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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의 미로] 꿈의 미로
    리뷰 2007. 3. 11. 18:37

    (결말을 알고 싶지 않으면 읽지 마세요)

     우선 이 영화가 '판타지'임을 강조하여 마케팅을 펼친 영화 홍보사에 유감을 표하고 싶다. 영화 홍보가 완전히 어긋난 건 아니었다, 영화에 판타지적 요소가 있었던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마치 이 영화가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류의 판타지 영화인 것처럼 느끼게 한 탓으로, 관객들 중에는 소위 '낚였다'라는 느낌을 받았던 사람들 수가 적지 않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극장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왔던 부모들은 영화 끝나고 나갈 때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판타지'영화를 보러 왔던 연인들이 밖으로 나가며 투덜거리는 소리 또한 내 두 귀로 직접 똑똑히 들었다. 물론, 이 영화가 '15세 이상 관람가'이니까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온 부모들에게 잘못을 넘길 수도 있고, 대충 판타지 물이려니 생각하고 보러 온 사람들의 영화 선택이 잘못 됐음을 탓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영화 보기 전에 그 영화에 대해 꼼꼼히 조사하고 따져보고 나서 봐야 한단 말인가. 지금 와서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는 그런 식의 홍보는 좀 자제해 주었으면 싶다.

     많은 사람들이 '낚여서' 봤다는 억울함 때문에 이 영화가 다소 평가절하 되는 면이 있긴 하지만, 내 평을 한 마디로 말 하자면 이 영화는 '상당히 잘 만든 영화'라고 하겠다. 1944년 프랑코 독재의 암울한 시절, 정부군과 반군과의 대립 속에서 한 소녀의 힘든 세상살이를 현실과 환상을 조화해 잘 표현해 냈으니까. 단지 판타지라기 보다는 역사물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1944년이면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하는 때다. 프랑코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지원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1944년을 기점으로 프랑코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만다. 따라서 이 때는 암울한 프랑코 정권에 독일 항복이라는 변화가 일어나는 때인데, 이 변화가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기는 커녕 국가를 더욱 암울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시작점이 되는 때이다.

     이런 상황이니 주인공 '오필리아'가 해결해야 하는 세 개의 미로는 파시즘의 3대 요소를 뜻 할 수도 있다. 파시즘은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는 정책을 펴는데, '노동조합을 위시한 대중 운동의 억압', '언론 탄압', '끊임 없는 대외 분쟁'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 미로를 해결한다는 것은 파쇼 정권의 정책을 극복한다는 뜻으로, 어쩌면 영화에서 나오는 무장 게릴라들의 이념이 이와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다만 게릴라들은 현실의 억압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 총을 들고 활동하지만, 어린 소녀인 오필리아는 꿈의 세계로 도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다른 점이다.

     또한 오필리아가 결코 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결말을 맞이 하는데, 이것은 영화의 배경에 깔린 시대적 상황으로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앞서도 말 했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때는 독일이 항복하는 1944년이고, 이 때를 기점으로 프랑코 정권은 국제 사회에 고립되는 더욱 암담한 현실을 맞게 된다 (게다가 그 후로도 프랑코는 물러나지 않았다). 변화의 바람은 불었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욱 암담한 어둠 뿐인 그 상황이 어쩌면 오필리아의 결말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 영화가 시대적 상황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지만, 오필리아와 미로에 대해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세 개의 미로는 차례로 역겨움을 참고, 욕심을 억제하고,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것인데, 그것은 속세를 떠나려는 자의 노력과 비슷하다. 그 미로를 통과하고 기다리는 것은 오르기엔 벅차 보이는 텅 빈 자리 하나에 따뜻함이라고는 별로 찾아볼 수 없는 썰렁함. 오필리아는 그렇게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안락을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최소한 그 곳에서는 마음대로 꿈은 꿀 수 있으니까.



     어떻게 보든 오필리아는 한 시대의 희생양이다. 꿈조차 마음 놓고 꿀 수 없는 암담한 시대의 희생양. 소녀의 이름이 오필리아인 것 또한 그런 암시를 주고 있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오필리아는 햄릿이 사랑하는 여인이다. 그러나 햄릿이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죽이는 바람에 그녀는 미쳐서 죽어버린다. 그녀 또한 왕과 왕자의 다툼이라는 상황 속에 바쳐진 일종의 희생양이라 할 수 있으므로, 소녀의 이름이 오필리아 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 '꽃잎'이 떠올랐다. 암울한 시대 상황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사회 갈등과 폭력, 다툼 속에서 힘 없는 소녀의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꽃잎의 소녀(이정현)도 자신만의 세계로 도피해서 세상으로 향한 문을 닫아 버렸다는 점에서 오필리아와 닮은 점이 있다. 이렇게 암담한 세상 속에서 소녀(약자)들은 문을 꼭꼭 닫아 걸어 잠그고 자신만의 세계로 은둔해 버리는 피해자가 되는데, 문제는 그런 상황이 지금은 바뀌었나 하는 것이다. 그 옛날만큼 암울하진 않다 하더라도, 과연 지금은 연약한 소녀가 편안히 마음껏 꿈 꿀 수 있는 시대일까. 이 세상에 다툼(전쟁)이 계속 되는 한, 소녀들은 계속해서 시대의 희생양으로 내 바쳐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아무쪼록 언젠가는 소녀(약자)들이 마음 놓고 꿈 꿀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 프랑코 독재와 파시즘 상황을 이야기 했다는 측면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영화 '언더그라운드'도 한 번 보기를 권한다.

    (www.emptydre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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