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짝달싹 하기 싫은 겨울.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함께 꽁꽁 얼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느즈막이 점심 먹으러 갔더니 평소보다 꾸물거리며 반찬은 고사하고 수저도 안 챙겨주는 아줌마. 장사하기 싫으면 됐다고 말 하고 나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회사차를 그 식당 앞에 자주 주차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주일에 두어번은 먹어줘야 하는 상황. 꾹 참고 밥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수천년 묵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찰나, 나는 깨달아버렸다. 이번 설날 휴일은 꽤 길다는 사실을!
 
그래 내 영혼에 숨결을 불어넣어 줘야겠어! 이대로는 도저히 갑갑해서 더이상 안 될 것 같아. 라는 외침이, 저 아래 어두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용암처럼 용솟음 쳐 나오기 시작. 이미 상황은 엎질러진 화산. 참을 수 없어, 견딜 수 없어, 미룰 수 없어,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어.



근데, 어디로 가지? 아직 완전한 휴가를 받아놓은 상태도 아니건만, 휴가 안 주면 회사 관두면 되고~라는 아주 바람직하고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발상으로 여행지 찾기에 돌입! 점심먹고 졸리는 눈꺼풀 껌뻑껌뻑거리며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적당한 여행지는 생각나지 않고. 이러다가 그냥 두리뭉실 무산되고야 말겠지 라는 생각에 이를 때 쯤, 결단을 내렸다.

랜덤여행. 예전에 벽에 세계지도 붙여놓고 다트 던져본 적은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세계지도는 아시아가 중심에 위치한다는 한계가 있다. 웬만큼 다트 실력이 미천하지 않은 이상, 본능적으로 중심 쪽으로 던지게 되는데, 그래서 거의 항상 아시아로 낙찰된다는 말씀. 그래서 이번엔 조금 다른 방법을 택했다.



메신저로 여러명 말 걸어서, 가장 빨리 응답해 주는 사람 둘에게 '위도'와 '경도' 불어보기. 그걸 조합하면 내 여행지 탄생!

그런데 위도와 경도라는 것을 미리 알게되면 답변하는 사람의 범위가 축소되니까, 최소한 그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한 장치를 했다. 즉, 위도는 숫자 0에서 180까지 중에 하나를 택하라 하고, 경도는 숫자 0에서 360까지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만 알려주는 것. 그에 따른 계산식도 나름 세웠다.



+ 위도 산출 : 위도는 적도가 0 이므로 아래와 같은 계산식이 필요하다 
* x = 0~180 중 숫자 하나.
* (x < 90) 일 때, 위도 = 90 - x (남위)
* (x > 90) 일 때, 위도 = x - 90 (북위)


+ 경도 산출: 경도는 동경, 서경으로 나누어지므로 아래의 계산식 정립.
* x = 0 ~ 360 중 숫자 하나.
* (x < 180) 일 때, 경도 = x (동경)
* (x > 180) 일 때, 경도 = x - 180 (서경)



나도 수학식 나오면 딱 귀찮아지지만, 그래도 나름 조사(?)의 공정성과 정밀성을 높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장장 삼십 초라는 엄청난 시간을 들여 만든 수식. 대강대강 얼기설기 만들어놓고 조사 돌입!



경도를 묻는 장면



위도를 묻는 장면





경도의 숫자는 324가 나왔고, 위도의 숫자는 3이 나왔다.

이 조사의 과정도 상당한 인내심과 조심성이 투여되어, 장장 15초 만에 완료.
자, 이제 미리 세워둔 계산식에 따라 계산을 해 볼 차례.


경도: 324 - 180 = 144 (서경)
위도: 90 - 3 = 87 (남위)


자 그렇다면, 남위 87도, 서경 144도는 어디냐~!! 두둥~~!




남극이라니.............. 털썩


아, 이건 어떻게 좀 조정해 볼 수도 없다. 위도가 남위 87도가 나와버렸으니, 경도가 어찌되든 남극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상황! 그럼 쿨하게 그냥 남극 고고씽? 나도 그러고 싶지만... 흐흑! (남극 가는 배가 있긴 있나? 참치잡이 배에 비행기값 줄테니 태워 주세요 하면 되려나?)



아, 아무래도 이건 아니야. 나중에 세상이 좋아지고 좋아지면, '나, 이번 여름휴가로 남극가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아직은 그런 시대가 아니야. 아직 우습고도 미개한 지구인의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남극같은 곳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시대. 아아, 나의 좌절을 후세들아 슬퍼해 달라.  

어쨌든 얻어낸 데이터 값으로 만족스런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애초에 가정에 문제가 있었어 혹은, 수식에 문제가 있었어.

원래 논문같은 것도 데이터 나오는 것에 따라서 수식을 바꾸고 조작(?)하고 하지 않는가. 우리시대 과학이란 종교는 그런 것. 결과가 아름다우면 모든게 아름답다는 세상의 논리. 그래서 과감하게 수식을 버리기로 결정!



그래도 나름의 체계는 있어야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되니까, 다음과 같은 체계를 다시 정했다.

위도: 이미 나온 숫자 3 을 활용해서, 남위3도, 북위 3도 중 적당히 선택.
경도: 324라는 숫자가 나왔으니, 일단 (324 - 180 = 144) 를 해서,
        동경 144, 서경 144 중 적당한 좌표 선택.

이런 논리적이고도 체계적이고도 복잡다단하면서도 고도의 기술집약으로 이루어진 수식체계를 다시 정립. 그래서 이제, 위도는 '남위 3, 북위 3' 이 나오고, 경도는 '동경 144, 서경 144'가 나왔다. 만세!

이 좌표를 따라서 몇 군데 찍어보고, 적당한 곳을 찾으면 된다는 말씀! (똑똑해!)



자 그럼 지도에서 한 번 찾아볼까~




이건 참...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떡하니 나오니 할 말이 없다.

서경 144도에서 남북으로 위도 3도는 완전 죽음의 늪이다. 어쩌면 이곳이 바로 내 친구들이 진심으로 바란 곳일 지는 모른다. '너, 바다로 가서 밍크고래나 좀 잡아오지 그래?!' 이런 거.

아 그래, 나도 그러고 싶다고. 나도 백경을 읽었고, 가을비 내리는 음산한 계절에 작살을 챙겨서 바다로 떠나고 싶은 꿈을 꾸기도 했다구. 하지만 결정적으로 여기까지 갈 차편이 없으므로 무효. 누가 땟목이라도 좀 사 주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형편.

태평양 안마당은 나중에 UFO가 나를 태우러 오든지, 나중에 돈 벌어서 요트를 사든지 해서 여유 생기면 할랑할랑 가기로 하고, 일단은 포기. 나중에 요트가 생기면 저 어딘가에서 무인도를 찾아내, 속세와 인연을 끊고 혼자 잘 살아갈지 몰라도 일단 지금은 아냐.  깨끗하게 포기하고, 그럼 다른 곳을 찾아보자!





네 개의 조합이 있었지만, 세 개는 모두 바다 한 가운데. 그나마 육지가 보이는 곳은 딱 한 군데 뿐. 한 군데라도 나왔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지경. 사실 이런 식의 좌표 선택은 바다로 떨어질 확률이 아주 높다는 것,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한 군데는 흙이 있을만 한 곳을 가리키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 

그곳의 좌표는 동경 144도, 남위 3도.
여기가 어디냐면, 대략 파푸아뉴기니 앞바다. OTL
파푸아뉴기니...

예전에 영어몰입교육이다 뭐다로 한창 시끄러울 때, 이외수 씨가 '영어에 몰입하지 말고, 차라리 파푸아뉴기니 어를 배워라'라고 말 해서 잠깐 관심 끈 곳. 그런데 공교롭게도 파푸아뉴기니 공식 언어는 영어였고. 
 
어쨌든 그나마 뭔가 올라설 땅이 보이므로 확대.





이 지점 주변으로는 뭔가 마을도 있고, 섬도 있다. 오오, 이것이 바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 신화, 이야기 등에 등장하는 그 운명이라는 것인가! 우연히 알게 된 좌표를 찾아 떠났더니 그곳에서 엘프를 만났어요, 그런 이야기? 혹은 우연히 본 좌표를 따라갔더니 보물이 있어서 엘프를 샀어요, 그런 이야기? 혹은 우연히 만난 좌표 암호를 해독하여 주문을 외웠더니 엘프가 나타났어요, 하는 이야기?

근데 파푸아뉴기니라니... 이거 거의 안드로메다로 가라는 말처럼 들린다.
파푸아뉴기니 갈 수는 있는 건가? 우주선 타고 우주정거장 거쳐서 가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무슨 비행기 타고 또 갈아타고 갈아타고, 배로 갈아타고 갈아타고 등등 해서, 가는 데 한 십이억만 년 정도 걸리는 건 아니겠지?

아 이거 뭔가 운명인 것 같긴 한데, 가만히 지도를 보고 있으려니 참, 뭔가 갑갑하네.



그래도 이렇게 지도에 나온김에 파푸아뉴기니를 대충 조사해봤더니, 나름 흥미가 가는 곳이기도 하다. 일단은 독립국이긴 한데, 영국 여왕을 명목상의 왕으로 두고 있는 나라. 실질적인 국가 운영은 총리가 하지만 어쨌든 형식상으로는 입헌군주제. 

공식언어는 영어인데, 파푸아뉴기니 원주민 언어를 공용어로 인정하고 있다. 독립한 때는 1975년. 서양인들이 이 섬에 침략하기 시작한 19세기 이전의 역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한다. 더 찾아보면 이것저것 많이 나오긴 하지만, 대략 이 정도로도 충분히 특이하고도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러고보니 파푸아뉴기니 옛날에 들어본 적 있긴 하다. 대학때 문화인류학 수업시간 때, 카고 의식(cargo cults)이라는 것으로 들어봤다. 아주 단순히 말하자면 하늘에서 비행기가 날아와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길 바라고 염원하는 의식을 지내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비행기로 날라오는 화물들은, 사실은 영혼의 세계, 혹은 저 아스트랄 한 4차원 세계 어디선가에서 자신들이 받아야 할 것들을 유럽인들이 가로챈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들에게 신이 직접적으로 엄청난 화물들을 날아올 것이라는 일종의 종교. 물론, 이런 줄기에서 변형된 것들도 여럿 있다.

이런 현상의 주 원인은, 미개한 문명에 어느날 갑자기 느닷없이 찾아든 19세기 서양 문화에 대한 쇼크 때문이라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학자들의 의견이 있었다. 그리고 이걸 문화인류학, 문화사회학 등으로 이렇게 저렇게 조명하고 해석하고 연구하는 등의 텍스트가 있었는데... 나름 시험 본다고 달달 외우긴 했지만 이제 시험 안 보니까 다 까먹어버린 지식들. 오오, 그 오래된 추억의 장소를 이렇게 뜬금없이 다시 만나다니! 운명이 맞긴 맞나보군.



어쨌든 이렇게 랜덤여행의 행선지가 정해졌다. 물론, 진짜로 갈 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일단은 세상 문제의 98% 이상을 차지하는 금전 문제도 있고, 시간 문제가 있다. 그것만 어떻게 시원하게 해결돼도 가능성은 높아지겠건만. 아, 물론 나머지 자잘한 문제로, 의지박약, 귀차니즘, 말라리아 공포, 그리고 비자 문제 따위가 있다. 여담인데, 찾다가 보니 파푸아뉴기니 여행 비자는 평생 딱 두 번만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거, 아무렇게나 받아놓고 안 가면 나중에 엄청나게 후회할 지도 몰라. 흑흑.

여러분들이 모금해서 비행기 표 끊어주면 꼭 가겠음. 혹시 돈은 많은데 시간이 없거나, 소심해서 이런데 가기는 두렵지만 갔다온 여행기는 정말 보고싶다 하시는 분은 연락 바람. 보내주면 여행기는 꼭 올려 드리겠음. 남들이 인정하는 이른바 시니컬 문체로 아주 냉랭하게 써 드리겠음.



그래서 결론은, 여행 바람 불었다는 것. 어디로든 떠날 테다!!!

Posted by 빈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