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렛트는 따로 없었다. 어차피 페인트가 마르면 파렛트 따위 버려야 할 게 뻔하니까. 일회용 접시를 쓰는 팀도 있었고, 종이컵을 사용하는 팀도 있었다. 그렇게 벽화 작업에 쓰는 도구들은 거의 일회용의 성격을 띠는 것들이 많았다.

벽화 작업이 마을을 아름답게 하는 데는 좋지만, 환경에는 악영향을 주겠구나 싶은 걱정이 살짝 들었다. 실제로 벽화전에 쓰여진 도구들과 페인트 중 상당히 많은 양이 쓰레기로 버려졌으니까. 이 부분은 주최측 (푸른통영21)이 좀 더 고민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벽화 작업에 쓰는 페인트는 수성과 유성이 있다.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유성은 주로 거친 표면을 칠하는 데 쓴다 한다. 동피랑에 있는 벽들은 대체로 깨끗한 표면의 벽들이어서, 사람들은 대체로 다루기 쉬운 수성 페인트를 주로 사용했다.

유성 페인트는 굳었을 때 기름이나 용해제를 이용해서 녹여서 다시 쓴다. 수성 페인트는 굳으면 위쪽에 얇은 막이 생기는데, 그것을 걷어내고 물을 섞어서 쓰면 되기 때문에 다루기 쉬운 편이다. 그리고 수성 페인트는 물의 양과 흰색 페인트를 이용해서 색의 농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대체로 가격이 싸기도 하다.

수성 이라고 하길래 물이 묻으면 무조건 지워져 흘러 내릴까 걱정됐다. 하지만 일단 마르면 물에 잘 녹아 내리지 않았다. 물론 유성보다 오래 가지는 못한다는 결점이 있다고 한다. 햇볕에 색이 잘 바래는 편이기도 하고, 잘 떨어지기도 한다고. 그래도 나같은 초보자는 다루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별 고민없이 수성 페인트를 사용했다.














작업중에 다른 팀들을 기웃거려 보니 그리기 좋은 벽을 고른 팀도 있지만, 작업하기 좋은 장소를 고른 팀도 있었다. 작업하기 좋은 장소란, 사람들이 많이 오가지 않는 곳에, 전망도 좋고, 본부 (구판장)와도 가까워서 도구 보관에도 용이한 곳이었다. 한 마디로 오붓하게 팀원들끼리 모여 조용하게 작업에 열중할 수 있는 곳이다.

벽이 아무리 깨끗하고 작업에 알맞아도, 소란스러운 곳에서 집중을 잘 하지 못하는 타입이라면 동피랑 골목 쪽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반면 너무 외톨이로 떨어져 작업하는 것이 싫다면, 동피랑 아래동네는 쓸쓸해서 쉽게 지칠 수도 있다.

물론 벽화 작업이라는 것이, 하루종일 '벽 보고 서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작업 분위기나 환경도 작품에 영향을 미친기 때문에, 자신에게 알맞는 환경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이번 벽화전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그 중 통여중 학생들은, 비록 학업 때문에 자주 나오진 못했지만, 여럿이 모여서 벽화 한 부분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보람있지 않았을까 싶다. 친구들끼리 어울려 떠들고 놀면서, 길거리에서 춤도 추고 게임도 하며 벽화를 그려가는 모습도 나름 보기 좋았다. 이번 벽화전은 엄숙한 작품 활동이라기 보다는, 함께 어울려 노는 축제의 성격도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벽화전이 끝나면 동피랑 마을 사람들과 작가들을 모두 모아 마을잔치를 열 계획이었다. 공식적인 일정에도 나와 있었고. 하지만 곧 있을 선거 때문에 잔치는 열리지 못했다. 선거법에 위반되기 때문.

벽화를 그리느라 수고한 작가들도 작가들이지만, 그 기간동안 소란스럽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잘 참아낸 마을 주민들의 노고도 컸다. 그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서로 파전이라도 함께 뒤집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못내 아쉬운 부분이었다. 






저기 뒤쪽에 노란 치마 입은 꼬마 소녀 주목.

노란 꼬마 숙녀는 언제부터 와서 서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한참을 저렇게 서서 시투룽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이런 산동네에 올라와서 재미도 없고 다리도 아프고 해서 저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아이의 아빠가 와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너도 나중에 크면 이런 거 그릴 수 있어. 지금은 안 돼'.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디 있나. 이 대화를 들은 작가들은 당장 소녀에게 붓을 쥐어 주었다.










처음 잡아보는 페인트 붓이라 마음대로 잘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붓을 움직였던 꼬마 숙녀. 아빠가 도와주고, 언니가 도와주기도 했지만, 꼬마 숙녀는 자신의 손에 붓이 쥐어져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주 황홀한 기분이었나 보다.

붓이 움직일 때마다 눈에 띄게 표정이 바뀌었다. 천천히 색칠을 다 하고 난 다음에는 작업을 멈추고 붓을 넘겨주는 센스도 있었다. 그리고 입이 귀에 걸릴 듯 웃는 환한 미소. 엄마를 보며 폴짝폴짝 뛰며 기뻐하는 모습.

어쩌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능이 잠재되어 있는게 아닐까. 그리고 그 어떤 아름다움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망 또한 내재되어 있는 것 아닐까.



꼭 이 꼬마 숙녀 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벽화를 그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붓을 쥐어 주기도 했다. 꼬맹이들 뿐만 아니라, 대학생, 아주머니, 심지어는 어르신들 까지도 아이처럼 좋아했다. 겨우 벽에 선 하나 그엇을 뿐인데도 말이다. 아니, 그렇게 좋은 것을 왜 안 하고 있는지!

조용히 벽화를 그리고 있으면 하루에도 여러 사람들이 지나가며 이런 말을 툭 던졌다.

'나도 시간 있으면 저런 거 할 텐데'.

어찌됐든 그 말에는 자기도 벽화를 그려 보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벽화를 그리는 것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업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는 전제가 있었고, 자기도 그런 활동을 해 보고 싶다는 욕망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들은 다만 어떻게 참여해야 할 지 모르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 참여라는 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장 자기 집 혹은 자기 동네 구석 벽이라도 칠해 보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아주 작은 일부분이었지만, 꼬마 숙녀는 자기 손으로 동피랑 벽화의 일부분을 칠했다. 그 기억 오래오래 남겨, 후에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한 몫 차지하는 정말 '예쁜' 사람이 되었으면 싶다. 이 도시는, 이 세상은, 누군가 만들어 준 데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만들어 가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행동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어린왕자와 스펀지 밥은 좀 안 어울리지 않는가요?"
"어울리게 그리면 되죠~"

의외의 장소에 의외의 그림들. 그리고 의외의 조합과 의외의 생각들. 그 때 동피랑은 자유의 날개를 단 듯 했다.






동피랑 꼭대기로 올라가는 골목에는 개가 없지만, 아래 동네에는 개들이 좀 있었다. 그런데 이 개들이 또 참 희한했다.

대체로 낮에는 낯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녀도 별로 짖지 않았다. 이미 낯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에 익숙한 듯 했다. 그런데 밤에는 가끔 이 길을 지나다니는 동네 주민들을 보고도 짖어댔다. 특히 술 취한 사람에겐 꼭 짖었다, 뭐라 나무라는 것 처럼.

그런데 이 녀석들이, 벽화 그리는 사람들을 보고는 절대 짖지 않았다. 첫 날 부터 그랬다. 앞치마 두르고 붓을 들고 가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반겨주었다. 때로는 벽화 작업 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그렇지, 얘네들도 엄연히 동피랑의 주민들이지.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가. 동피랑 개 삼 년이면 미술을 안다!










작곡가 윤이상 초상화를 그렸던 팀. 작업자들이 고생한 건 또 새삼 말 할 필요 없는 일이고, 이 집에 사는 할머니도 참 수고 하셨다.

봄이긴 했지만, 여름처럼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의 통영. 그런 와중에 페인트가 튀지 않게 하기 위해 창문을 비닐로 덮고 있었으니, 이 할머니 얼마나 더우셨겠는가. 이따금 담배 피러 나오시면서 한 번씩 작업하는 모습을 휘 둘러 보기도 하셨는데, 그럴 때면 말 없이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구경하시곤 했다. 벽화가 마음에 드는지 여쭈었더니, '이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이쁘게 칠 해 주니 고맙다아이가' 하셨다.

이 초상화를 그린 팀은 다른 팀들과 다르게 '아크릴 칼라'를 사용했다. 아크릴이 일반적으로는 벽화에 좋지 않은 재료이긴 하지만, 잘 사용하면 세부적인 효과와 독특한 색감을 표현하기 좋다고 했다. 무엇이든 무조건 나쁘거나, 무조건 좋은 것은 없다는 말씀이었다. 용법을 잘 알고 적재적소에 사용하면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교훈.

하지만 아크릴 물감은 초보자가 사용하기는 너무 비싸다. 일반적인 종이컵 크기의 용기에 들어있는 것 하나가 만 원 정도. 비슷한 크기의 수성 페인트는 약 이천 원에서 오천 원 정도다.






바닥에 그림을 그린 건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냥 꽃잎이 떨어져 있었던 것. 이 바닥에 이런 꽃잎을 군데군데 그려 넣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만 있으면 할 일은 많았지만, 내 작업 하기에도 너무 벅찼다. 남은 일들은 또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해 주겠지.






Posted by 빈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