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군 훈련을 갔다왔더니 그래도 피곤했나보다.
연일 계속되는 불면증 속에 어제는 세 시간이나 잤다.
자고 일어나서 스팸메일 체크를 했다.
내가 이상한 건지 세상이 이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정상적으로 온 메일들은 모두 광고 메일들이고
간혹 중요한 메일은 스팸메일함에 들어가 있다.
세상과 쓰레기통.
스팸 메일함엔 SETI@HOME에서 온 편지가 있었다.
새 버전이 나왔단다.
주저할 것 없이 가서 다운받고 설치했다.
여러 다른 프로젝트들을 지원할 수 있게끔 바뀐 것 같다.
괜히 바꿨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 컴퓨터 사양으론 세티 프로젝트밖엔 지원할 수 없다.
한때 세티 프로젝트에 열을 내어 참여한 적이 있었다.
학교 전산실 컴퓨터마다 모두 세티 프로그램을 깔아 놓았었다.
뭐 그리 대단한 영향을 미치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빨리
내 별에서 보내는 통신을 수신하고 싶다.
혹시 모른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을 위한 가이드 북'
이라는 영화에서처럼
은하연방행정국에서
'지구를 곧 철거할 계획이니 지구인들은 빨리 이전하기 바람'
이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지도.
곧 은하계 변두리 환경오염지역의 지구를 철거하러 올 지도.
비바람 몰아치는 밤 열 두시 삼 십분.
생각해보니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질 않았다.
먹지 않으면 배 고프지 않다.
먹으면 조만간 배가 고파진다.
딜레마지만,
배 고프지 않은 생명체는 곧 죽는다.
뭔가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
밤 열두시 삼십분에.
시체를 찾아 사막을 뒤지는 하이에나같은 기분이랄까.
편의점에서 만두와 맥주를 사려고 했다.
냉장고도 전자렌지도 후라이팬도 없다.
예전에 냉동만두를 냄비에 넣고 쪄 보려고 시도했다가
만두국을 만든 적이 있다.
그 이후론 편의점에서 전자렌지로 익히는 방법만 사용한다.
갑자기 생각이 바꼈다.
밖에서 보니 오늘 그 시간에 일하는 편의점 알바가 피곤한가보다.
늘 펴 놓던 책 위로 엎어져 있다.
괜히 깨우기 싫어서 발길을 돌렸다.
떡볶이집을 갔다.
다들 비 때문에 손님이 없어 문을 닫으려는 참이었다.
정리하고 문 닫는 와중에도
구석자리에서 다정하게 떡볶이를 먹고 있는 한 쌍의 연인들.
떡볶이 국물은 피바다처럼 쿨렁거렸고
김밥은 방금 죽은 짐승의 내장처럼 터져 있었다.
비 오는 날 떡볶이를 함께 먹으면 깨진다.
내가 지어낸 말이다.
떡볶이 이 천원 어치를 싸 달라고 했더니
떨이라며 남은 떡볶이를 다 퍼 주셨다.
거기다 튀김까지 얹어 줬다.
먹고 죽으란다.
앞으로 비 오는 날 밤에만 떡볶이 집을 가야겠다.
포도주와 함께 떡볶이를 먹었다.
튀김을 와인에 찍어 먹으니 제법 괜찮았다.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는 초컬릿 맛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사이다에 밥 말아 먹는 맛.
콜라에 회 찍어 먹는 맛.
우유에 살짝 데친 김치 볶음밥 맛.
짐작은 했지만 양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남기면 곤란하니 꾸역꾸역 먹었다.
날씨는 꿀꿀하고 내 입은 꾸역꾸역
꾸역꾸역 꿀꿀 꾸역꾸역 꿀꿀
와인이 웬지 빌어먹을 인간 같은 맛이다.
필요할 때만 살갑게 대하다가
입 싹 닦고 사라지는 그런 인간의 맛.
식인종이라도 그런 건 안 먹을 것 같은 그런 맛.
떡볶이 맛 망칠까봐
와인은 튀김만 찍어먹고
다시 조용히 병에 부어 놓았다.
이것저것 하다보니 또 새벽이다.
어제는 한 끼 식사에 세 시간 잠 잔 것이 전부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시간은 잘도 간다.
바람은 밤새 더욱 거칠어졌고,
비도 간밤에 내리던 것보단 나아졌지만
여전히 많이 내리고 있다.
바짝 마른 펭귄같은 하루다.
오늘 저녁엔 마트에 갈테다.
이만 원 이상 사면 이 천원 할인 해 주는 쿠폰 쓰러.
가서 KGB 이만 원어치 사야겠다.
주류는 해당 안되요라고 하면 캔을 던져줄테다.
찌그러진 엠프 소리처럼 어두운 태양이 뜨고
곧 무너질 철거 건물 빨랫줄에 널린 하얀 티셔츠처럼 비가 내리고
그래도 넘치는 거리의 웃음들처럼
바람이 분다.
오늘 하루는 웬지
배에 부딪힌 고래 뱃 속의 크릴새우같은 느낌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