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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기억의 마을해외여행 2011. 3. 18. 17:21
나가사키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는 외곽에, 도시를 가로질러 바다로 흘러가는 작은 개천이 있다. 그 개천을 따라 시내 중심가로 통하기 위해 놓여진 오래된 석조 다리들이 줄을 이어 서 있다. 그 다리들 중 하나를 넘어가면 번화한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조용한 동네가,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며 하늘 아래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템플로드 골목길
산 아래로, 다리 바로 앞쪽까지 펼쳐진 작은 골목길은, 언제 사람들이 집을 나오고 들어가나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한적하다. 그 골목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좀 더 산쪽으로 다가가면, 17세기에 지어졌다는 소후쿠지 절을 필두로 수십여 개의 절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템플 로드(Temple Road)가 나온다.
템플로드에 있는 절들은 대부분 규모가 그리 크지가 않다. 그리고 줄지어 선 절들 사이사이엔 골목길이나 가정집들이 들어차 있어서, 평범한 동네일 것 같았던 외부의 모습과는 또다른 신기한 이미지의 냄새를 한껏 풍기고 있다.
절들 사이에 나 있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다시 언덕길을 오르면, 산 꼭대기 바로 아래까지 빼곡히 들어찬 집들을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산동네인 그곳은 한국의 산동네와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서, 산책하듯 쉬엄쉬엄 걸어 오르면 일본의 일반적인 가정집들 모습과 함께 등 뒤로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다시 제법 산동네다운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면, 꼭대기에서 조그만 공원을 만날 수 있다. 공원 이름은 가자가시라(Kazagashira) 공원. 거기엔 최근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료마(Ryoma)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그리고 그리 높지 않은 높이인데도 항구와 바다가 어우러진 나가사키 시내의 모습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이 산동네는 마치 부산의 중앙동 같은 모습인데, 산 꼭대기까지 빽빽하게 집들이 들어차 있는 형상이 아주 비슷하다. 하지만 역시 골목길을 걸어보면 한국과는 다른 느낌. 일본의 산동네는 이런 모습이구나, 관광지가 아닌 일반 서민들은 이런 곳에 이렇게 터를 잡고 삶을 이어가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최근에 료마라는 사람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텔레비전에 방영되면서, 일본사람들은 부쩍 나가사키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 그 때문에 지금 나가사키, 특히 '료마의 길'이라고 불리는 좁은 골목길은 하루에도 수차례 일본인 단체관광객들의 행렬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붐비고 있다. 그렇다해도 썰물처럼 한 번 썰려 나가고 나면 다시 예전의 조용한 골목길로 되돌아와서, 조용한 산책에 크게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비석길
산 아래서 올라가는, 혹은 산 위에서 내려가는 길은 다양하다.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길은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는 '료마의 길'인데, 그 길은 료마가 살아있을 때 자주 산책을 즐겼던 길이라 한다. 가보면 여기가 료마의 길이다라는 표지판 몇 개와, 료마의 주변인에 대한 설명이 쓰여진 설명판 몇 개가 전부다. 하지만 햇살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아침과 오후와 저녁의 분위기가 모두 다른, 묘한 매력을 주는 골목길이다.
나가사키에 머무는 삼 일 동안 그 길은 매일 걸어 올랐다. 그리고 오르는 길은 그 길을 택해도, 내려가는 길은 또 다른 곳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 길이나 잡고 내려갔더니 산 꼭대기부터 동네까지 쭉 무덤이 늘어서 있는 곳으로 들어서게 됐다. 관이 들어가고 봉분이 있는 묘가 아니라, 아주 좁은 공간에 비석을 세우는 납골묘들이었다. 그런 묘들 수천 개가 산 한쪽 면을 빽빽히 채우고 있었다.
첫날 나가사키에 도착하고 숙소를 잡은 뒤에 그 산을 올랐을 때는 이미, 먼 바다에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묘비들이 빼곡히 들어찬 길로 불확실한 발걸음을 옮길 때, 해는 지고 빗방울이 흩날렸다. 묘지는 미로같아 좁은 길들이 사방으로 나 있었고, 아무 길이나 따라가다 보면 길이 뚝 끊겨있기 일쑤였다. 게다가 그 좁고 울퉁불퉁한 계단들은,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저 아래로 뒹굴어 굴러 떨어지기에 딱 좋은 모습이었다.
여행 첫날의 피로와, 어두운 산이라는 두려움과, 묘비들로 이루어진 미로같은 길들이 주는 불확실함, 그리고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의 차가움과 발끝에 꽉 힘을 주어 조심해서 디뎌야만 하는 계단들의 위협 속에서 나는, 공포에 가까운 느낌으로 소름이 돋았다.
마침내 보이는 절에서 뿜어져나오는 희미한 불빛, 그리고 사람의 흔적. 골목길을 무심코 지나가는 행인을 보고 탁 마음이 놓여서, 반갑다며 와락 달려들 정도로 반가웠가. 그리고 돌아온 숙소에서는 피곤함에 눕자마자 골아떨어졌다. 그날 밤 나는 가위에 눌렸고, 자면서 내 스스로 내가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알 정도로 몹시 앓았다.
밤새 악몽과 함께 가위에 눌려, 깨어보니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시각. 땀으로 흥건한 베개를 창가에 널고, 이내 다시 그 길을 찾아갔다. 다시 료마의 길을 이용해서 꼭대기까지 올라갔고, 꼭대기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조금 휴식을 취했으며, 다시 또 그 묘비의 길로 내려왔다.
마치 무엇에 홀린듯 다시 찾은 그 길은, 전날 내린 비 때문인지 아니면 간밤의 이슬 때문인지, 맑게 개인 하늘 아래서도 물기 가득한 축축함을 내보였다. 빽빽한 묘비들 사이로 이곳을 지키는 듯 한 오래된 나무들이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어, 그 미로는 한낮에도 음습한 느낌이었다. 축축한 돌계단과 흙길 속에서 어제보다 더 발에 힘을 주어야만 했고, 그래서인지 길은 어젯밤에 헤매면서 걸은 것보다 훨씬 더 긴 느낌이었다. 다시 찾은 그 길은 그저, 이런 길이었구나 라고 태양빛 아래서 형체를 파악했을 뿐이었다.
피스폴
마지막 날, 짧은 나가사키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기로 약속된 그 날에는 아침일찍 그 길을 찾아갔다. 출근과 등교로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타인의 일상이 마치 나에게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 처럼 신기하게 바라보며 길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정상, 다시 묘비의 길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이어졌다.
묘비가 가득한 그 길을 걸었지만, 삼일동안 단 한 번도 똑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어쩔 수 가 없었다. 분명히 산 꼭대기에서 들어선 입구는 삼일 내내 똑같았지만, 그 이후로는 어디선가부터 틀어지기 시작해서 완전히 다른 길이 돼 버렸다. 어제 봤던 묘비가 오늘과 같지 않고, 오늘 걷는 돌계단이 어제와는 달랐다. 어쩌면 그 신기함에 이끌려 정신을 놓고, 왜 걷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매일매일 그곳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나가사키에 머무는 날이 좀 더 많았더래도, 난 아마 분명히 매일매일 그곳을 찾아갔을 테다.
그런데 여태까지 묘비와 돌계단과 흙길만 보여주던 그 길이, 마지막 날은 조금 달랐다. 비석과 돌계단으로 시커먼 회색빛 일색이었던 그 무덤들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막대 하나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뭔가 싶어 한달음에 달려가 보았더니, 이런 곳에 느닷없이 피스 폴(Peace Pole)이 서 있었다. 삼일 간의 여정은 당신이 나를 부른 것인가 물으니, 파란 하늘과 초록 바다를 바라보며 싱긋이 미소를 띄웠다.
피스 폴(Peace Pole)은 온 세상에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이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뜻으로 세우는 기념비(monument)다. 일반적으로 한아름 정도 됨직한 길이의 하얗고 긴 막대에, "May Peace Prevail on Earth"라는 문구를 써 넣은 형태다. 영어 외에 다른 언어로 된 메시지를 적어넣기도 하는데, 이 문장은 한국어로 "온누리에 평화를"이라고 주로 번역 한다.
1955년 경 일본에서 세우기 시작한 것을 시초로, 지금은 전 세계 180여개 나라에 20만 개 이상의 피스폴이 세워져 있다. 세계평화기원협회라는 조직이 있고, 여기서 피스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기는 하지만, 딱히 등록을 하거나 승인을 받거나 정해진 규격을 지키거나 할 필요는 없다.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맞게 스스로 제작하든지, 어디선가 사 오든지 해서 만들어 세우면 될 뿐이다.
사실 겨우 이런 막대기 하나 세우는 것이 현실에 무슨 도움을 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작은 마음과 정성 하나하나가 모여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 작은 실천 하나만으로 이 넓은 세상에 우연히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의 눈에 띄어 작은 위안과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믿으리라. 의외로 여행자들 중에는 피스폴을 찾아다니거나, 피스폴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사람들도 꽤 있으니까.
게다가 피스폴은 그 장소의 이미지를 확 바꿔 버리는 역할도 한다. 그 때까지 그 무덤들은 그저 수십개의 절 뒷동산에 놓여진 차갑고 거무죽죽한 비석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피스폴 하나가 우뚝 솟아오르며, 반짝반짝 빛나던 그 하얀빛으로 순식간에 주변은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덤군 아래에 놓여진 나가사키 외곽의 작은 마을의 모습이 눈앞에 밝아왔다. 촘촘이 들어선 주택들 사이로 조그맣게 나 있는 각종 상점들. 길 가는 행인들과 도로에서 작업하는 인부들. 골목에서 밝게 뛰노는 아이들과, 멀리 학교 운동장의 활기찬 모습. 더 멀리 땡땡거리며 지나가는 전차소리와, 자동차 소리, 뱃고동 소리와 비행기 소리. 그리고 마침내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보이지 않는 어느 성당의 맑고 높은 종소리.
그제서야 나는 눈을 떴다. 저 위에 산꼭대기에서도 외곽으로 떨어진 한 모퉁이의 다 쓰러져가는 비석들부터, 이끼 낀 비석들, 가족들이 한 데 묶여 울타리 친 비석들과 최근에 세워진 깨끗한 비석들. 이 죽음의 자리에서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 아래 계속되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었구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이렇게 삶 속에 맞물려 일상 속에 함께하고 있었구나.
May Peace Prevail on Earth
그리고 다시 그 하얀 피스폴을 올려다 봤다. "May Peace Prevail on Earth". 고인의 뜻이었는지, 후손의 재량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무리의 비석들이 모아진 공간 안에 세워져 있었던 그 막대. 어찌됐든 무덤의 주인들과 비석을 세운 사람들이 동의를 했으니까 세워질 수 있었을 테다.
나가사키라는 곳, 억울한 죽음이 많았던 곳. 그래서인지 이런 식으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하는 곳. 이 무덤들 속에도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있을 테고, 일부는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글프게 밤마다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 짓는 망자도 있을 테다. 그 속에서 저렇게 평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그만 정성을 부려놓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것을 허락한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들일까.
깊이 생각하면 참으로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탓할 수 없다면 우리도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단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순간 만큼은 경건한 마음으로 온 누리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해 볼 뿐. 챙겨갔던 도시락만 남긴 채 한 줌 재로 변해버린 소녀의 마음 속에도, 엄마의 품에 안겨 옷깃을 꼬옥 잡고 사라진 아이의 작은 손 안에도, 태어나서 눈 한 번 떠 보지 못한 채 떠나버린 생명의 눈망울 속에도, 부디 다들 맑개 갠 하늘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처럼 맑은 평화가 있기를 기원해 본다.
참고자료
The Peace Pole Project: http://www.worldpeace.org/activities_peacepoleprojec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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