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유부남이었고, 그 여자는 미혼이었다. 남자의 아내는 어린 아이들의 조기교육과 자신의 공부를 위해 해외로 함께 나가 있는 상태. 요즘 각종 미디어나 언론 등에서 흔히 나오지만, 내 주위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어느정도 재산 모아서 어린 자식들 조기교육을 시킬 수 있는 형편의 가장이었다.
둘은 만났다.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보니 한동안 그들의 만남에 내가 끼이게 됐다. 그 여자에게 혼담이 오가는 애인이 생겼을 무렵부터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사람들에게 셋이 만났다고 이야기를 했고, 셋이 만나고 있을 때는 가족이나 애인에게 전화를 길게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밤이 깊어질 무렵, 은근히 보이는 눈치와 더이상 피곤해서 버틸 수 없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 나는 그들과 헤어졌고, 그들은 계속 함께 남아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무얼 했는지 직접 확인한 것은 없었기에 그저 짐작만 하면서도, 호기심인지 안타까움인지 알 수 없는 심정이 나를 또 그들의 파티로 이끌었다.
나 역시도 그리 나쁠 건 없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처음 보는 그런 이상한 커플 조합을 눈 앞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였기도 했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한 의도가 다분한 고급 레스토랑과 고급 바 등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또한 계속 발길을 하게 한 이유 중 하나였다. 제일 큰 이유는 역시, 그들 둘 모두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관계여서 쉽사리 그런 자리에 불러내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는 거였다.
그런 상황은 오히려 내게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스릴을 느끼게 해 주기도 했다. 뭔가 큰 음모의 조직에 가담해서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범법자의 느낌이랄까. 그들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 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게 된 것으로 어떤 희열을 느낀 걸까.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고 특히 그런 일들이 그렇듯,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나는 그 남자의 가족사진을 우연히 봤고, 그걸 보자마자 누군가에겐 큰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날 아름다웠던 재즈바에서 술을 몇 병이나 혼자 홀짝홀짝 퍼 마신 이후, 그들의 향연에 더이상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지난 어느날, 그 여자에게서 눈물의 바다에 깊숙히 쩔어 잠겨 쉰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라며, 자기가 아파서 병원에 있는데, 그 남자는 가족과 약속이 있다고 출국해 버렸다 했다.
그럴 걸 몰랐냐며, 이미 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며, 이제라도 끊어버리고 다른 좋은 사람 만나라고 했지만, 그녀가 마지막 남긴 말은, '당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였다.
그래, 일단 그 말이 맞긴 맞다. 사연 없는 무덤 없고, 처녀가 애를 낳아도 이유가 있으며,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과 연유가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들을 정당화 시킬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무조건 잘못한 거라며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네 인생 네가 알아서 해라라며, 그렇게 떠나보낼 수 밖에.
용유도 선녀바위에도 어찌 보면 비슷한 전설이 담겨 있다. 영종진 방어영에 수군들이 상주하던 시절에, 이 군을 통솔하던 지휘관에게 예쁜 첩이 있었다 한다. 그런데 사랑이 식은 남자가 여인을 찾지 않게 되자, 이에 화가 난 여인은 남자의 군부대 앞의 바위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자살했다 한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이 첩을 시기한 지휘관의 부인이, 그 여자가 몰래 다른 남자와 만난다는 소문을 퍼뜨려 지휘관이 더이상 그 여인을 찾지 않게 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렇게 죽은 그 여인의 시신이 용유도 포구로 떠내려왔고, 이를 안 지휘관이 뒤늦게 후회하며 그 자리에 묻어 주었다 한다.
그 후 이곳에 밤하늘이 맑을 때면 선녀들이 내려와 놀게 되어 선녀바위로 이름 붙여졌다 하는데, 아무래도 그 후에 선녀들이 이 자리에서 많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함은, 그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이 자리에서 그 뒤를 따라간 처자들이 많았다는 은유가 아닐까 싶다.
첩이 허용되던 그 시절에도 저렇게 사랑에 목놓아 울며 마음고생 하다가 떠난 이가 있는데 지금 세상에야 오죽하랴. 비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그 모든 행위에 동정을 보내고 싶지는 않지만, 그 빗나간 사랑 속에서 괴로워하는 한 인간의 슬픔까지도 냉정하게 내칠 수만은 없는 노릇.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참 어찌할 수 없는 난감함에 그저 피하고만 싶을 뿐이다.
어찌됐든 그런 슬픈 전설이 전해지는 이 선녀바위 옆으로는 수많은 새하얀 조개껍데기들이 마치, 아직 남은 미련처럼 발 밑에 밟힐 때마다 챠라락챠라락 소리를 내며 으깨어진다.
오래오래 잊고 지낸 옛 추억이 껍질을 깨고 나올 것처럼 챠라락챠라락, 이제 다 부질없다 목놓아 우는 소리처럼 챠라락챠라락, 모든걸 포기하고 벗어던진 새하얀 영혼처럼 챠라락챠라락, 챠라락챠라락, 또 챠라락챠라락 그렇게 단단한 껍질이 운다.
그 사색의 걸음은 마시안까지 이어갈 수 있는데, 선녀바위가 비록 을왕리와 용유해변 사이에 있지만, 이 분위기는 마시안 해변과 바로 이어가면 좋을 정도로 둘이 닮았다. 현실에서는 이런저런 이동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영화처럼 중간을 자르고 바로 선녀바위에서 마시안 해변으로 걸음을 이어보면 한껏 고독한 인생을 곱씹어볼 수 있다.
아니 꼭 그러지 않아도 좋다, 용유 해변을 거쳐서 마시안 해변에 이르는 길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비교적 사람이 많은 용유해변에서 군데군데 노니는 연인의 무리들을 보고나서, 다시 인적 드문 마시안 해변을 혼자 거닐어보면, 아, 사랑 없는 세상이 참 평화롭구나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 사랑 그것이 그리도 아름다웠던가, 그리도 목말라 애타게 찾고 또 찾아 도착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어서, 빗나간 사랑도 사랑이라며 숨기며 애태우고 상처받고 찢어져도 사랑, 그래 사랑이니까 하며 그렇게 참고 또 견디며 어떻게든 되겠지 하루하루 버텨갈 수 있는 건가.
아는 사람 중에는 훤칠한 외모와 누구에게나 다정한 인품이 오히려 화가 되는 사람이 있었다. 애인이 있을 때도 그랬고, 유부남이 된 후에도 그랬는데, 주위 여자들이 일방적으로 그를 좋아하고, 관심을 주고, 사랑하게 되어, 애써 그 상황을 모른척 넘어가려 하거나, 만나자는 제안을 거절할 때면 언제나, 저 사람은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돌곤 했다.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주위 사람을 다정하게 챙겨 준 죄 밖에 없는 그에게는 참 억울한 일이었고, 급기야 전후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그 사람은 바람둥이로 통하게 될 무렵,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는 오는 여자를 더이상 막지 않게 됐다.
주위에 친분이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과 교재하는 여성이 십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 때 쯤, 그에게는 더이상 바람둥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았고, 오히려 젠틀한 멋이 있는 남자라는 찬사를 받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그는 친분있는 지인들과 연락을 끊었다. 어떻게 된건가 하며 화제가 된 것은 잠깐 뿐, 그저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라며 잊혀진 이야기로 가끔씩 술안주로 나오다가 그마저도 끊겨버린지 오래.
아아, 이런저런 별꼴들을 다 보고 난 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사랑 있는 곳엔 평화 없어라. 아무도 사랑할 사람 없고, 아무도 사랑해 줄 사람 없는 내 신세가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 없더라.
가슴 아플 일 없이, 떠올릴 사람 없이, 무덤덤하게 선녀바위를 바라보다 챠라락챠라락, 쓸 데 없는 추억을 깨어 부수며 혼자 고즈넉한 마시안 해변을 걸을 때, 아아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더라, 사랑 없는 세상에 평화로운 해변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더라.
그러니까 우리, 당신과 나는 부디, 사랑 없는 세상에서 대면대면 그저 아는 사람으로 지내도록 하자. 기껏 쏘아올린 오색빛깔 폭축이 터지고 나면, 어둠보다 적막하고 소음보다 구슬픈 삭풍이 불어오니, 사랑 후에 사랑은 그렇게 쓸쓸하여 무섭기만 하더라. 그러니까 부디, 부디 당신과 나는, 사랑 없이 살자, 평화롭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