 디스플래이에서 사각형 모양이 끊임없이 나온다. 마치 타임머쉰을 탄 듯 한 느낌이기도 하고, 매트릭스를 끝낼 수 있는 방에 들어온 듯 한 느낌기도 하다. 그냥 이런 장치들만 있었다면 그리 큰 느낌이 없었을 수도 있는데, 이것도 공간과 잘 어우러져서 아주 인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정말 추천하고픈 공간인데,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겠다. 뇌전증 같은 게 있거나, 평소에 세뇌가 잘 되는 사람 같은 경우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확 들어가기 전에 커튼을 살짝 열어서 일단 간을 보도록 하자.
최소한 내게는 아주 감동적이었던 RTO 공간의 전시물. 나중에 돈 벌어서 집 생기면 저런 것 하나 설치해놔야지.
이제 완전히 나가는 길. 이곳에 있는 공방과 카페 모두가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병이 있어서 밖에서 아무데나 들어갈 수가 없다. 돈 쓰는 죽는 병인 가난병.
어쨌든 이렇게 관람을 마쳤다. 한 마디로 이번 구서울역 전시는 아주 추천한다.
여러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기 때문에 취향에 맞는 작품 하나 정도는 건질 수 있을 확률이 높고, 작품과 공간의 어우러짐이 절묘하기 때문에 그걸 보는 재미도 있다. 현대미술에 관심이 없더라도 구 서울역 실내 공간을 구경한다는 의미로 가도 괜찮기 때문에, 이래저래 볼 만 하다. 나는 두 번 세 번이 아니라, 시간 날 때마다 가보고 싶을 정도였다.
'시간여행자의 시계' 전시는 7월 23일까지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린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 공연과 영화 상영 시간은 미리 홈페이지에서 알아볼 수 있다.
p.s. 사족
아직 시간을 중력으로 이해하고 표현한 작품이 없다는 게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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