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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천의 숨결을 느끼는, 강원도 화천 산소길
    국내여행/강원도 2010. 4. 30. 18:38

    강원도 화천하면 군부대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나마도 요즘은 산천어 축제가 큰 호응을 얻어서, 그런 축제가 있나보다 할 뿐이었다.
    군부대와 물고기 축제 말고는 전혀 아는 것 없는 그 곳.
    게다가 강원도라는 지명만으로 쉬이 산만 겹겹이 있을 거라는 쉬운 선입관.

    내 머릿속에 그런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화천을 찾아갔다.



    화천을 들어서자마자 간 곳은 '산소길'이라는 곳이었다.
    처음에 산소길이라 하길래, '국군 공동묘지를 찾아가는건가'했다.
    떠오르는 건 그런 것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가 본 '산소길'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강따라 산따라 신선한 자연의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길이라해서 산소길이라 한다.



    산소길은 일 년에 한 번 있는 산천어 축제를 한계를 벗어나,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게 하기 위해 만든 길이다.

    제주도 올레길을 벤치마킹해서 만들었다는 이 길은,
    길이가 100리(약 40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길이다.

    그 중 '간동면 구만리 살랑골'과 '하남면 위라리'로 이어지는 
    약 2킬로미터 구간은, 산소길 구간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그 길 들머리에 '미륵바위'라는 이름으로 자연석 다섯 개가 서 있었다.
    옛날 한 가난한 선비가 매일 이 바위에 극진한 정성을 쏟았는데,
    그가 과거보러 가는 길에 초립동이 나타나 여러가지 도움을 주어
    장원급제 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다.

    여기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 하길래 나도 소원을 빌었다.
    내가 나중에 부산시장이 못 되면 이 바위는 효험이 떨어진 걸로 보면 되겠다.




    미륵바위 바로 옆에는 커다란 삶의 시계가 서 있었다.
    저 큰 시계가 움직이는 건가, 안 움직이는 건가 잠시 논란이 있었지만,
    어쨌든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라고 결론내렸다. 이곳은 화천이니까.



    삶의 시계가 멈춘다면 그것이 바로 죽음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내 삶의 시계는 자주 멈추니까.
    어느 햇살 나른한 사무실에서 게으르게 움직이는 빵 굽는 키보드.
    충혈된 눈으로 지켜보는 모니터 앞에서 느끼는 밥벌의 지겨움.
    물리적 시계는 돌아가지만 내 삶의 시계는 그 때 정지된다.

    살아있음을 느끼지도 못하지만, 죽은 상태도 아닐 때,
    그 때 내 삶의 시계는 '이리도 허망하게' 멈추어 버림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라며 별 것 아니라 말 하지만,
    누군가의 온탕은 누군가에게 지옥불일 수 있음을,
    하소연 할 곳도 없는 그 갑갑함을 짊어지고 또 한 발 옮기는 내 모습을,
    그리도 허망하게 멈추어버린 '수레바퀴 아래서' 무기력한 내 모습을,
    먼 발치에서 타인의 시선으로 보게 될 때 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의 시계는 죽은 후에도 돌아가지만,
    누군가의 시계는 살아 있을 때도 멈추어 있다는 것을.




    죽음처럼 고요한 강줄기 옆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흙길이 펼쳐져 있었다.
    내 잠을 깨워주는 건 오직 바람 뿐.
    일행은 이미 앞서가거나 뒤에 있었고, 나는 혼자 길을 걸었다.
    봄볕도 내려쬐고, 옷깃도 다시 여며보지만, 바람이 차다.


    딱히 바람을 막아주는 것도 없이 너르게 뻗은 길을 걷다보니 다리가 나왔다.
    정식명칭은 '폰툰다리'이지만, 사람들은 퉁퉁다리, 통통다리 등으로 불렀다.

    길이가 1킬로미터 조금 넘는 이 다리는,
    '폰툰'이라는 물에 강한 목재를 사용해 만든 다리다.
    강바닥에 기둥을 박은 것이 아니라 강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부교.
    그렇다고 발걸음 옮길 때마다 흔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크게 한 번 뛰어보면 약간 흔들림을 느낄 수 있을 정도.






    폰툰다리를 건너면 강변 벼랑 아래로 또 길이 나 있다.
    이쪽길은 다리가 아니라 강바닥에 기둥을 박아 만든 '길'이란다.
    하지만 느낌은 강 위의 다리를 걷는 느낌.
    한 쪽으로는 길게 뻗은 북한강을 바라보고,
    또 다른 쪽으로는 오랜 세월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벼랑을 바라본다.

    용화산 산자락 벼랑 쪽으로는 많은 꽃과 나무들이 있었지만,
    아직 이곳은 봄이 찾아오지 않았는지 다들 움츠린 모습이었다.
    다른 계절에 왔더라면 좀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싶다.






    강원도 화천에 산소길이 정식으로 개장된 건 2009년 10월이다.
    만든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곳이라 시설들이 모두 깨끗하다.
    물론 시설이라해봐야 다리와 길이 전부지만,
    밟고 있는 나무바닥의 아직 덜 마른 신나냄새도 맡을 수 있을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길은 아직 인간미가 부족하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좀 더 많은 발길이 닿아서,
    닳고 또 닳고 사람의 체취와 세월의 흔적으로 다듬어져야 비로소,
    시설물이 아닌 진정한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최대한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방침으로 만들었다는 산소길.
    이 길 중간에는 사람들이 마실 수 있는 물이 나오는 곳도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세심한 배려다.
    이런 것을 생각 할 정도라면 앞으로 다듬어 나가는 것도 기대해 볼 만 하겠다.
    만드는 건 순식간이지만, 다듬는 건 오랜 세월이 필요하니까.






    길 중간에 새로운 사상사조를 홍보하는 푯말이 붙어있었다.
    추락주의(fallism).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이은 새로운 사조.
    기존의 그 어떤 체제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 인류의 탄식.
    문명이 진보하고, 기술이 발전하고, 생활이 편해져도,
    인류의 행복은 그 외의 어떤 것에 있지 않나라는 의심의 폭발.
    모두 다 함께 잘 살자라는 표어가 헛소리임을 깨닫고야 만 시민들의 절망.
    결국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이 전부인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의 신념.
    한없이 떨어지다보면 또다른 길이 나오리라는 한 줄기 희망.
    21세기 전세계 인류 사이에 은근히 퍼져나가고 있는 생각의 흐름,
    추락주의 fallism.

    당신도 한 번 동참해 보심이 어떨런지, 물론
    과도한 심취는 극도의 우울증을 가져올 수 있다는 부작용도 있다.






    산소길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길만 계속된다면 참 지겨웠을테다.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는지, 길은 자연스러운 흙길로 이어졌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름한 산길로 되어 있었으면 했지만,
    그럴려면 또 산허리를 잘라 길을 만들어야했겠지.

    그래서 일단 이 산소길은 잘 만들어 놓았다고 말 해 주고 싶다.
    인공적인 길이 사람들의 운치는 조금 떨어뜨릴지는 몰라도,
    최대한 자연에 피해는 주지 않게 해 놓았으니까.
    자연을 느끼기 위해 그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
    요즘 흔하게 이루어지는 관광자원개발의 탈을 쓰고 행해지는 그 폭력.
    그걸 최대한 피해갔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산소길의 백미라 자랑하는 구간 2 킬로미터의 끝에는 위라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마을 외곽 강변에는 황포돛대 나룻배가 있었는데,
    전시용으로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실제로 운행하는 배라 한다.
    자세히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쪽배축제 때만 운행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위라리라는 전형적인 한국 농촌마을로 접어들면서
    짧은 산소길 탐방은 끝났다.
    이 길을 걷다보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꽤 많았는데,
    산소길 전체 길을 자전거로 달려 보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나는 근처의 대이리 민박마을에 하룻밤 묵으면서,
    이 조용한 강줄기에는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별을 먹고 자라나
    한 번 세어보고 싶다.

    눈이 휘둥그레지며 크게 놀랄만큼 볼 만 한 그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길따라 아기자기하게 이것저것 다양한 꾸밈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마치 강원도 산들의 무뚝뚝한 버팀처럼,
    북한강의 무심한 발길처럼 잠시 머물 수 있는 바람의 냄새가,
    그 곳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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