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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한국 자살률 통계를 보고 놀라워서 짧은 만화 하나를 그린 적이 있다. 대략 고등학교 한 반 정도의 인원이 매일매일 자살로 사라진다는 내용이다. 단순히 국가 공인 통계 수치를 각색했을 뿐이고, 그 내용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냥 그런 만화를 그렸다.
그 후에 그 컨텐츠를 쓰겠다며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그것까지는 별로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것들도, 오래된 것들이나 최근 것들 상관없이 이것저것 수시로 사용하겠다고 연락 오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컨텐츠 관련해서 연락오는 곳들은 좀 특이했다. 자살예방 혹은 자살방지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 단체 등에서 연락을 해 왔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곳에서 연락을 해왔다는 것 까지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내가 놀란 것은,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들도, 다른 사람들 처럼, 컨텐츠가 인상적이고 흥미롭고 자기들에게 정말 유용하고 도움이 되겠는데, 결론은 공짜로 이용하겠다는 거였다.
길다면 긴 시간동안 컨텐츠를 만들며 운영해오며 많은 사람들의 연락을 받았는데, 컨텐츠를 공짜로 이용하겠다는 사람들은 정말 많다. 여태까지 받을 걸 다 합치면 그냥 대강만 따져봐도 수백 건이다. 그 중에 대가를 지급하겠다고 밝히고 연락한 곳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물론 그렇게 연락해왔다고 해서 다 성사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흔한 일이어서 이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길 정도인데, 그래도 다른 곳들과 달리 그런 곳에서 그렇게 연락을 해왔다는 것이, 못내 긴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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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예방하겠다는 사람들이 누군가의 노력이 담긴 컨텐츠를 공짜로 이용하겠다고 당당히 연락해 온 것, 그건 내게 어떤 마지막 보루 같은 마음 한 구석의 사회에 대한 신뢰 같은 것을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뜨리는 사건이었다.
일단 이 사건들을 한 번 보자. 고인들에게 누가 될까봐 이름은 안 쓰려고 했는데, 주절주절 길게 글을 쓰는 것보다 그냥 언론 기사 제목들만을 나열하는 게 알아보기 좋을 듯 하다.
- 故 최고은 작가, 생활고 요절에 네티즌 “사회적 타살”
- 김운하, 한 연극배우의 안타까운 죽음..생활고 때문에
이미 관심있는 사람들은 다들 기억할 사건들이다. 더 왈가왈부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들은 사고사일 뿐 자살은 아니다. 그렇다면 끝으로 최근 한 사람의 사건을 하나 더 덧붙이자.
이 사건은 모르는 사람들도 좀 있을 텐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17년간 그림을 그려온 일러스트레이터가 생활고로 자살을 했다는 내용이다. 물론 주 원인이 생활고인지는 불확실하지만 평소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티스트, 생활고, 죽음. 이 사건들의 공통점이다. 어떤 죽음이었든간에, 결국 따지고 보면 사회적 타살이었다는 공통점도 끌어낼 수 있다. 특히 한 일러스트레이터의 죽음은 몇 개월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최소한 나보다는 훨씬 더 유명했던 그 사람은, 아마도 나보다도 많은 연락들을 받았을 테다.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분명히 그랬을 테다. 작품이 좋고, 유용하고, 사용하고 싶으니, 공짜로 쓰게 해 달라. 그런 연락들.
아마도 그 사람도 나처럼 너무 익숙해서 웬만한 곳들의 웬만한 연락들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고 그냥 보고 넘겼을 테다. 아마 그랬을 테지, 나 역시도 그냥 웬만한 곳들의 연락들만 받았더라면 계속 별다른 느낌 없었을 거고, 이런 글도 쓰지 않았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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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느낀 한국인들의 큰 특성 중 하나는 허영이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어딘가 여행을 떠났을 때면, "이런 데 나와서는 돈 아끼지 말고 써야 한다"며 여행지에서 돈 아끼려는 사람을 비난까지 하던 사람들. 자신의 기준으로 큰 금액을 내놓지 못 할 상황이라면 오히려 그냥 입 싹 닦고 안면몰수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듯 한 사람들.
아마도 그래서일 거다. "당신의 컨텐츠를 너무 쓰고 싶은데 내가 지금 가진 돈이 별로 없다. 이번 주 회식에서 내 몫으로 쓸 돈 2만 원과 내 밥값 아낀 돈 1만 원 합쳐서 3만 원이 내가 지금 줄 수 있는 최대치다. 이 금액으로 합의할 수 있겠는가" 이런 내용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다. 스스로 가난해보이고 구차해보이는 게 싫었던 걸까. 나 같으면 남의 노력과 노동을 맨 입에 공짜로 먹으려는 인간으로 기억되기보다는 가난한 인간으로 기억되는 게 좋을 듯 한데. 아니면 아예 남의 노동에 대가를 치뤄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못 하는 인간들이 그렇게 많았던 걸까. 모르겠다, 어쨌든 99%의 사람들은 공짜로 달라고 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만 원씩만 줬어도 최소한 지금까지 컨텐츠만으로도 몇 백 만원을 벌었을 테다. 나보다 더 유명했을 그 아티스트들이었다면 죽을 만큼의 생활고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결국, 공짜로 달라고 요구했던 그 인간들도 모조리 공범이다. 그리고 결국, 자살을 예방한다는 그 단체들도, 그냥 남의 죽음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일 뿐이었던 거다. 이 사실이 내겐 너무나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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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을 맴도는 할 말들이 많은데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이쯤 돼서 한 번 써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끄적여봤다. 이제 더 바라는 것도, 실망할 일도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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