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天安門) 사태'는 1989년 6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베이징(北京)의 천안문광장 일대에 있던 시위대를 중국 인민해방군이 탱크와 총으로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6월 4일을 기념일로 잡아서 6.4사건 등으로 불린다. 중국식 발음을 사용해서 '톈안먼 사건'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천안문 사태 개요


덩샤오핑이 권력을 장악하고 개혁개방 정책을 시행하며 자본주의를 도입한 이후, 중국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됐다.

 

일자리를 무조건 보장하던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로 변하니, 실업문제가 커지고, 하급관료의 부정부패가 심해졌다. 또한 마오쩌둥 시절까진 무료였던 대학 등록금과 기숙사비, 식비 등을 받기 시작했으며, 인플레이션과 빈부격차도 심해졌다.

 

이 와중에 86년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제창하며 체제개혁을 단행하여 냉전을 종식시켰고, 87년엔 한국에서 6월 민주항쟁이 벌어지는 등, 세계적으로도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마침 이때 중국 공산당 총서기직에 있던 후야오방은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에 유화적이어서, 중국에서도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이 서서히 일어났다. 하지만 후야오방은 이런 태도 때문에 87년 1월에 사임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1989년에 정치국 회의 도중에 심장마비로 쓰려졌고, 결국 4월 15일에 사망했다.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처음에는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에 대한 평가를 공정하게 해달라는 시위를 시작했다.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거행됐는데, 이때 시안(西安) 등에서 성 정부를 습격하는 등의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폭정을 타도하자는 구호로 일어난 이 시위는 점점 내륙으로 확산됐다.

 

5월 15일에는 고르바초프가 중국을 방문해서 천안문 앞을 지나며 카퍼레이드 등을 할 예정이었지만, 이미 천안문 광장을 점령한 시위대 때문에 일정이 늦춰지며 뒷길로 돌아서 회담장소로 들어갔다. 회담 중에도 시위대 소리가 들려서 고위급 간부들은 굉장히 창피해했다고 한다.

 

고르바초프의 방중은 시위대를 강경진압하기로 결심한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됐지만, 이것 때문에 세계 많은 언론들이 베이징에 들어가 있어서 천안문 사건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5월 20일에는 천안문 일대 등 베이징 여러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마침내 6월 3일 밤에 진압이 시작됐다. 군인들은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했고,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뭉개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중국 정부에서는 사망자가 241명, 부상자가 7천여 명이라 발표했지만, 이걸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발표하는 단체마다 다른 숫자를 내놓고는 있는데, 아마도 최소한 중국 정부가 발표한 것보다는 많을 테다.

 

이후 중국 정부는 시위 관련자들을 대거 처벌하거나 추방시켰고, 대학생들에게 사상교육과 군사훈련 등을 시켰다. 언론과 출판물 탄압이 이어졌고, 천안문 사태는 폭동을 진압한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는 중국 내에서 이 사건은 검색조차 할 수 없게 막아놨다.

 

 

 

 

천안문 사태에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

 

* 천안문 사태를 상징하는 '탱크맨' 사진은, 6월 4일 유혈진압이 끝난 이후에 탱크가 천안문 광장으로 배치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분위기를 봐서는, 탱크맨은 탱크가 자기를 깔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여서 다시 항쟁의 불을 붙이려고 한 것 아닌가라는 추측이 있지만, 확실히는 알 수 없다.

 

* 강경진압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알려지고 있다.
- 시위 때문에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뒷길로 돌아감.
- 시위대가 작은 병(샤오핑,小甁)을 낚싯줄에 매달아 광장에서 끌고 다녔음 (샤오핑은 덩샤오핑과 발음이 같다).
- 천안문 바로 앞에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본떠 만든 ‘민주주의 여신상’을 세웠음. (이 상은 진압때 파괴되어 철거됐지만, 나중에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 모본이 세워졌다)

 

 

* 홍콩에서는 1989년부터 매년 6월 4일에 천안문 사태 기념 추모제가 열린다. 2019년에도 30주년 기념으로 행사가 열렸다. 대만도 나름 기념물 등이 설치되기는 하지만,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행사는 홍콩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 홍콩에는 천안문 사건을 기록하고 기리는 '64박물관(64museum)'이 있다. 규모는 작은 편이다.

 

> 64기념관 홈페이지, 위치(구글지도)

 

* 87년에 중국에서는, 한국에서 있었던 6월 민주항쟁 소식이 중국중앙방송(CCTV)을 통해서 거의 매일 보도됐다 한다. 따라서 이걸 본 사람들도 많았으니, 이 사건도 작은 영향을 끼쳤을 테다.

 

>천안문 시위 주역 "서울항쟁 따라했다" 고백 (제목은 낚시지만 내용은 읽어볼 만 함)

 

* 후야오방은 시중쉰을 복권시켜서 오른팔이라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바로 시진핑의 아버지 말이다. 그래서 시진핑은 후야오방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는 참석했다. 하지만 서거 30주년 기념식은 참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서거와 톈안먼 사태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일 테다.

 

 

p.s. 참고

* "톈안먼 사망 2000명 추산.. 中당국 은폐시도는 희생 컸다는 반증"

* "톈안먼 시위 무력진압에 中 군부도 씻을 수 없는 상처"

* 금기어 '탱크맨'..中젊은이들 90% 톈안먼사태 몰라

 

Posted by 빈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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