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용히 벚꽃 만발한 길을 걷고 있었다. 샴페인처럼 투명한 아침의 향기가 시큼하게 코 끝을 스쳤다. 이른 아침 이슬비처럼 벚꽃은 황홀한 바람에 춤 추듯 날아다녔고, 어디선가 들려온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은 우리의 뺨을 스치며 빈 공간에 수를 놓았다. 

저기 언덕 아래로 펼쳐진 바다. 넘실대는 색색깔의 파랑 위로 갑자기 뛰어든, 파도를 타고 질주하는 벚꽃잎 하나. 무심코 그 궤적을 따라가다 문득 마주친 그녀의 눈. 그 눈빛이 어떠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 시선을 피해 저 너머로 눈길을 옮겼을 뿐.

마침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한 아침 햇살이 그녀의 하얀 목덜미 위에서 아스라이 부숴졌다. 벚꽃처럼 흩날리던 단발머리 적갈색 고운 머릿결. 그 너머 무심히 이제서야 잠을 깨던 하얀 얼굴의 목련. 붉게 흩날리던 바람 속에서 단아하게 웃음짓던 그 하얀 목련. 아침의 고요 너머 밝아오는 봄볕에 우리의 꽃길은 그렇게 흐드러졌다.



불현듯 떠오르는 사랑의 기억. 느닷없이 찾아온 오래된 빛바랜 추억이 그렇게도 뜬금없이, 무심코 툭 던진 돌멩이처럼 날아들어 내 머릿속에 선명한 파문을 만들었다. 큰 의미도 없는 어느 여행지 길 모퉁이 오래된 그림엽서처럼, 심심함에 휘갈겨 끄적거린 짧고 단순한 찢어진 메모처럼, 그 기억은 그렇게 갑자기 툭 하고 내 앞에 떨어진다. 그럴때면 낮게 깔린 햇살 속에 또아리를 틀고 먼 산을 멍하니 응시하는 게으른 고양이처럼, 어디선가 날아든 나비같은 추억에 시선을 고정하며 몸을 웅크리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본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끝났는지도 희미하다. 어디를 어떻게 갔고, 어떤 이야기로 어떤 시간을 함께 보냈는지도 먼 하늘 아지랑이처럼 아득하니 가물가물하다. 심지어는 얼굴마저 희미하게 지워져서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고, 또 그 기억이 대체 누구와 함께 있었던 일이었는지 가물가물 할 때도 있다. 어떻게 보면 참 슬픈 일이지만, 그렇게 사랑의 순간은 사람을 잊고 추억만 남을 때도 있다.

그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봐 넘겼던 모습들이 오롯이 떠오르며, 기억나지 않는 얼굴의 표정이 또렷이 떠오른다. 어떤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는지, 어떤 신발을 신고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향기가 감돌고 있었는지, 어떤 분위기의 공간이 연출되고 있었는지, 마치 어제 일 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분명히 그 때 나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었을 텐데, 그런 것도 보고 있었나 싶을 정도의 세세한 것들이 마구 떠오르는 이상한 기억. 정말 이것 모두가 나 자신의 기억이 맞는 건지, 아니면 후에 다른 기억들이 섞여서 이상하게 왜곡된 건지 헷깔리는 난감한 기억. 큰 줄기는 그 때가 맞고, 또 그 상황이 맞는데, 그렇다 치더라도 어째서 지금 이렇게 느닷없이 떠오르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참 이상한 기억.



따가운 햇살을 스치는 바람으로 비켜 맞으며, 빠이(Pai) 외곽을 스쿠터로 달리며 드라이브를 즐기던 중이었다. 태국 북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상식 가옥 아래로 초록 가득한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뒤로는 나즈막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산들이 옥빛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하늘색 연못 위에 잠자던 구름에, 물고기가 만든 파문이 하나 총총 퍼져갔고, 하늘만큼이나 높은 야자수 사이로 햇볕이 구슬처럼 방울방울 흘러 내리던 길이었다.

에스(S)자 길이 끊임없이 반복되던 그 낮은 산길 어느 모퉁이를 돌다가 문득, 그 오래된 기억이 내 머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스쿠터의 따가운 소음은 귀에서 멀찌감치 뒤로 사라졌고, 이국의 경치를 보아야만 한다는 강박도 저 뒤로 날아가버렸다.

이내 논밭은 바다로 변하고, 야자수는 벚꽃으로 변하고, 계절은 봄으로 변했다. 마치 지금 여기가, 그날 그 곳인 것 처럼. 조금만 더 달려가면 그 장면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처럼. 아직 늦지 않은 것 처럼, 아직 진행형인 것 처럼. 그렇게 기억은 선명하게 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그때 그 풍경들, 그때 그 꽃내음, 그리고 그때 불던 바람이 머리카락 한 올을 건드리던 느낌까지 생생하게 모두 기억이 나는데, 정작 내가 그때 어떤 느낌이었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 길을 걸으며 나는 무엇을 느꼈을까, 그녀의 존재에서 나는 어떤 느낌을 받고 있었을까, 그 바람, 그 향기, 그 음악, 그 꽃들 속에서 대체,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추억은 기억을 일깨워줬지만, 감각을 불러 일으켜 주지 않았다. 아직 저 깊은 어둠 속에서 잠 자고 있는 것 처럼,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조차 꿈 속의 일처럼 몽롱한 식물인간인 것 처럼, 기억의 바다 속을 헤엄쳤지만 그 속이 차가운지 따뜻한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대체 나는 무엇을 보는 걸까, 대체 나는 어떤 세계를 유영하고 있는 걸까. 문득 나는 미친듯이 궁금해졌다. 사랑의 느낌은 어떤 것이었을까. 오래되어 잊혀져버린 그 기억 속 사랑의 느낌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그 때 갑자기 그 작은 노천카페가 내 앞으로 뛰어들었다. 커브길 모퉁이 끝의 조그만 공터를 이용해 자리잡은 그 공간은, 웬만큼 주의를 기울여도 그냥 보고 스쳐 지나갈 만 한 작고 보잘것 없는 공간이었다. 화려하다거나, 소박하다거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그곳은, 딱히 관리되지 않는 듯한 공간이었다.

그저 조촐한 탁자 두어 개와, 의자 예닐곱 개 정도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을 뿐. 다른 한 쪽에 자리 잡고 있는 바 형태의 작은 음료 판매 부스 하나가, 이곳이 술이나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곳이 내게 특별하게 와 닿은 것은 마침 그런 환상같은 기억이 내 머릿속을 온통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때마침 키 작은 꽃나무에서 흩날린 꽃잎 하나가 내 콧잔등 앞으로 나폴거리며 날아든 것이 번뜩 눈에 띄었을 테다.

세상 모든 만남이 크고 작은 운명인 것 처럼, 그 작은 꽃잎도, 키 작은 나무도, 그 구석 카페도 모두 운명이었을 테다. 마치 내가 그 옛날 모국에서 멋 모르고 어설픈 연애를 시작할 때 이미, 이렇게 먼 이국 땅에서는 그 추억을 담을 공간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는 것 처럼. 



모국에서의 일상이었다면 앉기를 주저했을 만큼 지저분한 의자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낮고 작은 테이블 위에도 도로에서 날아온, 혹은 논밭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먼지들과 티끌들이 겹을 이루고 쌓여 있었다.  그 먼지의 바다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선분홍색 꽃잎들. 이내 날려가고, 또 날아들며, 머리 위를 하늘하늘 배회하던 그 얇고 가벼운 동그란 꽃잎들. 그 위로는 이내 넘어갈 듯 넘어갈 듯 아슬아슬하게 산 중턱에 걸려 있는, 붉은 빛 가득한 따뜻하고도 서늘한 햇살이 추억처럼 부드럽게 꿈을 꾸고 있었다.
  
이것이었을까, 이런 것이었을까. 사랑의 느낌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을까. 마치 수천만 년 사랑을 잃고 헤매이던 암흑 속의 방랑자처럼, 마치 수억만 년 빛을 잃고 침잠했던 심해 속의 눈 먼 물고기처럼, 아련한 빛깔에 한참을 넋 놓고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꽃이 필 때 지는 날을 두려워하지 않듯, 바람에 지는 꽃이 슬픔에 우아함을 잃지 않듯, 내려 쌓인 꽃잎이 애잔하지만 결코 추하게 나뒹굴지 않듯, 나의 사랑 또한 그러했으면 좋겠다. 나의 사랑 또한 지는 꽃잎처럼, 바람에 흩날려 멀리멀리 사라져도 그 향기 만큼은 오래오래 남아, 어느 석양 부숴지는 날 혹은 꽃잎처럼 눈비 내리는 날, 파르란 풀꽃냄새 촉촉한 어느 길 모퉁이에서, 그런 날이 있었지, 아 그렇게 아름다운 날이 있었지, 라며 씁쓸하게라도 웃을 수 있는, 그런 별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빈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