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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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장미는 웃어줄거야, 비록 내일 시든다해도그림일기 2009. 10. 29. 03:54
석양은 짧고 어둠은 깁니다, 술 취한 사마귀처럼 이별이 다가옵니다. 나의 소박한 꿈은 취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달팽이같은 세상이었습니다. 이제 술이 비면 떠나야하는 우리는, 이 다음에 또 어디서 무엇으로 다시 만날지. 기약 없는 어둠이 빠알간 사과같은 졸음과 함께 한 입 떨어집니다. 약속은 짧고 이별은 깁니다, 우리의 덧없는 시간은 술잔 속에 머뭅니다. 그래도 우리 서로 가슴에 조그만 장미꽃 한 송이 나누었다면, 짧기만 했던 만남의 시간도 그렇게 덧없기만 한 것은 아닐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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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 없었던 것 처럼그림일기 2009. 10. 22. 00:36
비 오는 날엔 재미있게 즐길 것이 너무나도 많다. 비 맞으며 길거리 방황하기, 비 맞다가 우산 쓰고 길거리 방황하기, 비 맞다가 우산 쓰고 길거리 방황하다가 어딘가 죽치고 앉기, 혹은 방황하다가 비 맞기, 방황하다가 비 맞다가 우산 쓰기, 방황하다가 죽치고 앉아서 비 맞다가 우산 쓰기 등등, 비 오는 날엔 정말 즐길 것이 너무너무 많다. 어느날 밤에 갑자기 약속도 없이 찾아온 죽음처럼 비가 내렸다. 나는 얼른, 사냥감을 본 사냥꾼처럼 밖으로 뛰어 나갔고, 그대로 비를 맞으며 몇 시간이고 걷고 또 걸었다. 그 날 산책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비 맞는 쓰레기통과 공중전화박스였다. 어쩌면 아무 상관도 없을 법 한 이 두가지가 그날따라 유난히도 단짝처럼 잘 어울려 보였다. 어쩌면 어차피 대화같은 쓰레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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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바닥 인생그림일기 2009. 10. 22. 00:17
이 세상에도 언젠가 보름달이 뜬 적 있다. 회반죽으로 얼기설기 대충대충 마감한 옥상에 건조한 바람이 불던 때였다. 날이 어두워 보이진 않았지만 작은 모래알들이 날려 내 얼굴을 연신 때리고 있었고, 옥상 너머 펼쳐진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아옹다옹 살아가는 소리들이 들렸다. 아니,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내는 소리일 거라고 짐작 가는 기계들의 소리만 들렸을 뿐. 깡마른 회색빛 사막같은 그 곳이, 그 날은 특별하게도 푸르스름한 빛으로 감싸여 있었다. 마치 바다 밑으로 내려온 것처럼 한없이 투명한 블루, 바람에 나부끼는 작은 가지 나뭇잎처럼 파르르 떨리던 그 설익은 색깔. 보름달은 그렇게 끝없는 회백색을 배경으로 불안하게 희미하게 떨리는 파르스름한 빛의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변과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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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에서그림일기 2009. 10. 10. 02:54
아직도 그러고 있냐고 말들 합니다. 네, 아직도 이러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말들 합니다. 아니오, 아직은 그만 할 때가 아닙니다. 나중에 어떻게 될 지 참 궁금하겠지요, 저 역시도 커서 뭐가 될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아직은,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뛰어가든, 걸어가든, 계속해서 가고 있으니까, 아직은 괜찮습니다. 가끔 의심하고, 불안하고, 흔들리고, 주저앉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길 위에 있으니 괜찮습니다. 지쳐 쓰러지면 그 때 즘, 잊지말고 찾아와 국화꽃이나 한 송이 놓아 주세요. 그러면 다 괜찮은 겁니다, 다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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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싶은 바람개비그림일기 2009. 10. 9. 04:18
아아, 이대로 괜찮을 거야, 이대로 괜찮을 거야, 나는 노력하고 있어, 이것 봐, 저 파란 하늘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이잖아, 그래, 난 이렇게 열심히 돌아가고 있어, 열심히, 열심히 부지런히 살고 있어. 라고 말 하던 바람개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부산스러움 속에 자신을 가둬놓고 바삐바삐 돌아가며 애써 진실을 외면하던 모습. 연애질은 부질없는 짓거리라고 생각한다. 시간낭비, 돈 낭비, 에너지 낭비. 전 인류의 1%만 연애질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면, 이 세상은 아마 이미 암도 치료하고, 우주 정거장도 만들고, 세계 기아도 퇴치했을 거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 요건인 식의주에 해당하지 않는 옵션. 그러니까 연애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거고, 더 확장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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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리즘을 해제합니다그림일기 2009. 10. 9. 00:42
어느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매너도 없는데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거라. 매이저리그는 별로 가고 싶지도 않고, 갈 운도 안 돼서 마이너 길을 걷고 있는데, 꼴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아니겠어. 웃기지 뭐야.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그림일기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거든, 어쩌다보니 만화가 주가 돼 버렸는데, 그거 시간과 노력은 많이 들어가는데 남는게 없어. 시간 지나면 지난 이야기 돼 버리고, 흘러가 버리지. 닳아서 낡는단 말야. 그래도 그거 보고는 가끔 어디선가 제안이 들어오기도 해. 그런데 대개 이런 제안이야. '우리 사이트에 공짜로 연재해 주세요, 그럼 당신도 방문자 수가 늘게 될 거에요. 윈윈이에요~' 지랄한다. 메일 보내는 너나 공짜로 회사에 일 해줘라. 그러니까 이런저런 중간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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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나무그림일기 2009. 10. 9. 00:23
가난뱅이가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까 종이가 울었어. 종이가 우니까 나도 슬퍼 울었어. 내가 우니까 세상도 슬피 울었어. 아아 슬프디 슬프디 슬픈 세상이구나. 다 같이 울자 동네 한 바퀴. 2009.10.08 서울숲 한 쪽 으슥한 구석탱이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데 슬그머니 이 어둠구석을 찾아든 한 쌍의 바퀴벌레같은 연인들. 나름 사람 있나 없나 살핀다고 살피던데 시력이 안 좋은 건지,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건지, 내가 있는데도 그냥 자리 잡고 앉더라. 앉자마자 화르륵 불이 타 오르고... ;ㅁ; (이후는 19금) 공공장소에선 좀... ㅡㅅㅡ+ 절정의 순간에 소리를 확 질러버릴까, 모르게 슬금슬금 다가가서 바로 딱 앞에 자리잡고 말똥말똥 처다보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공원 순찰대 같은 곳에 신고를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