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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 일 없었던 것 처럼
    그림일기 2009. 10. 22. 00:36



    비 오는 날엔 재미있게 즐길 것이 너무나도 많다.

    비 맞으며 길거리 방황하기, 비 맞다가 우산 쓰고 길거리 방황하기, 비 맞다가 우산 쓰고 길거리 방황하다가 어딘가 죽치고 앉기, 혹은 방황하다가 비 맞기, 방황하다가 비 맞다가 우산 쓰기, 방황하다가 죽치고 앉아서 비 맞다가 우산 쓰기 등등, 비 오는 날엔 정말 즐길 것이 너무너무 많다.

    어느날 밤에 갑자기 약속도 없이 찾아온 죽음처럼 비가 내렸다. 나는 얼른, 사냥감을 본 사냥꾼처럼 밖으로 뛰어 나갔고, 그대로 비를 맞으며 몇 시간이고 걷고 또 걸었다. 그 날 산책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비 맞는 쓰레기통과 공중전화박스였다. 어쩌면 아무 상관도 없을 법 한 이 두가지가 그날따라 유난히도 단짝처럼 잘 어울려 보였다.

    어쩌면 어차피 대화같은 쓰레기나 쓰레기같은 대화나 그게 그거니까, 둘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차피 마음 속의 생각들을 쏟아내는 행위나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나 그게 그거니까, 둘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차피 쓰레기를 줍는 마음이나 수많은 사람들 중 그 사람을 택해 전화하는 것이나 그게 그거니까, 둘은 상당히 깊은 관계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차피 공중전화 박스나 쓰레기통이나 들어가서 쉬기엔 마찬가지니까, 둘은 일심동체인지도 모른다.

    색깔이든, 모양이든, 기능이든, 재질이든, 혹은 초감각적인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둘이 만나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다보면 어떻게든 어떤 의미든 생기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시나브로 풍길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건 한 마디로, 사랑, 사랑이다. 공중전화와 쓰레기통은 비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비 오는 날엔 재미있게 즐길 것이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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