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 저 멀리  GRAY 1 0613
 
Incredible India
 


 1.
 2006년 6월 13일, 여름이 시작될 무렵. 인도 델리 현지 시각으로 밤 11시 40분에 나는 델리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델리 시내는 생각보다 그리 화려하거나 발전한 도시 같이 보이진 않았다. 멀리 보이는 도심 번화가의 불빛들에서 꽤 벗어난 외곽지역, 판자집 같은 허름하고 조그만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곳들을 지나 비행기는 활주로에 들어섰다.
 
 출발하기 직전까지 이상하다 싶을 만큼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아서, 전혀 설레지도 기대되지도 감격스럽지도 않았다. 그래도 여섯 시간이라는 긴 비행 시간 동안 옆자리에 좋은 사람이 앉아서 여행 정보도 나누고 얘기도 좀 했으면 좋겠다는 기대는 약간 했었다. 하지만 기대는 보기 좋게 어긋나서, 왕복으로 거의 백 만원이나 주고 탑승한 비행기는 절반 가량 빈 자리였다. 그래서 그런지 내 옆자리엔 아무도 없었고, 당연히 얘기도 나눌 수 없었다.
 
 마침 월드컵 기간이었고, 딱 그 날 비행 도중에 한국과 토고의 경기가 있었다. 한국인 승객들은 지나가는 스튜어디스에게 경기 중계 방송을 해 달라고 요구 했지만, 결국 방송은 나오지 않았다. 간간히 스튜어디스들이 전해 주는 소식으로 경기 상황을 짐작했고, 마침내 기장님이 안내 방송으로 한국이 승리했다는 방송을 했을 때는 비행 여정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였다.
 
 출입국 신고 카드를 작성하고 줄을 섰다. 잠이 와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출입국 관리 직원이 무뚝뚝한 표정과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내 출입국 카드의 빈 공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인도 어디서 묵을 건지 호텔 주소를 써라.' 보통 아무 주소나 써 넣으면 아무 말 하지 않지만, 마침 가이드북도 없고 기억나는 호텔 이름도 없고 해서 그냥 빈 칸을 그대로 놔 뒀다. '지금 나가서 찾아 봐야 해.'라고 대답하니 픽 하고 비웃으며 말 없이 스탬프를 쾅 찍어 준다.
 
 여권에 스탬프를 찍고 나와서 내 짐이 나오길 기다렸다. 지루하게 내 가방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한국 사람인 듯 보이는 사람들과 말을 섞어 봤다. 혹시 나처럼 무작정 와서 지금 숙소를 구하러 가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동행 할 작정이었다. 아무래도 처음 가 보는 낮 선 곳에선 혼자보다 무리를 짓는 것이 나으니까. 그런데 나처럼 무작정 아무 생각 없이 훌쩍 떠나온 사람은 없었다. 호텔이나 기타 다른 숙소들을 미리 예약 하고 와서, 픽업 차량이 오기로 돼 있는 사람들뿐 이었다. 내 짐이 거의 마지막 즘에 나와서, 그 동안 같은 비행기를 탔던 거의 모든 한국 사람들에게 말을 붙여 봤지만 허사였다. 인도에 들어오자마자 첫 실수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냥 아무나 잡고 함께 픽업 차량에 끼여 타고 갔어야 했는데, 예약 하지 않았으니까 하면서 함께 가기를 포기해 버린 것이 안타깝다.
 
 
 
2.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나고, 주위가 한산해질 때 즘 내 가방이 나왔다. 비닐테이프로 빙빙 둘러 감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간혹 비행기에서 짐을 내리는 사람들이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훔쳐 가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쉽게 열지 못하게 테이프를 붙여 놓았다. 가방을 수하물로 부칠 때는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내가 유난을 떠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짐을 찾을 때 보니까 내가 사용한 방법은 귀여운 측에 속했다. 많은 가방들이 쇠사슬을 두르고 열쇠로 잠겨 있었으니까. 어떤 짐은 쇠사슬과 열쇠 무게만 해도 꽤 나갈 것 같은 큰 것도 있었다. 저렇게 조심 하는 걸 보면, 소문이 과장된 것은 아닌 듯싶다.
 
 일행도 구하지 못한 채 가방의 비닐테이프를 뜯어 내고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가방을 울러 메고 출국 게이트를 빠져 나갔다. 여섯 시간 정도의 비행이 그리 편하지도 않았고, 밤이라서 피곤하기도 해서, 7Kg 정도의 가방이 무겁게 느껴졌다. 잠이 와서 눈꺼풀이 무거워지니 자연스레 발걸음도 무거워졌다. 이 상태로, 또 이 야밤에 어떻게 숙소를 찾아 다닐까 걱정이 됐다.
 
 출국 게이트를 통과하니, 통로 양 가 쪽으로 환전 부스들이 쭉 늘어서 있다. 내가 나가니 환전상들이 부스 밖으로 고개를 쭉 빼서 서로 자기 쪽으로 오라고 일제히 소리 지르기 시작 했다. 순간 공항인지 시장인지 헷갈릴 정도였는데, 그 환전 부스들을 싹 무시하고 쭉 걸어 나오니 더 가관이었다. 우리나라 시골의 시외버스터미널 정도의 시설과 규모 밖에 되지 않는 대합실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푹 나올 정도였다. 한 눈에 봐도 때가 꼬질꼬질해서 앉기도 싫을 정도의 플라스틱 의자들과, 누르스름한 벽들. 전기를 아끼려는 건지 전등도 반 정도는 꺼 놔서 더욱 을씨년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정말 국제공항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
 
 

3.
 너무 정신이 없어서 환전 할 생각도 못 하고 더러운 플라스틱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 앉았다. 처음 델리 공항에 내리면 특유의 냄새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 사람도 있다던데, 잠도 쏟아지고, 피곤하기도 하고 해서 그런지 그런 냄새는 나지 않는 듯 했다. 일단 그렇게 앉으니 일어나 움직일 기운도 나지 않아서, 그냥 그대로 앉아 꾸벅꾸벅 졸며 동이 트길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내가 자리에 앉은 지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어떤 사람이 와서 어디서 왔느냐, 이름이 뭐냐, 결혼은 했느냐 등의 질문을 퍼붓는다. 대충 대답해 줘도 갈 기색이 안 보이길래, 피곤해서 더 얘기하기 싫다고 했다. 그랬더니 피곤하면 2층에 있는 visitor's lounge에 가서 자는 게 낫다고 자기가 안내 해 주겠단다.
 
 내가 앉아 있던 곳도 visitor's lounge였다. 공짜로 누구나 앉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거기서도 밤을 샐 수는 있다. 하지만 1층이라서 바깥과 바로 통하고, 아무나 들락거리기 때문에 맘 놓고 쉴 수가 없다. 그 반면에 2층의 visitor's lounge는 커다란 방에 의자들이 쭉 놓여 있는데, 여기는 돈을 낸 사람들만 출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비교적 편하고 안전하게 쉴 수 있다. 밤에 도착해서 딱히 갈 숙소가 없다면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시내로 나가는 것이 보통이라 한다.
 
 내가 놓쳤던 것은 2층 visitor's lounge는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 돈 20루피. 그때 당시 인도 돈 1루피는 한국 돈으로 약 20.5원 정도였다. 그러니 입장료 20루피는 그야말로 껌 값이다. 하지만 문제는, 난 아직 환전을 하지 않아서 인도 돈이 하나도 없다는 것. 이 때 바로 소액 환전을 하고 여기서 하룻밤을 보냈어야 했는데, 왜 멍청하게 그런 머리가 안 돌아갔을까.
 
 
 
4.
 입장료 받는 사람에게 ‘아직 환전을 하지 않아서 돈이 없다’라고 말 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나를 여기로 데려온 그 사람이 내게 쉴 새 없이 말을 퍼 붓는다. '아까 출국 게이트 앞에 늘어선 환전 부스들은 다 사기꾼들이다, 시내보다 엄청 바가지 씌워서 환전해 준다, 내가 택시 기사인데 좋은 호텔을 소개 해 주겠다, 뉴델리 시내에 있는 호텔로 소개해 줄 거고, 호텔에서는 정상적으로 환전을 해 준다, 달러로 계산 해도 아무 문제 없고, 자기가 아는 호텔이 많으니 자기가 싸게 깎아 주겠다, 물론 내일 아침에 밖에 나가면 바로 시내 구경을 나갈 수도 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그를 따라 나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 귀찮은 놈을 어떻게 떼 낼까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일단 퀘퀘한 냄새 나는 침울하고 지저분한 공항 내부를 벗어나 맑은 공기를 좀 쐬고 싶어서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꺼내 무니까, 그 녀석이 거기까지 따라와서 담배 하나만 달란다. 대꾸도 하기 싫어서 아무 말 없이 담배를 줬다. 그랬더니 또 아까 했던 말들을 그대로 다시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듣고 있기 짜증나서 말을 중간에 끊고 다짜고짜 '내가 널 어떻게 믿냐?'라고 한마디 툭 던져 줬더니, 저 멀리 모여 있던 자기 동료 택시기사들을 모조리 불러 내 앞에 세웠다. ‘얘는 핫산이고, 얘는 후세인이고, 얘는 마호메드고...’ 그 즘 되니 참 기가 막혀 어이가 없었다. 일단 소개를 시켜 주니까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는 나도 좀 정신이 나간 상태였고.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하며 어안이 벙벙했지만, 한 편으로는 '너 참 애 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들이 앞에 서 있으니 흥이 났는지 이젠 친구들 신상명세에, 가족관계 브리핑을 들어가 주신다. '쟤, 핫산은 밤일이 부실하다고 부인이 돈이나 벌어 오라고 내 쫓아서 맨날 야간 근무만 뛴다'라는 말이 나올 때 즘, 갑자기 나도 모르게 '그래, 가자'라고 내뱉어 버렸다. 피곤한데 관심도 없는 말들을 들으니 짜증도 났고, 게다가 아까 2층의 visitor's lounge 꼴을 보니까 거기 들어가서 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서 다시 돌아가기도 싫었다. 일이 안 되려면 어디에 홀린 것처럼 그렇게 멍청하고도 이상한 짓을 하게 되나 보다. 지금 생각해 봐도 대체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5.
 자기 이름이 '바자르'라고 소개한 그 택시기사는, 마흔 살 정도였던 걸로 기억된다. 겉보기엔 그보다 십 년은 더 늙어 보였지만, 자기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수 밖에. 얼핏 봐도 왜소하고 늙어 보여서,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내가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어서 어디 들어가 몸을 좀 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비행기를 비롯한 기름을 연료로 사용하는 모든 탈 것에 멀미 증상을 보이는 나로써는, 여섯 시간의 비행에 이미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축 늘어져 버렸으니까.
 
 택시도 탔으니 잠시 눈 감고 쉬고 싶었지만, 이 바자르라는 녀석이 도무지 가만히 놔 두질 않는다. (나이가 나보다 많으니 원칙적으로는 존칭을 써 줘야겠지만, 그날 내게 한 짓을 생각해서 앞으로 이 '바자르'라는 놈에게 존칭은 쓰지 않겠다.) 자기 택시는 국가에서 인증해 준 정식 택시라며 인증서를 보여 줬고, 관광객 친절히 모시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며 그 인증서도 보여 줬으며, 종교의 율법에 따라 성실히 일 하는 사람이라며 10계명이 적힌 종이도 보여 줬다.
 
 그 외에도 무슨 인증서와 문서들이 그렇게 많은지 일일이 그걸 내게 보여주며 설명 해 줬는데, 심지어는 최근에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받은 영수증과 택시 운행 일지, 출납 장부와 면허증, 차량 등록 문서, 신분증 등도 마구 보여 줬다. 아주 신이 났다, 신이 났어. 보여준 분서는 힌두어로 적혀 있어서 알아볼 수 없는 문서가 태반이었다. 영어로 적힌 문서도 있었지만, 꼼꼼히 읽어볼 정신이 아니어서 대충 읽는 척 하고 돌려 주었다. 내친 김에 딸 사진도 보여 달라고 하니까 굉장히 기뻐하며 보여 줬는데, 보자마자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기 충분했다. 그래도 프리티(pretty)라고 해 주긴 해 줬지만.
 
200루피로 시내까지 태워 주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택시기사 바자르는 결국 어느 여행사 앞에 차를 세웠다. 뭐라 할 새도 없이 시동을 끄고는 먼저 내려서는 들어가자고 이끌었다. 나는 피곤해서 여행사 같은 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짜증을 냈지만,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택시회사 규정이 원래 그래서 여행사에 꼭 들렀다 가야 한다며, 일단 잠시 들어갔다 나오면 시내로 데려다 주겠단다. 너무 짜증이 나서 그럼 차라리 다시 공항으로 가자고 말 하며 버텼지만, 꿈쩍도 안 하고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지껄인다. 큰 길 가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니 그냥 뿌리치고 나와서 다른 택시를 잡아 타도 됐지만, 나는 또 멍청하게도 짜증을 내면서 여행사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6.
 이 야밤에 불 켜놓고 영업하는 여행사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심스러운 곳이었다. 여행사 안에 들어가니 잡무를 보는 남자아이 하나와, 딱 보기에도 나 사기꾼이요 하고 써 붙은 능글맞은 웃음으로 반겨주는 한 아저씨가 있었다. 나와 택시기사가 들어가니 일단 앉으라며 차를 내 오고, 뒤쪽에선 문을 딱 걸어 잠그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쉽게 빠져 나가긴 어렵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여태까지 내가 했던 그 모든 행동들을 모조리 후회하며 대체 왜 그랬을까 하고 자책감에 빠졌다.
 
 어쨌든 택시기사는 사무실 한 쪽 구석의 소파에 누워 잠을 자기 시작했고, 능글맞은 아저씨는 나를 앞에 앉혀 놓고 패키지 여행 상품에 대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참 웃기는 상황이다. 자정이 지난 이 야밤에 도착한 여행자라면 당연히 피곤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사람을 붙잡고 여행 상품 얘기를 하다니. 어쩌면 그렇게 피곤한 상태인 사람을 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아무리 말 해도 귀에 안 들어 온다고, 일단 자고 내일 얘기하자고 해도 막무가내다. 패키지 상품 말고는 그 어떤 말도 무시해서 먹히질 않는다. 이 즘 에서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갔어야 했는데, 맥이 탁 풀린 상태여서 그럴 의욕도 나지 않았다.
 
 ‘India travel agency’라는 간판이 내 걸린 이 여행사의 능글맞은 직원이 내게 팔아 먹으려고 애 쓰는 여행 상품은, 어떻게 보면 혹 할 수도 있는 상품이었다. 오늘밤 델리 시내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버스로 스리나가르로 가서, 그 곳 수상가옥에서 3일간 숙박을 하며 식사도 제공하는 조건으로 250달러라는 가격을 제시한 것이다. 교통비와 숙박비까지 포함해서 그 가격이면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시간에 이런 식으로 속여서 끌고 온 손님에게 정직한 여행 상품을 제공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 즘 돼서는 끝까지 버텨주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져서, 나도 슬슬 그 상황을 즐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장사를 하루 이틀 하는 게 아닌 모양인지, 빙빙 말 돌려가며 했던 말 반복해서 계속 하며 사람 지치게 만드는 솜씨가 아주 수준급이다. 내가 아무리 관심 없다, 필요 없다 해도 이상한 쪽으로 말을 비틀고 돌리며 결국엔 여행 상품으로 화제가 원위치 되었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사람을 지치게 해서 자포자기 하게 만들어 돈을 내게 만드는 것이 수법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없는 돈 탙탈 털어서 여행 하는 실정이라, 돈 한 푼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서 나도 대응하기 시작했다. 여행상품에 관심 있는 척 하면서 계약은 하지 않고, 그 사람과 똑같이 말을 빙빙 돌리고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작전으로 나갔다. 소위 맞불작전.
 
 나: 가격이 좀 비싼 것 같지 않아?
 능글아저씨: 델리도 인플레이션이 심해. 일 년 사이에 가격이 엄청 올랐다구.
 나:그래? 그럼 이 가격이 적당하다는 말이네?
 능글아저씨: 그렇지, 우린 정부에서 인증 받은 여행사야.
                  India tourist Friendship이라고, 인도에 여행 오는 관광객들을 친절하게 대해 주고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단체지. 그래서 밤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거고.
 나: (말은 그럴 듯 하게 하네) 그렇군, 저 벽에 걸린 게 정부 인증서구나?
 능글아저씨: 그래 맞아, 어때 이제 신뢰가 가지?
 나: 그래, 이제 신뢰가 가네. 근데 가격이 좀 비싸지 않아?
 능글아저씨: 아까 내가 말 했잖아, 인도 물가가 많이 올랐다고.
 나: 그렇구나, 그러면 너두 가족들 먹여 살리기 힘 들겠네?
 능글아저씨: 그렇지 뭐. 그래서 나도 이렇게 야근 해서 돈 버는 거잖아.
 나: 아, 그렇구나, 돈 벌기 힘들겠다.
 능글아저씨: 그래도 이렇게 노력해서 먹고 사니까 괜찮아.
 나: 그래 그런 자부심을 가져야지. 근데 가격이 너무 비싸지 않아?
 
 대충 이런 식으로 얘기를 끌고 나가면서 어느덧 대화의 주도권은 내게 넘어왔다. 능글아저씨는 중간에 몇 번 자기 보스에게 전화를 한다며 어딘가로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끝날 때마다 가격이 내려갔다. '넌 행운아야, 오늘 밤만 적용되는 특별 할인가라구. 너 인상이 좋아서 내가 보스에게 특별히 부탁한 거야.'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결국 패키지 상품의 가격은 처음 250달러에서 210달러까지 내려갔다.
 
 그 사이에 이 사람의 입에서는 끊임없는 거짓말이 나왔다. 백 달러로는 인도를 일 주일도 여행할 수 없다는 둥, 지금은 축제 기간이라 시내 호텔이 모조리 꽉 찬 상태라는 둥, 델리에서는 어디를 가더라도 50달러 이하의 숙소는 구할 수 없다는 둥. 아예 여행 정보가 하나도 없는 상태로 왔다면 속아 넘어갈 정도로 정말 그럴 듯 하게 말을 해 댔다. 그것도 말을 막 몰아쳐서 달달 볶아가며 템포를 늦췄다 높였다 하는 대화 수법을 구사했다.
 
 능글아저씨: 어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이건 정말 너한테만 주는 특별가라구.
 나: 근데 나 지금 현금 백 달러 밖에 없어. 내일 아침에 카드로 출금해야 하는데.
 능글아저씨: 그럼 일단 백 달러 먼저 주고 내일 아침에 나머지를 주면 돼.
 나: 세상이 좀 험하잖아, 돈만 먹고 내일 돼서 난 모른다 그러면 어쩌니?
 능글아저씨: 우린 국가에서 인증 받은 공식 여행 업체야. 내가 영수증 써 주께.

 나: (또 반복이군. 그렇다면 나도 또 해주지) 그래, 그런데 가격이 좀 부담되네.
 능글아저씨: 아니 벌써 40달러나 깎아 줬잖아!
 나: 난 돈 없는 가난한 여행자라구. 돈이 별로 없어.
 능글아저씨: 안 돼, 이 가격에서는 더 이상 못 깎아, 절대로.

 나: 그런 건가? 근데 그 보스라는 사람은 이 밤에 잠도 안 자?
 능글아저씨: 인도에 프랜드(나를 계속 프랜드라 불렀다)가 왔으니 자다가도 깨야지. 우리는 너를 소중히 여기고 환영하고 있어.
 나: 아, 그렇구나. 그럼 좀 더 싼 가격에 줄 수 있겠네?
 능글아저씨: 여기서 더 이상은 정말...

 나: 차 맛있다. 이거 향이 독특한데? 귀한 거지? 좀 더 마실 수 있을까? (향이 좋은 차였다. 차 맛은 인정해 주겠다.)
 능글아저씨: 이거 꽤 비싸고 귀한 거야. 특별히 프랜드가 왔을 때만 조금씩 대접해 주는 거야. 넌 특별하니까 좀 더 주도록 하지.
 나: 그래, 난 특별하니까 차 주면서 가격도 좀 더 생각해 봐 줘.
 능글아저씨: ...!
 
 이젠 거의 밖으로 나간다는 건 포기하고, 니가 먼저 지치나 내가 먼저 지치나 한 번 해 보자고 맘 먹고 나도 필사적으로 덤비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데 안 지칠 사람은 없다. 그래, 여태까지 나 지치게 했으니까 너도 한 번 똑같이 당해봐라!
 
 사회생활 하면서 배운 수많은 나쁜 것들 중 하나였다. 사람들 중에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말을 하면서 갑갑하게 말을 해서 다른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자기 스스로 아주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 하면서. 그런 사람들과 맞서기 위해 터득한 말 기술 중 하나가 바로, 상대의 논리와 똑 같은 논리로 대응해 주기이다. 그러면 보통 대화는 말꼬리잡기가 돼 버리는데, 그 상황에서는 오래 버티면 이기게 돼 있다.
 
 이 능글아저씨는 좀 더 내린 가격을 제시했다. 오늘밤 호텔 대신 여행사 소파에서 자고, 내일 아침 바로 버스 타고 떠나는 조건으로 170 달러에 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젠 더 이상 기가 막히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았다. 계속 흥정하면 어쩌면 1 달러로 해 주겠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난 다시 따져 묻기 시작했다. 아까 오늘 밤 호텔 숙박비가 150달러라고 해 놓고는, 호텔에 안 묵는데 왜 40달러밖에 안 깎아 주느냐고. 이 즘 되니까 이 능글아저씨도 얼굴에 짜증이 가득 떠오르면서, 대화 초반의 그 능글맞은 웃음은 온데 간데 없었다. '오 마이 프랜드', '마이 프랜드'하면서 친한 척 하는 행동도 이제 거의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이 아저씨 측에서 나를 귀찮아 하는 기색이 보였다.
 결국 이 아저씨는 느닷없이 갑자기 내게 ‘넌 지금 내 시간과 네 시간 모두를 낭비하고 있어!’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승리! 일단 여기서의 작은 전투에선 내가 승리했다. 난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럼 나 다시 공항으로 데려다 줘. 난 내일 태국 갈래. 너 때매 인도 이미지 다 망쳤어.' 라고 말 하며 일어섰다.
 
 능글아저씨도 이젠 다 포기하고 소파에 자고 있던 택시기사 바자르를 거칠게 발로 차 깨워서는 빨리 데리고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바자르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부시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 시동을 걸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3시. 여행사에 들어올 때가 12시 반 정도였으니까, 두 시간 반 동안 패키지 상품 하나 놓고 실랑이를 벌였던 것이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운이 쭉 빠지면서 잠이 쏟아졌다. 여행사에서는 위기를 모면했지만, 난 또 멍청하게도 아무 생각 없이 나를 여기로 데려 온 택시에 타고 말았다. 아예 기세를 몰고 나가 큰 길로 나가서 다른 택시를 탔어야 했는데.
 
 
 
7.
 다시 운전을 시작한 바자르는 시내의 저렴한 호텔로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저렴한 호텔이라며 50달러 정도라고 한다. 여행 오기 전에 얼핏 주워 들은 인도 숙소 가격과는 너무 차이가 났다. 그 때 즘엔 벌써 사태가 파악된 상태였다. 이 녀석이 내게 사기 치려고 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 바로 이 녀석인 것이다. 호텔로 데려다 주겠다는 말에, 무조건 공항으로 다시 가자고 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어느 호텔 앞에 택시를 세우고는 나를 내리게 했다.
 
 호텔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모텔 수준도 안 되는 허름한 시설이었다. 그래도 호텔이라고 문 앞에 호텔보이가 서 있다가 내 짐도 들어주고 그런다. 이제 내 몸 상태는 어디 주저 앉으면 바로 잠 들 것 같은 상태였다. 누가 내 짐을 들고 도망친다 해도 쫓아서 달려갈 기운도 없는 상태. 그래서 이왕 호텔까지 온 거 바가지 좀 쓰더라도 그냥 오늘밤은 여기서 자는 게 낫겠다고 이미 자포자기 하고 말았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택시기사 바자르가 뒤에서 날 잡더니 속삭인다. '지배인이 80달러를 부를 거야. 근데 여기 50달러면 되거든. 무조건 깎아.' 일말의 양심이 남았던 건가? 고양이가 쥐 걱정 해 주는 꼴이다. 기가 차서 피식 웃었더니, 좋아서 웃는 줄 알고 이 녀석 기분이 좋아져서는 '오 마이 프랜드, 아임 해피. Oh my friend, I'm happy.'라며 크게 웃는다. 시트콤도 아니고 어이가 없다, 정말.
 
 바자르가 말 해 준 것처럼, 호텔 지배인은 처음에 80달러를 불렀다. 옆에서 바자르가 얘는 내 친구니까 싸게 해 줘 하니까, 단번에 50달러로 가격이 내려갔다. 내가 '그것도 비싸'라고 말 했더니 값이 또 45달러로 내려갔다. 더 이상은 안 된다라는 말과 함께. 나도 더 이상 흥정하고 어쩌고 하기가 싫어서 그 가격으로 하자고 했다.
 
 이 호텔에 묵기로 한 것 자체가 실수였지만, 호텔비라도 내일 아침에 환전 해서 주겠다고 했어야 옳았는데, 난 덜컥 100달러 짜리 지폐를 꺼내 주고 말았다. 지배인은 호텔비 제하고 환전 해 준답시고 거스름 돈으로 2000루피를 내 줬다. 환률을 몰랐지만,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제 더 이상 따지고 어쩌고 할 기운이 없어서 한 번 노려봐 주는 것으로 끝 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미화 백 달러는 인도 돈으로 4600루피 정도였으니 정상적으로 얘가 환전 해 줬다면 최소한 800루피는 더 줘야 했다.)
 
 계산 다 끝내고 호텔보이가 내 가방을 들고 방으로 안내 해 주겠다며 앞장서서 올라갔다. 이 때 바자르가 내게 택시비 500루피를 내란다. 중간에 여행사 들러서 시간도 많이 지나고 했으니 그 정도는 받아야겠단다. 처음에 200루피로 계산을 끝 낸 택시비가 500루피로 오른 것이다. 내가 들르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뻔뻔하게 요구할 수 있다니 정말 이 놈의 나라는 대체 어떻게 된 건지 화가 나서 욕이 막 쏟아지려 했다.
 
 방까지 잡히자 이제 그만 다 끝내고 올라가서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 먹고 죽어라'하며 오백 루피를 던져 줬다. 그랬더니 실실 웃고 좋아하면서 내게 또 말을 건 냈다. '한국 담배 좋던데, 그거 한 개비만 더 주면 안 될까?'. 뻔뻔함도 이 정도면 가히 예술이다.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지막이 한 마디 해 주고는 내 방으로 올라갔다. '이제 꺼져, 씨발놈아'.
 
 
 
8.
 
 호텔방은 역시 밖에서 보던 것과 별 다를 것 없이 허름하고 지저분했다. 그나마 침대 시트는 깨끗한 편이었고, 에어컨도 있었다. 짐을 들어준 호텔보이가 냉큼 밖으로 나가지 않고 쭈뼛쭈뼛 서 있는 걸 보니 팁을 원하는 것 같았지만, 그날 밤 당하고 뜯긴 것 생각하니 다들 한 패로 밖에 안 보였다. 문 앞에서 내 가방을 받아 들고는 '나가!'라고 빽 소리치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밤이지만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땀이 많이 흘러 온 몸이 끈적끈적했다. 일단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갑자기 문득 인도 여행 포스터가 아른아른 떠올랐다. 한국에서 인도 비자를 받으려고 갔던 인도 대사관의 벽에 붙어 있던 그 포스터. 화려한 사진 아래쪽에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Incredible India'.
 
 최근 인도를 소개할 때 자주 나오는 글귀였는데, 인도 관광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수식어인 듯싶다. 관광을 위해 한국을 홍보할 때 ‘Dynamic Korea’같은 표현을 쓰듯이. Incredible India라는 말이 떠오르자 갑자기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인도라는 나라 앞에 정말 잘 갖다 붙인 수식어다. 좀 더 일찍 그 깊은 뜻을 파악했더라면 좀 더 조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아예 안 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 인도는 정말 '믿을 수 없는(Incredible)' 나라였다. 그 ‘Incredible India’라는 표현은 홍보용이 아니라, 경고였던 것이다!
 
 그날 밤에 털린 돈은 약 70달러. 한국 돈으로 약 7만원. 인도에서 하룻밤에 쓴 돈 치고는 굉장히 많은 편이다. 사기 당했다는 결론 밖엔 나오지 않는 금액. 그 돈도 아깝고, 사기꾼 녀석들에게 당한 것도 분하고, 바보같이 당하고 있었던 나 자신도 한심했다. 인도를 아름답고 신비롭다고 온갖 아름다운 수식어로 예찬했던 류시화 씨와 법정 스님이 미워졌고, 인도를 아름답게 표현한 모든 사람들이 미워졌다. 이 따위 나라에 있지 말고 내일 당장 비행기 잡아 타고 태국 쪽으로 가버리자 라는 생각도 들었고, 내일 칼 하나 사 들고 여행사 찾아갈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한동안 잠 들지 못했지만, 워낙 피곤했던 탓인지 어느새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www.emptydre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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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빈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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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통 2012.02.08 2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처음은 다 이런가요 ㅠㅠ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ㅎㅎ 첫날은 호텔예약하라고 그러던데 정말인가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