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의 몇가지 기록들.
잠은 꼭 숙소에서만 자야한다는 편견을 버리자
어떻게 찾아갔는지 기억나지 않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밤새 한 숨도 못 자고 일어났다. 어찌된 일인지, 밤에 숲 속을 거닐 때도 없었던 모기가 이 집에 다 모여 있었다.
침대 위로 모기장이 달려 있었지만, 모기장을 치면 너무 더워서 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천장에 달려 있는 팬(fan) 바람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다가 날이 밝아버렸다.
현지인 가격의 숙소라는 집주인의 말대로 집도 허름하고 시설도 아주 열악했지만, 그래도 하룻밤 자는 값으로 돈을 1,200 루피나 냈다. 대략 1만 2천 원이다. 바닷가 휴양마을인 니곰보(Negombo)에서는 시설 괜찮은 에어컨 룸을 2천 루피를 내고 있었는데, 그에 비하면 정말 가격 대비 시설이 형편 없었다.
사실 아누라다푸라는 유명한 관광지라는 이름 값으로 모든게 비쌌다. 특히 숙박과 교통수단은 다른 지역의 두 배 정도 더 비싸게 느껴졌다. 돈은 돈대로 쓰고, 잠은 잠대로 못 자고, '차라리 숲 속 유적지 바윗돌 사이에서 잠을 청할 걸' 하며 후회했다. 어서 빨리 '잠은 숙소에서만 자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해 줬던 곳이다.
허름하지만 맛있는 빵이 많아서 견딜 수 있었지
전체적으로 스리랑카 여행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는데, 그나마 위안을 받았던 것은 어딜 가도 맛있는 빵집이 한둘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빵집들처럼 외관도 내관도 깨끗하게, 청결하게 해 놓은 그런 빵집은 거의 없었다. 길 가에 엉성하게 구멍가게 차려놓고 방 구워 파는 가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가게는 허름해도 맛은 한국보다 훌륭한 빵집들이 꽤 있었다.
여러가지 빵을 종류별로 다양하게 늘어놓은 곳보다, 한 두 종류 빵만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집이 특히 맛이 좋았는데, 그런 경우엔 가격도 싼 편이라서 현지인들도 많이들 사 갔다. 특히 나가사키 카스테라 말고는 카스테라는 입에도 대지 않을 정도였던 내가, 스리랑카에서 카스테라를 다시 찾아 먹었을 정도였다.
그래도 스리랑카에 왔으니 전통 음식을 한 번 구경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냐며, 현지인들에게 물어서 식당을 찾아갔었다. 하지만 남인도 쪽과 별 차이 없는 음식들이라 금방 흥미를 잃고는, 계속해서 빵만 먹었다.
더위 탓도 있었고, 빵을 계속 먹은 탓도 있어서, 물을 많이 마실 수 밖에 없었다. 물값도 그리 만만치 않은 편이라, 틈틈이 길 가의 야자수 나무들을 둘러보고 떨어져 있는 야자열매를 줍기도 했다. 돌로 깨서 야자열매 안의 물을 물통에 담아 다녀서 약간 물값을 절약하는 방법이었다.
한 번은 그 짓(?)을 하다가 이십대 쯤 돼 보이는 서양인 여자애랑 눈이 마주쳤는데, 마치 길거리 거지 보듯 서글픈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이거 코코넛이야, 맛있어'라며, 애써 깬 야자열매 하나를 건냈는데, '소리sorry' 한 마디만 남기고 도망쳐버렸다. 안타깝다, 네가 이 물을 마셨다면 나에게 한 마리 나비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누라다푸라의 툭툭 기사들
아누라다푸라는 시내와 유적지들 사이가 꽤 떨어져 있고, 해가 떠 있을 동안은 정말 잠시 어디 피할만 한 그늘도 없을 정도로 덥고 황량했기 때문에, 툭툭(삼륜차)을 타지 않고는 도저히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툭툭기사들과 부딪히기 싫어도 어쩔 수가 없다. 더군다나 장소를 옮길 때마다 한 번씩 타야하기 때문에, 구경을 하러 다니는 이상 끊임없이 부딪힐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이 동네 툭툭 기사들이 다른 곳 보다도 뻔뻔하고 사나운 편이며, 바가지 횡포를 많이 부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든 툭툭기사들을 경계하며 무조건 요금을 깎으며, 여차하면 전투태세로 돌변할 준비를 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중생들의 허물을 감싸줄 정도의 아량이 내게는 없으니까.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런 상황에서 피해는 고스란히 조용하고 정직한 툭툭 기사들에게 돌아갔다는 거다.
'여기 툭툭기사들은 다 그래'라는 생각으로 기분이 나빠져 있는 상태니까 일단 무조건 요금을 깎았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까 기사가 요구했던 가격이 맞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툭툭기사들은 정상가보다 높은 금액을 불러 놓고는 흥정을 하려 했으므로, 그들이 요구하는 금액을 그대로 다 줄 수는 없었다. 또한 처음 흥정한 금액을 무시하고, 목적지 근처에 도착해서 요금을 더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한두번 그런 경우를 당하고 나면 더더욱 그들을 신뢰할 수 없었다.
결국 조용히 정직하게 일 하는 툭툭기사들은 깎은 금액을 그대로 받아갔고,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긁어내 보려는 툭툭기사들은 깎는다고 깎아도 최소 50루피 이상은 더 받아갔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나 저기나 악착같이 긁어 모으려고 기를 쓰고 덤비는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가져가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도 나름 노력한 만큼 가져가는 것이니, 세상 이치에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참 모호한 일이고, 씁쓸한 일이다. 그런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먹고 살 수 있다는 현실 말이다.
유적 따위 보고싶지 않아
아누라다푸라 고대도시 유적은 말 그대로 폐허였다. 고고학자들이나 혹은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감동적인 현장일 수 있겠지만, 그런 배경지식 없이 그저 산책삼아 한들한들 거니는 나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이미 세상의 멋지고 아름다운 곳들을 조금 봐 왔다는 이유로,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고 뭔가 놀라운 볼거리도 없는 이런 유적은 정말 밋밋하기 그지 없었다.
다만, 낮에 그 유적지를 거닐며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는데, 어젯밤에 깜깜한 암흑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불빛만을 의지해서 걷던 길이 이곳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는 샌들을 신고 밤에 이 길을 걷다가 바닥에 놓여있는 돌에 엄지발가락을 찧으며, 이 썩을 동네는 왜이리 바닥에 큰 돌무더기들이 많냐며 투덜거렸는데.
길가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돌조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랜 옛날 도시를 이루던 유적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사실은, 별로 큰 감흥은 없었다. 그저 '응, 그랬구나' 정도의 시큰둥한 느낌 뿐. 하지만 다시 낮은 돌턱에 엄지발가락을 부딪히면서 갑자기, '난 왜 이런 곳을 혼자서 걷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는 곳을 그저, '이곳에 왔으니 봐야만 한다'라는 의무감에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건 이번 뿐만이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수시로 느꼈었다. 그런데 여행이 이렇게 재미가 없고, 뭘 해도 시큰둥하니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게 되니까, 이제 스스로 한계에 다달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이상 이렇게는 안 된다고.
사실 여행지에서 누구나 꼭 봐야만 하는 것은 없다. 캄보디아까지 가서도 마음 내키지 않으면 앙코르와트를 안 볼 수도 있다. 거대한 유적지보다 시장에서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이 더 흥미롭다면 시장에서만 여행을 계속해도 될 테고, 각 여행지들의 하늘 모습만 궁금하다면 따로 어디 다닐 필요 없이 멍하니 누워서 하늘만 관찰하고 돌아가도 좋은 여행일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알 수 없는 의무감에 휩싸여 별로 내키지도 않는 이 폐허 사이를 발가락에 피를 철철 흘려가며 누비고 있는 걸까. 그건 아마도 사진으로든, 여행기로든, 혹은 술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로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여행을 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이미 그런 느낌을 여러번 받은 터라, 이젠 여행지에 가서도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 구도를 맞추거나, 시간을 기다리거나, 순간을 채집하거나 하는 것을 그만뒀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한가보다. 세상에, 내가 나 자신이기 위해서도 이렇게나 노력이 필요하다니. 너무 오래, 너무 많이, 타인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흔적인가보다.
다음번에는 좀 길게 여행을 떠나 볼 생각이다. 한 달이든, 일 년이든, 혹은 그보다 더 오래. 그래서 누군가 '그 오랜 시간동안 어디를 가고, 무엇을 보았느냐' 묻는다면, '그냥 여행이라는 일상을 살았을 뿐이다'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밖에 없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여행을 하고 싶다.
스리랑카에서는 지도를 바라지 말라
지도 하나 없이, 길도 있는 듯 마는 듯 한 숲 속의 폐허를 헤매어 다녔는데, 그래도 어찌어찌 중요한 볼거리는 다 봤다. 사실 숲이 그리 울창하지도 않았고, 조금 걷다보면 큰 탑이 보여서 목적지로 삼을 수 있었고, 또 그곳으로 가니까 사원이 보여서 자연스럽게 발길이 이어졌다.
유적지를 헤메고 다니다가 깨끗하게 잘 닦여진 어느 공터에 관광안내소(Tourist Information)라고 적힌 작은 판자집이 보이길래, 지도 한 장 달라고 했더니 한 마디로 '없다'하고 끝이었다. 처음엔 참 황당하고 화도 났지만, 걸어서 유적지를 거닐어보니 이유를 대충 알 만 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버스로 단체관람을 하며,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다니는 모습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패키지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가끔 보이던 외국인 배낭여행객들도 모두 론리플래닛을 들고 있었다. 딱히 따로 지도를 요청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사실 스리랑카의 현실적(경제적) 상황으로 봐서는, 여행자들을 위해 지도를 공짜로 나눠준다는 것도 좀 무리한 상황이기도 했고.
어쨌든 지도 없이 돌아다녔어도 '아바야기리 다고바(Abhayagiri dagoba)'와 '르완월리자야 스투파(Ruwanweli Saya Stupa)'를 봤다는 이야기다. 르완월리자야는 밤에 조명이 비칠 때 봤던 것이 더 예뻤다. 햇볕 쨍쨍 내리쬐는 날, 순백색으로 태양광을 반사하는 모습도 나름 볼 만 했지만, 너무 덥고 눈 부셔서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근처 상인들도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서 해가 슬슬 기울 때 쯤에야 장사하러 나오는 모습이었다.
사진이 있으니 이름 정도는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한 단락을 만들었을 뿐, 별 의미는 없다. 참고로 다고바는 스리랑카 말인데, 스투파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쓰임에 따라 다소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냥 똑같은 말이라고 해도 상관 없겠다. 실제로 현지에서도 다고바와 스투파를 많이들 혼용해서 썼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리수 나무가 있는, 스리 마하보디 사원
르완월리자야 스투파에서 조금만 더 방향 잘 잡고 걸어가면, '스리 마하보디 사원(Sri Mahabodhi Temple)'이 나온다. 이곳은 전세계 불교도들의 성지 중 하나인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리수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성지순례를 하는 불교도들 중에는, 스리 마하보디 사원을 순례길의 종착지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불교 사대성지나 팔대성지는 모두 인도 북쪽지역에 있고, 이 사원은 그리 큰 성지 축에 속하지는 못 한다. 하지만 이 사원의 보리수 나무는 기원전 3세기 경, 인도 비하르 주에 있는 '부다가야(Buddha Gaya)'에서 묘목을 가져온 것이라서, 불교도들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 바로 그 보리수 나무의 직계 혈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원의 보리수 나무를 '보디 트리(Bodhi Tree)'라고 부르며, 매일 많은 사람들이 이 나무에게 기도를 하며, 주변을 돌기도 한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나무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기원전 3세기 경 부다가야 지역의 아쇼카 왕의 딸이 이곳에 묘목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다가야에 있던 그 보리수 나무는 1876년 폭풍우로 쓰러져 죽었다. 그 후에 여기서 다시 묘목을 가져가서 부다가야에 보리수 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쓰러져 죽은 나무에서 씨앗을 채취해 다시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스리 마하보디' 사원의 보리수 나무가 석가모니의 보리수 나무 혈통을 이었다는 것이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보리수 나무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것이라서 관리 또한 엄격했다. 사원 자체는 누구나 아무렇게나 들어갈 수 있지만, 보리수 나무 주위로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었다. 물론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서 마치 열반에 이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늘을 맛 볼 수는 있지만, 멀리서 왔다며 꼭 이 보리수 나무를 한 번만이라도 만져보게 해 달라는 현지 노인들의 요청은 단호히 거절당했다.
석가모니도 나무 그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지, 나무를 만지거나 어떻게 해서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라는 걸 잘 알 텐데, 어째서 나무 자체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그들의 합장과 눈빛이 너무나 간절해서 딱히 뭐라고 할 수만은 없었다. 오래오래 계속되는 그들의 요청과, 또 오래오래 반복되는 문지기의 거절을 뒤로하고, 그 큰 보리수 나무 그늘 아래를 한 바퀴 휘 돌아볼 뿐.
사원 외부에는 딱히 그늘이라 할 만한 게 없기도 하고, 보리수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이 꽤 넓기도 해서, 그 아래 어느 구석진 벽에 꽤 오래 기대어 앉아 있었다. 부다가야에서도 얻지 못한 깨달음이 여기서라고 얻어질 리 없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별 생각없이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반짝하며 불현듯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그건 바로 '아, 배고프다'라는 깨달음. 그래서 곧장 시내로 향하면서, 어딘가 내게 한 모금 우유를 줄 처자가 있지 않을까 찾아봤지만, 역시나 내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