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언제나 멀리 여행을 떠날 때면, 약간의 부러움 속에 한숨 섞인 걱정을 해주는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 했다. 길고 긴 방황 끝에 정착을 잊어버린 길고양이처럼, 한동안 먹이가 있는 곳에 머물다가도 어느날 문득 푸른 바다에서 들려 오는 로렐라이의 노랫소리에 이끌리면, 가진 것 모두 내어놓고 살던 곳도 비우고는 흔적 없이 사라지곤 했다.
아직도 그렇게 살아서 어떡하냐는 친구의 말에 버럭, 화가나서 네 인생이나 잘 살라고 못 된 소리를 하게도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나도 안다, 십 년을 훌쩍 넘은 그 오래된 친구들의 걱정은 보통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내지르는 개똥같은 말의 배설이 아님을. 그리고 내 눈동자 어디에 항상 서려있는 불안함을 이미 잘도 읽고, 차마 내 스스로 나에게 던지지 못 한 말을 대신해 주고 있음을.
성격 좋고, 공부도 잘 해서 친척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사촌 형이 있었다. 어느날 사고가 나서 정신이 나가 버렸는데, 그 후로는 자주 훌쩍 사라져서는 어느 낯선 동네 경찰서에서 발견되곤 했다. 왜 그렇게 나가는 지는 자기도 모른다 했다, 때가 되면 그냥 어딘가 가 있을 뿐이라고.
그 형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난 단지 세상 사람들에게 '진짜로 정신이 나갔다'라는 판정만 받지 않았을 뿐, 비슷한 질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의 준비를 의식적으로 차곡차곡 한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그 형 역시 나름대로는 평소에 떠날 준비를 차곡차곡 하고 있었을 지도.
어쩌면 그건 예전에 그토록 세상이 아름답다고 웃으며 항상 입가에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녔던 그 형의, 나름대로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랑에 빠지고 절망하면서도 또 사랑에 빠지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마치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나오는 여주인공 처럼, 그렇게 사랑 속에 있어야만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의 사랑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내 곁에 없지만, 항상, 떠날 때 즈음엔 그의 미소가 떠오른다, 그도 나처럼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떠돌았을 거라고.
사랑도 병이고, 여행도 병이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질퍽한 늪처럼, 몸부림 칠 수록 더욱 깊게, 깊게 빠져서는 벗어날 수 없어서, 그 속에서 어떻게든 잘 적응하고 살포시 움직여 그럭저럭 절충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이다.
그래서 여행을 사랑처럼 빠져들게 되면, 어느날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갈 수 없는 괴로움에 밤 잠 설쳐가며 고뇌하듯이, 마치 수많은 일상은 기억 속에 존재하는 허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뒤에 놓여지고, 어느날 느닷없이 낯선 여행지에 덩그러니 놓여진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그렇게 허망하고 부질없지만 쉽게 끝내버릴 수 없는 짝사랑이 바로 여행일 테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그렇게 비장하게 어딘가 홀린 듯, 연의 실을 자르듯 떠나버린 여행도, 언젠가 끝은 있고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사실 돌아오지 않는 여행은 여행이 아닌 그 무엇일 테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다, 거대한 새의 자궁에 쭈그리고 앉아, 때가 되어 그 좁은 통로를 고생고생 벗어나면 느닷없이 화악 다가오는 세상의 빛. 꿈으로 가득 차 있던 아늑했던 어둠의 공간을 뒤로하고, 이제는 이 빛을 아름답다고 인식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과 맞닥드린 순간, 달콤했던 저 세상의 기억들은 탯줄처럼 잘라지고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나를 좀 더 그곳에 살게 해 주세요, 제발.
인천공항은 내겐 그런 곳이다. 탯줄이 잘린 곳.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먼 세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현실, 지겹도록 오래되고 아프도록 낯설기만 한 그 현실과 다시, 새롭게 얼굴을 맞대하는 공간.
그래서 나는 울러 간다. 울지 않는 신생아는 문제가 있다지. 어쩌면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 하게 될 지도 몰라. 어쩌면 너무나 아쉬운 마음에 저 쪽 세계에 영혼을 둔 채, 다시 불러들이지 못 해 껍데기로만 살아가게 될 지도 몰라. 그래서 울러 간다, 아직 신선하고 따뜻한 온기가 남은 탯줄을 들고 피를 철철 흘리며, 묻으러 간다.
이왕이면 바다가 좋겠다, 내 먼 과거의 조상, 그리고 그 조상의 조상, 또 조상의 조상이 태어나고 생활했다는 그 곳. 멀고도 먼 시간 속의 고향, 언제나 넘실대는 양수가 언제나 포근하게 나를 받아줄 수 있을 듯 한 공간, 꿈과 현실이 하나로 뒤엉켜 차츰차츰 살포시 눈을 뜨게 해 주는, 바다가 좋겠다.
인천공항 13A, 302, 306번 버스. 탑승 장소와 버스 번호는 언제든 바뀔 수 있어서 도착하면 또 새롭게 알아보는 수고를 해야 하지만 상관없다, 어떻게든 알아보고 갈 수 있는 방법은 있으니까. 사실은 바다도 꼭 그 바다여야 할 필요도 없지만, 일단 가장 쉽게, 가장 용이하게 갈 수 있는 곳이니까 용유도로 향한다.
영종도에 공항이 들어서면서 매립되어 이어진 섬. 옛날에는 월미도 등에서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던, 다가가기 불편했던 그 섬을, 이제는 공항에서 버스 한 번으로 갈 수 있다.
적당히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용유도에 달하면, 왕산 해수욕장, 을왕리 해수욕장, 마시란 해변 등이 줄줄이 나오는데, 사실은 정신차려 내릴 때 되면 어디든 한 군데를 아무렇게나 골라서 내리는 편이다.
하지만 방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현실이라는 험난한 가시밭길을 앞두고 있는 사람에겐 왕산 해수욕장이 좋을 듯 하다.
을왕리는 너무 붐비고, 마시란은 너무 쓸쓸하다. 왕산은 마치 내버려 둔 해변처럼 정돈되지 않은 어수선함이 있지만, 넓고 아름다운 풍경에 이끌린 소수의 사람들이 종종 발걸음을 하는 곳이라 을씨년스럽지 않아서 좋다. 자연과 인간이 각자 한 발씩 뒤로 물러서 함께 공존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 여기가 좋겠다, 여기다 이번 생의 탯줄을 묻자. 이미 묻은 탯줄도 여러 개, 마치 꼬리 아홉 달린 고양이처럼 태어나고 죽고, 또 죽었다가 태어나길 여러 번. 이번 생은 억겁년에 걸친 윤회를 한꺼번에 압축한 결정판인가 보지, 하며 다시 태어난다.
길고 긴 꿈에서 벗어난 뇌사자의 영혼처럼 돌아온다, 오랜 방황을 마친 탕아처럼 그리고 힘차게 눈물을 흘린다, 슬픔의 눈물인지 기쁨의 눈물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문득 정신이 들고, 눈이 떠지면 배가 고프기 시작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뭐라도 따뜻한 걸 먹어야지 하며 몸을 일으킬 때, 갑자기 현기증이 핑 하니 돌면서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이 있다며 파도가 손짓을 한다.
기억하라, 바다가 머금은 나의 탯줄은 로렐라이로 다시 태어나, 어느날 문득 살아있는 이유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 수족관의 물고기처럼 빛도 없는 멍한 눈으로 입만 버끔거릴 때, 다시 나를 불러줄 노래를 바람에 흘려 보내리라는 것을.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다시 돌아가 시지프스의 돌을 열심히 옮기다가, 문득 힘들어 눈물이 핑 도는 어느 맑은 날, 이곳에 묻었던 수많은 나의 노래들을 꺼내 들어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