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주행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대강 밤을 새고 날 밝자마자 출발하자는 생각으로 노숙을 했다. 몸이 피곤하니 어디서든 잠이 들긴 들더라.

 

이런 여행을 하면, 어디서든 누우면 잠이 들고, 해가 뜨면 바로 눈이 떠진다. 일어나면 딱히 할 일이 없으니 바로 달리기 시작하고, 어디선가 적당히 밥을 먹고, 그렇게 살도 빠지니 정말 좋다. 살 빼려면 여름철에 딱 한 달만 시간 내서 자전거 노숙 여행을 해보시라. 효과 만점이다.

 

 

해 뜨자마자 짐 챙겨서 새벽부터 달리다가, 자전거가 잘 안 나가서 튜브에 공기를 넣으려다보니, 타이어가 이런 상태였다. 많이 닳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어느날 보니 상태가 너무 심각했다.

 

고무가 닳고 닳아서 마지막 실밥이 보이는 상태인데, 두께가 1밀리미터도 안 됐다. 이건 정말 당장 대책을 세워야 하는 위급한 상황. 이대로 달리다간 튜브가 삐쳐 나올 수도 있고, 조그만 이물질에도 금방 펑크가 날 수도 있다. 경주 시내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이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이 상태로 달렸는데도 펑크가 나지 않았다는게 신기하다. 근 한 달간 여행을 하면서 펑크가 한 번도 나지 않았다. 이건 운도 운이지만, 내가 조심해서 잘 달려서 그렇다고 자화자찬 해본다.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 포항

 

울산에서 경주 경계를 넘어가니 이런 짝퉁 다보탑이 떡하니 서서, 여긴 경주요 하고 있더라. 하지만 이것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손짜장 푯말이다. 경주만 들어서면 손짜장 광고 푯말이 왜 그리 많은지. 그나마 옛날보단 많이 없어진 편이더라. 그 많은 손짜장 광고들을 보고도 단 한 번도 먹지 않은 나도 참 징하다.

 

 

여행내내 편의점을 주로 이용했다. 사실 지방에선 편의점 도시락 사 먹을 돈으로 제대로 된 식당을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주문하고 어쩌고 너무 귀찮다. 편의점 도시락은 간단하게 빨리 먹고 다시 출발할 수 있어서 좋다. 가다보면 좋은 풍경을 수시로 만나기 때문에, 굳이 식당 같은데서 쉴 필요도 없고. 밥은 연료 채우는 용도로 퍼 넣을 뿐, 미식의 즐거움 따윈 없는 거다.

 

물론 사람마다 다른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형태로 여행을 하면 된다. 나는 음식따윈 일상에서도 잘 찾아먹고 음미할 수 있지만, 지역의 모습이나 풍경 같은 것을 실제로 구경할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길을 달리고 풍경을 감상하는데 더 중점을 둔다.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 포항

 

울산에서 경주 도심까지는 그냥 차도로 자동차들과 뒹굴며 간 것 밖에 없어서, 힘은 들었지만 딱히 남는 기억도 남는 사진도 없다. 그래서 다 생략하고 국립경주박물관. 입장료가 무료라서 건물 사진이나 찍어볼까 하고 갔지만, 개관시간이 오전 10시라서 아직 문을 안 열었더라.

 

여기는 가보자고 마음먹고 간 게 아니라, 길따라 가다가 옆에 있길래 들른 것 뿐이었다. 지도를 보면, 불국사역부터 선덕여왕릉을 거쳐서 경주 시내까지 '경주역사탐방자전거길'이 있는 것 처럼 표시되어 있어서 그 길을 타고 갔는데, 내가 갔을 땐 그냥 차도였다. 따로 자전거 타기 좋게 길이 돼 있다거나 그렇진 않았다.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 포항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역사유적지구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경주 역사유적지구 구경도 해봤다.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지라는 푯말도 있더라. 이 일대는 자전거 타고 둘러보기 좋게 길이 나 있다. 물론 걸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만, 햇볕 뜨거울 때는 자전거가 아무래도 낫다.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역사유적지구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역사유적지구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역사유적지구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역사유적지구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역사유적지구

 

첨성대도 보고, 왕릉도 보고. 볼 때는 좋았는데, 딱히 설명할 건 없다. 경주의 이런 분위기를 오랜만에 느껴보려고 호미곶을 포기하고 경주 시내로 방향을 잡았는데, 나름 괜찮았다. 사진으로 보면 별 거 없지만, 가끔 한 번씩 직접 가보면 마냥 좋은 곳이다.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대릉원

 

자연스럽게 대릉원으로 길이 이어졌다. 신라의 무덤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대릉원

 

천마총이 있기 때문에 천마 상을 만들어놨나보다. 담장 바깥쪽에서 구경했다.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대릉원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대릉원

 

대릉원은 담장따라 옆길로 살짝 구경하며 지나갔다. 이것저것 다 구경하고 돌아다니면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세한 구경은 나중에 경주만 따로 여행가면 하기로 했다. 

 

경주 시내 게스트하우스 같은 데서 하루 묵으며 구경을 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이때는 이런 유적보다 바다를 더 보고싶었다. 그래서 경주에서는 야외 유적지 구경만 살짝하며 스쳐 지나갔다.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데로 하는 것이 여행의 참맛이다.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대릉원

 

그래도 담장 너머 대릉원 일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아이고 좋아라. 구경 다 했네.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 포항

 

대릉원 길을 지나간 이유는 하나로 마트를 들르기 위해서였다. 대릉원은 거들 뿐. 마트 들어가려고 잠시 자전거를 묶어둔 모습. 그래봤자 많이 실을 수가 없어서 물 두 통과 빵 한 뭉치를 샀을 뿐이지만, 2리터짜리 물 한 통을 육백 원에 살 수 있는게 어디냐. 편의점에 가면 무조건 천 원 이상인데.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 포항

 

경주역 앞쪽을 지나가려다가 자전거 가게가 보이길래 냅다 들어갔다. 실밥 다 보이는 타이어로 계속해서 달릴 수는 없었으니까. 앞 뒤 양쪽 다 가는데 4만 원 조금 넘게 나왔다. 처음엔 튜브가 아니라 타이어를 갈러 왔다는 것에 주인장도 약간 의아해했는데, 타이어 상태를 보더니 아이고 탄성을 내지르더라.

 

타이어 갈면서 여기저기 기름칠도 좀 하고, 기어도 약간 조정하고 했다. 가게 주인이 아주 친절하게 잘 해줘서, 우리 동네도 이런 가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작업도 많이 해 본 솜씨여서, 타이어 갈고 이런저런 정비 하는데 십 분도 안 걸렸다. 경주역 앞쪽 삼천리자전거 황오화랑점 기억해두자.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 포항

 

 

십만 원 짜리 자전거에 타이어만 약 오만 원이다. 이것이 바로 자전거보다 타이어가 더 크다는 거다. 새 타이어에 삐죽삐죽 솟은 돌기들이 바퀴가 굴러갈 때 지면과 마찰을 살짝 줄여주는 역할을 하는 듯 하다. 짐 때문에 무거워서 큰 역할은 못 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주행할 때 소리는 좋더라.

 

기어에 기름칠도 했고, 타이어도 새것이니 이후엔 정말 바람처럼 쌩쌩 달려서, 포항 시내를 거쳐서 칠포해수욕장까지 순식간에 달려갔다. 역시 인생은 현질이다.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 포항

 

경주역 앞쪽을 지나서 포항 시내까지 국도를 타고 쭉쭉 나갔다. 여기는 국도도 정비가 잘 돼 있는 편이고, 직선으로 쭉 뻗어 있어서 과속단속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쌩쌩 달려나가기 딱 좋았다. 물론 길이 잘 뻗어있으니 차들도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는 흠은 있지만, 통행량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 그럭저럭 괜찮았다. 다만, 경주에서 포항까지 아무것도 볼 것이 없어서 지루하다는게 가장 큰 단점이다.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아시안 하이웨이

 

중간에 '아시안 하이웨이'가 보였다. 대체 표지판 글자가 왜 저 모양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 길은 나름 거대한 이상을 품고 있는 길이다.

 

아시안 하이웨이(AH: Asian Highway)는 유엔(UN)의 아시아 태평양 경제 사회 위원회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로, 기존의 도로망 등을 활용해서 아시아 32개국을 횡단하는 실크로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작은 1959년부터 했지만, 70년대까지 진척을 이루는 듯 하다가 지지부진해졌다. 그러다가 2000년 이후에 국가간 협의가 이뤄지면서 다시 불이 붙었는데, 중간에 중국이 일대일로 어쩌고 하면서 좀 이상하게 돼버렸다.

 

 

총 8개의 간선(AH1-AH8)이 있는데, 한국은 AH1과 AH6 두 개 노선이 지나간다. AH1은 도쿄를 기점으로 후쿠오카를 거쳐서 부산으로 넘어가서 베트남, 방콕, 인도, 이란 등을 거쳐서 불가리아까지 가는 길인데, 이 노선 중 일부로 한일 해저터널이 논의되기도 했다.

 

사진에 보이는 AH6은 부산을 출발해서, 우수리스크, 하얼빈, 이르쿠츠크, 옴스크 등을 지나서 모스크바, 벨라루스 국경까지 가는 노선이다. 그런데 둘 다 북한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어느 세월에 이 길들이 완전히 개통될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현실은 시궁창이라도 이상은 높게 아름답게 가지자는 의미에서 나름 가치가 있다.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 포항

 

북한이 아시안 하이웨이만이라도 지나갈 수 있게 해준다면, 이 길 따라서 유럽까지 자전거를 타고 편하게 갈 수 있을 텐데. 그것까진 아니더라도 기차만 지나게 해 준다면 육로로 이어지니까 나름 의미가 있을 테고.

 

 

어쨌든 포항 시내 진입. 포항 시내는 길이 시원하게 쭉쭉 뻗어 있는게 인상적이다. 옛날부터 내 기억속에 포항은 햇살이 따스한 곳이라는 인상이 있고, 그것 외엔 그냥 조용한 동네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옛날에 포항이 고향인 친구에게 포항에 가면 뭘 봐야하냐 물었더니, 아무것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허허, 아무것도 없음을 보아야하는 철학적인 동네인 건가. 어렵다. 그러니 포항은 빨리 통과하는 걸로.

 

동해안 자전거길: 경주 - 포항

 

 

포항산도 식후경. 쭉 뻗은 대로를 달려가는데, 길 가에 정말 엄청난 크기의 도날드 가게가 보이길래 나도 모르게 들어가버렸다. 더워서 에어컨 바람을 좀 쐬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사진에 가게 간판이 안 나오니까 무슨 가게인지는 모를테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편의점이 아닌 곳에서 식사를 했다.

 

Posted by 빈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