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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Apple Inc.)이 '디지털 교과서' 사업에 본격 진출 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와 함께 국내 디지털 교과서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실 지금 당장은 관련 테마주가 오르는 정도의 반응 밖엔 없지만)
애플, 디지털교과서 사업 본격 진출 (신문기사)
애플의 이런 발표가 있기 전에, 교육과학기술부는 이미,
2015년까지 초중고교에 디지털 교과서를 보급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2015년까지 초·중·고교에 디지털 교과서 보급 (신문기사)
어떤 형태로, 어떤 기기들을, 어떻게 보급할 것인지,
그리고 운영과 책임, AS, 사후 업그레이드 등은 어떻게 할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뭔가 머리 깨지는 논의를 하며 대책을 세우고 계획을 짜고 있겠지.
그런데 한 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이 정책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긴 하지만,
나오는 얘기들을 얼핏 조금씩 접해 보면,
'디지털 교과서'를 너무 기술 위주로 접근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것.
요즘 사회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논란이 되고 있는 '학교 폭력' 문제와 연결해 보면,
'디지털 교과서'를 보급하는 것 자체로 교육환경 개선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만약 2015년에 당장 디지털 교과서가 보급 된다면?
1. 태블릿 PC는 돈이 된다.
애들 것 뺏어서 관련 업자에게 팔면, 업자는 공장 초기화 해서 팔 수 있다.
이걸 노리고 학교 주변 깡패나, 교실 내부 '일진'들의 활동이 더욱 거세질 수 있다.
애들 태블릿 PC 몇 대만 빼앗아 팔면, 당장 유흥비 마련이 되기 때문이다.
(종이로 된 책은 팔아봤자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지금은 건드리지 않는 거다.)
2.
왕따의 태블릿 PC를, 공개적으로나 혹은 몰래 고장 내 놓는다면?
왕따 문제가 심각하고,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이 더 많을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이 상황에서 왕따를 괴롭힐 목적으로 태블릿 PC를 계속 고장 낸다면?
이제 왕따는 공부로의 도피도 못 하게 되는 거다.
3. 학생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지 않을 수 있는가?
보급 후 어떻게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업그레이드 등을 해 나갈지는 모르겠고,
당장 파손, 분실, 고장의 경우엔 어떤 식으로 대처할 것인 지도 모르겠는데,
이 부분에 대한 정책이 미비하면 많은 학생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줄 수 있다.
학교에서는 수업용 태블릿 PC로 수업하고, 방과 후 집에 못 들고 가게 한다면?
학생들은 집에서 쓸 태블릿 PC를 또 따로 구입해야 한다. 그럼 가난뱅이들은?
태블릿 PC를 쓰다가 파손하거나 고장내거나 하면 누구의 비용으로 수리 할 것인가?
만약 공공자금으로 수리한다면, 함부로 던지고 파손하는 것은 어떻게 막을 테고,
만약 일부 자기 부담을 하게 만든다면, 가난뱅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4. 태블릿 PC에 락을 걸어서 딴 짓 못하게 해 봤자, 어차피 뚫리게 돼 있다.
그러니까 공부에 흥미 없는 애들은 학과 시간 내내 게임만 할 수 있는 천국이 된다.
그까지면 별 상관 없는데, 다른 애들에게 아이템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게임을 시킨다면?
중학생들이 앱(App) 회사도 차리는 시대다.
어른들이 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뚫어낼 수 있다. 애들을 만만하게 보지 마라.
일곱이 앱 회사 차렸다, 모두 중학생이다 (신문기사)
5. 학교와 업계의 유착에는 어떤 방안이 있을까?
지금은 모르겠지만, 옛날엔 수업 관련 교재나 준비물 등을 특정 업체와 연계해서,
학생들에게 구입을 강요한 학교 혹은 선생들이 있었다.
태블릿 PC의 교육용 소프트웨어들은 단가가 크고, 커미션이 커질 수 있다.
이 문제는 어떻게 막을 텐가? 보충수업 교재라면 안 살 수도 없을 텐데.
물론 그 비싼 SW를 살 수 없어서, 불법 SW로 만들어 배포된다면
문제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가는 계기가 된다.
불법 SW 단속반들이 불시에 교실을 헤집고 다니게 될 지도 모른다.
문제가 될 만한 예시들은 이런 것들 말고도 많이 있지만,
일단 글이 너무 길어지니 이 정도로 줄이겠다.
물론 이런 문제들은 기술자나 기술 관련 업체들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회사라면 더더욱, 이런 쪽에 별 신경 쓰지 않고, 쓸 의무도 없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기술 종사자, 그리고 관련 업계, 학계가 심심치 않게 하는 말이 있다.
'기술은 중립적이다'.
기술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게 맞긴 하다.
하지만 그 기술의 적용 대상이 인간이고, 그 중에서 아이들이며,
교육에 관련 됐을 경우에는, 기술의 논리보다 인문학의 논리를 우선해야 타당하다.
그저, '새로운 미래상을 위해 좋으니까', 혹은 '멋있으니까', '관련 산업 발전을 위해'
등의 이유라면, 모조리 쓸 데 없다. '아이'와 '교육'을 먼저, 최우선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니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하기 위한 취지를 밝히려면,
눈부신 기술 발전과 편리한 미래의 아름다운 모습만을 제시하지 말고,
'아이'와 '교육'이라는 키워드를 기초로 해서,
사회적, 철학적, 교육적, 인간적, 심리적 효과와 연구 등을 제시했으면 한다.
그런 타당한 자료들이 근거로 제시되지 않는 이상,
태블릿 PC를 이용한 '디지털 교과서'는 아직 시기상조다.
나중에 태블릿 PC 한 대가 3만 원 쯤 해서,
길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정도가 되면 시도해 볼 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