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어제 죽은 그녀는
    사진일기 2007. 7. 4. 14:5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작지만 아늑하고 따뜻한 방이었어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낡고 오래된 마룻바닥이 삐걱삐걱 소리를 냈죠. 그 소리마저도  음악처럼 들렸어요. 빛 바랜 이불과 커튼, 낡아버린 옷. 침대 옆의 조화는 뽀얗게 먼지에 싸여 있었어요. 그 먼지마저도 왠지 이 방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죠. 그래요, 이 방에 첫 발을 들여 놓자마자 난 그만 반해 버렸던 거에요. 방에 정신이 팔려서, 방을 휘 둘러 보는 동안 한쪽 구석에 누군가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죠.
     
    -이 방 마음에 드나요
     
     한쪽 구석에 어떤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요. 부시시한 몰골과 퀭한 눈으로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그 눈은 아무 곳도 보고 있지 않는 초점 없는 흐린 눈이었죠. 억양 없는 어눌한 말투. 딱히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는 느낌도 없이 그 사람은 나즈막히 중얼거렸어요. 그제서야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깜짝 놀랐죠. 미처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는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 말았어요.
     
    =네,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이 왜 거기 있냐는 거에요. 비록 급한 마음에 방을 미리 보지도 않고 계약을 했지만, 어쨋든 오늘은 내가 들어 오기로 한 날이었으니까요. 그래요, 오늘은 내가 이 방에 들어와 살기로 한 첫 날이에요. 짐이라곤 큼지막한 여행가방 하나 뿐이지만, 그래도 엄연한 이사잖아요. 이사를 많이 다니긴 했지만, 이사 첫 날에 집 주인이 내 방에 들어와 있는 경우는 여태껏 한 번도 없었거든요. 의아하게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어요. 어쩌면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 사람의 묘한 기운에 압도 당한 건지도 모르죠.
     
    -사랑 해 봤나요
     
    =네?
     
    -이 방 지옥이에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요. 넋 나간 사람같은 모습에 기가 눌렸지만, 나도 짐을 옮기느라 피곤했어요. 그런 선문답을 즐기지도 않고, 무엇보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방에 나 혼자 편히 쉬고 싶었죠. 그런 대화, 조금도 재미 없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여긴...
     
    -사랑이 넘치면 지옥이죠.
     
     여긴 내 방이니 나가 달라고 말 하고 싶었어요. 물론 나가달라는 말까지 내 뱉을 수 있었을 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여긴 제 방이에요'까지는 최소한 말 하려고 했다구요. 중간에 말 허리를 딱 자른 것에 기분도 상했고, 좀처럼 나가려 하지 않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었죠.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어요.
     
    =이보세요, 여긴 제 방이고, 저는 지금 피곤해요, 쉬고...
     
    -피곤한 길 끝에 안식 있다 하던가요
     
     '대체 이 사람 뭐 하자는 걸까'하며 기가 막혀 잠시 쳐다 봤죠. 저 퀭 한 눈, 어쩌면 눈이 안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했어요. 눈동자가 있긴 있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좀 기이한 사람이라는 것 빼고는, 겉모습은 딱히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도 없었어요.
     
    =저기,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당신은 이 방을 택했어요.
     
     혹시 장님이 아닐까라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 사람은 서서히 내게로 고개를 돌려 똑바로 쳐다봤어요. 아니, 얼굴은 나를 정면으로 대하고 있었지만, 그 눈은 아직도 초점이 없었죠. 분명히 내 쪽으로 눈을 돌리긴 했지만, 시선을 마주쳤다 할 수는 없었죠. 어쨌든 그 사람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을 이었어요.
     
    -선택과 책임의 문제죠. 들판에 널려진 들꽃도 함부로 할 수는 없어요.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가져선 안돼요. 꺾은 꽃은 책임 져야 하죠. 각오가 필요해요. 당신도 꺾일 수 있어요.
     
     알 수 없는 말. 알 수 없는 말. 알 수 없는 말. 머릿 속에서 알 수 없는 말들이 웅웅거리네요. 그냥 멍하니 듣고만 있을 뿐이에요.
     
    -선택 하며 살기 보다, 선택 당해 살고 있죠.
     
     내게서 시선을 거두며 혼잣말로 웅얼거렸어요. 고개를 바닥으로 깊숙히 숙이더니 한숨을 푹 쉬는 것 같았죠. 그러고는 천천히, 저 동작이 언제 즘 끝을 맺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아, 이제 가려나 보다. 다행이다 싶었어요. 더 이상 이런 분위기에 계속 말 상대를 해 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저기
     
     그 사람은 아직 구부정한 몸을 다 펴기도 전에 팔을 들어 올려 창 밖을 가리켰어요. 창은 닫혀 있었고, 밖은 어둠에 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천천히 그 쪽, 창 쪽으로 걸어 갔어요. 아주 느린 걸음으로, 발을 질질 끌며. 한 걸음, 한 걸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이 한 걸음 떼 놓을 때마다 그 사람 모습이 조금씩 희미해 졌어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 서서히 사라지듯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천천히. 희미하게,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어요. 그 모습이 아직 완전히 다 사라지기 전에 그 사람은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어요.
     
    -어제 죽은 그녀가 내게 말 했죠.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요.
     

    '사진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0) 2007.07.04
    산다는 것  (0) 2007.07.04
    아파?  (0) 2007.07.04
    당신 없이도 살아가리라  (0) 2007.07.04
    날 버려  (0) 2007.07.04

    댓글

Copyright EMPTYDREAM All rights reserved /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