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 돈 없는 육신.
그래서 언제나 선택은 가장 싼 것.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넘어가는 항공권 중 가장 싼 것을 달라고 했다. 곰 세마리가 들러붙어 할퀴고 간 느티나무처럼 생긴 느끼한 목소리의 사내는, 역시나 패키지 투어 어쩌고 저쩌고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난 니가 아무리 씨부려도 듣지 않아 라는걸 보여주기 위해, 첫 마디 말 허리를 딱 끊고 잘라 말했다. '닥치고 제일 싼 거. shut up 'n the cheapest one'.
싼 항공편의 특징은 시간이 지랄같다는 거다. 버스로 갈 수 없는 이른 아침에 출발한다든지, 목적지에 늦은 밤 혹은 새벽에 도착한다든지. 또는 중간 대기시간이 아기 셋을 낳을 정도로 길다든지. 한 때 돈 오만 원 아끼려고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열 네 시간 대기 한 적도 있다. 하물며 변방의 싼 비행편은 오죽하랴. 그래도 다행인 것은 소도시 작은 공항에서 출발하는 거라 시간이 그리 많이 이상하진 않았다.
사실 급하게 떠나는 여정이라 가장 싼 항공권이라해도 미리 예매한 것 만큼 싸진 않았다. 미힌랑카(Mihin Lanka) 항공사를 이용해 트리키에서 스리랑카로 왕복 항공권이 약 145 달러(USD)였다. 편도는 대략 30달러 정도 더 싼 가격. 물론 돈은 달러가 아니라 인도 돈으로 지불했다.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가는 가장 싼 비행편은 트리키에 있었다.
트리키(Trichy)는 트리치라고도 발음하는데, 키와 치 중간 발음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남인도에서도 남쪽 끄트머리 내륙에 있는 작은 도시로, 정식 이름은 티루치라팔리(Tiruchirappalli). 하지만 지도나 차편에서도 트리키(Trichy)라고 적혀있는 경우가 많다. 현지 사람들과 대화 할 때도 트리키 혹은 트리치라고 말 하면 다들 잘 알아 듣는다.
트리키는 시골 작은 소도시 같은 분위기라 딱히 특별한 볼 거리가 있지는 않다. 바위 위의 사원과, 시장통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큰 사원 하나가 볼거리의 전부다.
바위 위의 사원에서는 추울 정도로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트리키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가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남인도의 후텁지근한 날씨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스리랑감 사원은 현지인들에게는 나름 중요한 사원이다. 사실 이 사원이 위치함 섬의 이름이 스리랑감(Sri Rangam)이고, 이 사원의 이름은 스리 랑가나타스와미 사원(Sri Ranganathaswamy Temple)이다. 그런데 그냥 스리랑감 사원으로 흔히들 부른다. 이 사원은 세계 최대의 힌두교 사원이라 하는데, 그래서 이곳을 찾는 현지인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내 경우는 이 사원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시장이, 저 너머 보이는 사원과 오묘하게 조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인상깊었다.
그 외 트리키 관광안내 팜플랫을 보면, 볼거리라고 소개해 놓은 것들이 150 킬로미터, 200 킬로미터 밖에 있었다. 참 가깝다. 정말 가깝죠. 왜 그러세요, 나들이 갈 때 200 킬로미터도 안 나가는 사람들처럼. 동네 수퍼에 쭈쭈바 사러 갈 때도 기본 10 킬로미터는 걸어야 하는 동넨데 뭐, 그 정도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지. 한 1만 킬로미터 정도는 돼야, 아 조금 멀구나 하는 거죠. 그래서 너무 가까워서 안 갔다.
트리키는 외국인 여행자들보다는 인도 내국인 여행자들이 더욱 많이 찾는 곳이었다. 여행자가 북적거리지 않는 소도시에서 나름 조용히 현지인들의 일상을 지켜보기엔 괜찮은 곳이었다. 델리나 아그라, 바라나시처럼 외국인들에게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기 때문에, 인도 특유의 카오스적인 분위기 또한 약간 순화되어 있는 편이다.
꼭 한 번 가보라고 추천하진 못하겠지만, 여행자가 북적이지 않는 인도 소도시를 원한다면 한 번 들러볼 만 하다. 물론 내 경우는 오로지 비행기를 타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곳일 뿐이었지만.
(India, Tiruchirappalli, Sri Rangam (Sri Ranganathaswamy Temple), 2009)
(India, Tiruchirappalli, Rockfort Ucchi Pillayar Temple (Rockfort), 2009)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새벽 5시 쯤 밖으로 나왔다.
인도인들이 이 시간에는 일을 잘 안 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택시 하나 없을까 싶어 무작정 거리로 뛰쳐 나왔다. 물론 인도에서 이 새벽부터 택시 영업을 시작할 정도로 부지런하다면, 이미 부자 돼서 택시기사 집어 치웠겠지. 그래 그거 알긴 아는데, 아 그래도 그렇지 거리가 너무너무 조용하다. 숙소가 버스터미널 근처였는데 버스도 한 대도 다니지 않았고, 그 넓은 길에 택시도, 툭툭도 하나 없었다. 참 난감한 상황.
숙소로 들어가서 콜택시라도 불러달라 해야하나 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저쪽 골목길에서 부시시 눈 비비며 택시를 걸레로 닦으려 하는 노인이 보였다. 자자, 세차 나중에 하고, 돈 벌어야지, 돈.
250 루피로 합의 보고 공항 도착. 택시기사 할배가 250루피를 그리 기쁘지 않게 생각하더니,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혀 막히지 않는 길을 택시로 달려서 약 20분 정도 걸리는 꽤 먼 거리였던 것. 어쩔 수 없지, 흥정은 흥정이니까. 그게 무지막지하게 싼 요금이라서 그런게 아니다. 그 정도면 대략 현지인 가격이다. 그 할배가 시투룽 했던 것은, 내가 외국인인데 현지인 가격을 받고 공항까지 갔기 때문일 뿐.
트리키 공항은 시내 규모만큼이나 작은 공항이었다.
고등학교 운동장 넓이만 한 앞마당 주차장 너머, 조촐한 2층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앞마당 여기저기엔 짐을 가지고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예 땅바닥에 드러누워 자는 사람들도 많았다. 땅바닥에 신문지 하나 깔지 않고, 짐을 베개삼아 그대로 드러누워 자는 사람들. 인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버스든 기차든 많은 기다림과 인내심이 필요한 곳이니까.
첸나이 공항도 그랬지만, 이 공항도 비행기 표가 있어야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도 아무 표나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는게 아니다. 출발시간이 임박한 비행편을 불러주고 들어오라고 방송한다. 그러면 그 비행편의 항공권 소지자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인도에서 공항은 소중하고 특별한 곳이니까.
그래서 아직 시간이 안 되어 부름을 받지 못 한 사람들은 모두 길거리에 내팽개쳐진 채, 바람에 날리는 까만 비닐봉지처럼 길바닥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어야만 하는 거다. 나 역시도 예외일 수 없었다. 꼭 세시간 전에 오라는 말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도의 교통편은 어떤 일이 어떻게 돌발적으로 발생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찍 도착해 있는 편이 낫다. 그래서 다소 일찍 도착해서 공항 근처 길바닥에서 모자란 잠을 보충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공항 규모도 작은 데다, 시간도 이른 시간이라 각종 삐끼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 물론 점차 해가 떠 오르면서 기온이 상승하자, 삐끼 대신에 날파리들이 성가시게 달려들어 괴롭혔다.
(India, Tiruchirappalli, Tiruchirapalli Airport (Trichy Airport), 2009)
공항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짐 검사부터 받는다.
그 다음에 보딩패스 발급과 출국수속.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면 또 짐 검사. 나중에 비행기 탑승하는 문 앞에서 또 가방 열어 보라며 짐 검사. 세상에 넘쳐나는 건 사람이고, 비행기는 비싸니까. 소중한 비행기를 보호해야죠.
비행기표 검사는 셀 수도 없이 많이 한다. 공항 내에서 조금이라도 이동하면 표 검사를 한다. 심지어 화장실 한 번 다녀오면 표 검사를 최소한 두 번 이상 당할 정도다. 그냥 비행기 표만 보여주면 되는 거라 간단하긴 하지만, 정말 성가신 일이다.
인도가 이렇게 짐 검사, 표 검사를 많이 하는 이유는 테러 때문이다. 그 당시에도 티비에서 폭탄테러 소식이 뉴스로 나왔었다. 사람 안 죽은 조그만 규모의 폭탄테러는 해외 언론에 보도도 안 돼서 그렇지, 인도는 항상 크고작은 테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 검사들이 이해가 되긴 한데, 재미있는 것은 외국인은 거의 그냥 설렁설렁 보고 넘어간다. 예전에 서양인 외모를 한 사람이 폭탄테러를 했던 것이 뉴스에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외국인이 테러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인도에 폭탄 들고 가실 분들은 안심하시라.
외국인들에게 관대한 편인데 반해, 내국인이나 까만 피부를 가진 사람들에겐 굉장히 깐깐하다. 내가 갔을 때도 한 가족 전체가 공항 밖으로 쫓겨나는 걸 목격했다. 비행기 표도 가지고 있었는데, 짐을 수색하며 검문하는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 가족들은 나중에 비행기 탑승 직전에 허겁지겁 올라올 수 있었다. 그나마 운이 나쁘진 않았던 거다. 그대로 탑승하지 못 한다 해도 여기선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굉장히 터프한 곳이다. 세상은 참 와일드 하구나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말도 안 되게 억울한 경우를 인도에서 당해 볼 수도 있으니 잔뜩 기대하시라.
내 경우는 짐이 작은 가방 하나 뿐이기 때문에, 보통은 엑스레이 검사 정도만 하고 그냥 넘어간다. 그런데 이때는 집에서 쓰다 남은 세탁가루를 비닐봉지에 뚤뚤 뭉쳐서 가져간 것이 조금 문제가 되었다. 이 가루가 폭발물인지 아닌지 정밀 검사 기계로 계속 검사를 당해야 했다. 뭐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과정은 아니었지만, 가방을 열어 세탁가루를 꺼내야 한다는 것이 좀 귀찮았다.
미힌랑카는 스리랑카 국영 항공사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미힌랑카가 저가항공이라고 해서 나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그런 저가항공이 아니었다.
어쨌든 내 비행기 표에는 분명히 미힌랑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탑승한 비행기는 스리랑칸 에어라인(srilankan airlines). 공항 여기저기 다 둘러봐도 미힌랑카 부스나 항공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거 제대로 타는 것 맞는 건가라는 생각이 계속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뭐 어때 꼭 스리랑카로 갈 필요도 없고. 스리랑카 안 가면 아리랑카 가면 되고. 설마 바닷물에 빠뜨리기야 하겠어. 일단 타라고 하니 타면 되고.
트리키에서 스리랑카 국제공항까지 비행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서울에서 제주도 가는 정도의 비행시간 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국제편이라고 간단한 기내식을 줬다. 푸석푸석한 작은 빵 하나와, 말라비틀어진 식빵 조각에 이것저것 끼워넣고 샌드위치라는 이름을 더럽힌 이상한 빵조각 하나, 그리고 주스 한 잔.
아직 제대로 착륙도 하지 않았는데 짐 꺼내들고 통로에 줄 서는 인도인들의 그 극성스러움에 눈살 찌푸리고, 통로를 빠져나가는 내내 서로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등 떠 밀고 잡아끄는 아귀다툼에 또 한숨 내쉬고. 그 아비규환 혼돈의 구렁텅이를 헤치고, 드디어 스리랑카에 단 하나뿐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 추가)
티루치라팔리에 대한 자세한 여행기는 나중에 연재 할 지도 모르는 남인도 여행기에서 상세히 다루겠다. 그 때 까지 죽지 말라.
* 참고)
- 트리키 락 포트 가는 길
http://travelro.co.kr/route/1571
- 티루치라팔리 스리랑감 사원 가는 길
http://travelro.co.kr/route/15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