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는 동인천역에서 중앙시장 방향(4번 출구)으로 300미터 정도 걸어가면 볼 수 있다. 동인천역 앞쪽 일대를 배다리골이라 부르는데, 옛날에는 이곳에 큰 개울이 있어 바닷물과 배가 드나들었다 한다. 그 당시 배를 대는 다리가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배다리’다. 물론 지금은 이름만 남고 형체는 사라져버린 옛날 이야기다.
배다리 헌책방거리(고서적거리)에는 현재 약 십여 개 헌책방이 남아있다. 한때는 수십 개의 헌책방들이 쭉 늘어서 있었던 길목에 이제는 문구도매상점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마저도 평일에는 문을 닫아놓은 곳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먼지처럼 내려앉은 세월의 무게를 말 해 주듯, 헌책방 안쪽에는 빛 바랜 책들이 묵직하니 쌓여 있었다. 이미 많이 낡아 버려 원래의 색깔조차 가늠할 수 없는 간판들이, 그들이 버텨온 시간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거리를 걷던 중, 다른 곳과는 다르게 생긴지 얼마 안 된 듯한 가게가 하나 보였다. 호기심에 일단 그 가게부터 들어가 봤다.
▲ 헌책방거리에 배달 온 차량을 들여다보니, 책이 그리 많이 유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헌책방의 특성상 새 책 구입이 일반 서점보다는 적겠지만.
▲ 헌책방이라기보다는 북카페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나비날다'. 가게 안 책상 위에는 새끼 고양이가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 새끼 고양이 사진을 찍자, 어디선가 슬그머니 나타나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고양이.
나비 날다-나눔과 비움, 오래된 책집에 날아들다
‘나비날다’라는 작은 책방은 요즘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북카페 같은 느낌이었다. 주인장 권은숙 씨 역시 이 공간은 책방이면서도 찻집이고 쉼터라고 했으니, 간단히 북카페로 소개해도 될 듯 하다.
하지만 이곳은 단순한 북카페 이상의 문화공간이다. 영화모임이나 시 낭송회 등의 각종 모임이 펼쳐지기도 하고, 이 일대 배다리 주민들이 모이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곳은 근처에 산업도로가 뚫리는 것을 막기 위한 모임의 장소가 되기도 하는데, 주인장은 산업도로가 놓이면 마을이 두 동강 나서 한쪽이 사라지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배다리 역사 알리기 등을 통해 계속 이 지역을 보존해 나가려 노력하고 있다 한다.
‘나비날다’는 책을 팔기만 하는 헌책방이 아니다. 쉴 겸 해서 들어와 보고 갈 수도 있고, 안면을 트면 빌려갈 수도 있다. 특히 시집은 두고두고 볼 책이기 때문에 팔지 않는다는 말에서, 상업적 이윤추구만을 목적으로 한 곳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헌책은 헌책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는 주인장. 줄이 그어졌거나 메모가 되어 있는 헌책들은, 그 책을 어떻게 읽었나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 한다. 그래서 이미 많이 죽어버린 상권이고 찾는 사람도 많이 줄었지만, 그런 책들을 고이 간직하고 싶다며, 모든 책은 헌책이라는 말을 남겼다.
▲ '나비날다'는 이 일대의 일반적인 헌책방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가게 내부는 주민들과 함께 꾸몄다는데,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 보면 그림 하나가 그려져 있기도 한다고.
▲ 배다리 옛 양조장 건물은 '스페이스 빔'이라는 예술창작집단이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배다리 일대에서 공공미술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문 앞의 양철로봇이 인상적이다.
▲ 배다리 헌책방거리 일대를 둘러보다 만난 두 학생은, 졸업작품으로 배다리를 꾸며 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산업도로 건설을 막아서 동네가 두 동강 나는걸 면하긴 했지만, 아직 살리는 단계까지 가지는 못 한 것 같다며, 배다리에 컨텐츠를 제공하고 싶다 했다. 이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 배다리는 더욱 아름다워 질 테다.
집현전, 가장 오래된 헌책방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책방으로 손꼽히는 집현전을 찾아가 봤다. 이 가게 주인인 오태운 옹은 대략 1950년도부터 책 장사를 해왔다 한다.
그 당시엔 변변한 가게 없이 노점상을 했는데, 동대문에서 책을 매고 와서 팔았다 한다. 주로 팔았던 품목은 소설책과 참고서. 한창 장사가 잘 될 때는 학생들이 줄을 서서 책을 사고 팔았다고. 그렇게 힘들게 장사를 했지만, 책 경기는 그때가 더 나았다 한다.
그 옛날부터 장사를 했던 서점들이 지금은 전국적으로 절반 이상이 없어졌다. 무엇보다 요즘 학생들이 책을 안 보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자기집이 아니고는 가게세도 내기 힘든 실정이라 한다. 특히 요즘 헌책방거리는 대학생은 아예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중고생들이 참고서를 사가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가게 안쪽 깊숙한 곳에 앉아 한가한 길거리를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는 주인장. 여든이 넘은 주인장의 그 눈길에, 사라져가는 오래된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책방, 집현전.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서점 안에는 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 집현전 헌책방 내부 모습. 옛날처럼 다시 바빠졌으면 좋겠다는 주인장.
배다리 헌책방거리
전성기 때는 30~40여 개의 헌책방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던 배다리 헌책방거리. 이제는 8개 가게만 남아 옛 추억을 더듬고 있다.
‘나비날다’ 주인장의 말에 따르면, 집현전은 가장 오래된 서점이고, 아벨서점은 책을 열심히 가꾸기로 유명한 곳이며, 한미서점은 2대째 이어서 하고 있고, 삼성서적은 대체로 싸게 팔기로 이름난 곳이다. 가게마다 나름의 역사와 특징을 가지고 있는 헌책방들. 그래서 오는 사람은 꾸준히 발걸음을 한단다.
이미 상권이 죽어버려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았지만, 그래도 요즘 다시 배다리 이름이 다시 알려지기 시작해서, 찾아오는 사람이 조금씩 늘고 있는 추세라 한다. 학생들이 참고서를 구입하기 위해, 노인들이 추억을 찾기 위해, 혹은 가족단위로 구경하러 오는 등, 주말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하지만 이미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을 만큼 많아져 버린 책이고, 인터넷 서점 등으로 편하게 구할 수 있는 방법도 생겨버린 시장이다. 단지 추억과 한 순간의 구경거리로 찾아가는 것 만으로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 헌책방들. 이들은 앞으로 어떤 선택과 변화를 하게 될까.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어떤 길을 찾아 나갈지, 앞으로 배다리의 모습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