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동남아 삽질 여행 28

비밀의 바다
(태국, 꼬 창(Ko Chang))


어느날부터인가 당신의 눈동자는 흐릿해졌다.
낮에는 보이지 않는 저 먼 은하수 어느 작은 별을 바라듯
당신의 하루는 창 밖을 내다보며 한 숨 쉬는 일로 채워져갔다.

어찌 된 일일까, 무슨 일일까, 아무리 생각 해 봐도
도무지 알 수 없다, 왜 당신은 그렇게 갑자기 변해 버렸을까.
이제 지겨워, 그 한 마디에 우리의 일상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바다로 보내 줘, 푸른 바다로 맑은 하늘 아래 하얀 언덕 위로.
이제 더 이상 당신이 내 곁에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당신을 보낼 수 없었다, 비록 이미 떠난 영혼이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다보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그러다보면 다시 나아지지 않을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헛된 바램으로 헛된 시간을 헛되이 헛되이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다.




바다, 바다로, 바다로 보내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애원하는 당신을 나는
외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뒤돌아 눈물을 흘릴지언정 나는
당신을 보내줄 수 없었다.

미안, 하지만, 보낼 수 없겠어.
다시 한 번 나를 바라봐 줘, 시간을 남겨 줘.
이미 지친 나에게 아파할 틈도 주지 않고
그렇게 다시 잔인하게 나를 스칠 수는 없는 거야




우리는 서로 함께 달라지고 있었어.
당신은 왼쪽, 나는 오른쪽.
달라지는 순간만큼은 함께였지만,
함께 길을 걸었어도 우리의 방향은 달랐지.
그렇게 우리는 멀리까지 와 버린 거야,
당신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지만
나는 바다를 향하고 있었지.
그래 그러니까

나의 피로 바다를 만들 수만 있다면,
나의 피로 바다로 흘러갈 수 있다면.
붉은 파도 뜨거운 수면 위를 허위적 허위적
가까스로 숨 쉬는 탁한 눈의 물고기처럼
파르라니 떨리는 한 송이 연약한 촛불처럼
그렇게 당신은 붉은 강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도 당신은 바다를 향해 있었다.




나는 바다를 만들 수 없었어.
나는 바다로 흘러갈 수 없었어.
이제 그만, 그만.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것,
더는 잡을 수 없다는 것,
더는 내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것,
이렇게는 단 하루도 무사히 넘길 수 없다는 것.
그 때서야 나는
당신의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당신은
바람이 불어올 때 마다,
묻어온 바다의 비릿한 냄새를 느낄 때 마다,
온 몸으로 흐느껴 울고 있었다
마음 저 깊은 곳까지 울려 퍼지는 외침.
당신의 심장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져
영혼마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때서야
그 때서야 나는 겨우
당신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었다.
세상을 모두 집어 삼키고도 남을 만 한
당신의 한 맺힌 절규를
그 때서야 나는 겨우
한 줄기 눈물로
응답할 수 있었다.




작은 언덕을 하나 넘었다.
당신의 눈이 뜨였다.
바다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그 곳은 당신 몰래 꼭꼭 숨겨 온
비밀의 바다.
그래, 그래 나는 당신을 속여 왔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나의 사랑이라고,
나는 굳게굳게 믿고 있었고,
당신도 그런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었냐며
왜, 왜 이제와서 모든 게 변해야만 하느냐며
옷자락을 잡고 애원하는 나에게
당신은 차갑게 무심하게 건성으로 말 했다.
푸른 바람의 냄새 때문이라고.




그 때서야 당신의 눈은 초저녁 샛별처럼 빛났고
그 때서야 당신은 다시 숨 쉬기 시작했다.
당신은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인어공주처럼
당신은 마치 밤 하늘을 가르는 별똥별처럼
당신은 마치 흘러가는 이유없는 시간처럼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는 듯이
마치 애초부터 이렇게 되어야 했었다는 듯이
마치 이미 끝 장면이 공개된 영화처럼
그렇게 그 햇살 속을 걸어 홀연히 사라졌다
밝고 맑고 푸른 바람 불어오는 비밀의 바다
그 언덕 위에서 나는 바람의 냄새를 맏고 있다
아니 바람에 묻어 오는 당신의 냄새를 맏고 있다
아니 당신의 냄새 너머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오래전 잊혀진 비밀의 바다에서
가끔씩 폭우 사이를 뚫고 날아오는 까마귀처럼 깊은 바람이
당신의 붉은 바다 소식을 전할 때면 나는 몸서리 치곤 한다
바위를 깨는 듯 한 끔찍한 두통에 밤 잠을 설치며 우두커니
코를 막고, 귀를 막고, 입을 막고, 눈을 막고, 마지막 남은
마음의 빗장까지 꼭꼭 눌러 닫으면 그제서야 바람이 스치며
안녕 하며 붉은 미소를 남긴다.




Posted by 빈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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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산다는건 2008.12.22 17: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긴 한데 사람이...너무 없는 거 아닌가요? ;;

    • 빈꿈 2008.12.23 0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실제로는 적당히 (한 스무명 즘)있어요 ^^;
      이곳은 좀 어중간한 곳이라 사람이 좀 없긴 했죠, 비수기이기도 했구요

  2. 신타 2013.03.05 04: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무 명 쯤...에서 '쯤'을 꼭 '즘'이라고 쓰시는군요.....
    그리고 이번 글을 시 같기도 하고...아닌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