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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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죽은 그녀는사진일기 2007. 7. 4. 14:54
작지만 아늑하고 따뜻한 방이었어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낡고 오래된 마룻바닥이 삐걱삐걱 소리를 냈죠. 그 소리마저도 음악처럼 들렸어요. 빛 바랜 이불과 커튼, 낡아버린 옷. 침대 옆의 조화는 뽀얗게 먼지에 싸여 있었어요. 그 먼지마저도 왠지 이 방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죠. 그래요, 이 방에 첫 발을 들여 놓자마자 난 그만 반해 버렸던 거에요. 방에 정신이 팔려서, 방을 휘 둘러 보는 동안 한쪽 구석에 누군가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죠. -이 방 마음에 드나요 한쪽 구석에 어떤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요. 부시시한 몰골과 퀭한 눈으로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그 눈은 아무 곳도 보고 있지 않는 초점 없는 흐린 눈이었죠. 억양 없는 어눌한 말투. 딱히 누군가에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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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사진일기 2007. 7. 4. 13:59
천성이 워낙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들과 친해지기가 힘든다. 좀 만난 사람들도 다정하게 챙겨주고 그러는 것 익숙치 않다. 하긴 여태 남아 있는 친구들이라고 무관심한 세월들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잊고 살다가 어느날 문득 생각나서 연락하면 이런 상황이다. "야, 오랜만이야. 우리 마지막 연락 한 게 삼 년 전이었던가?" 그런 시간의 틈을 잊고 연락할 수 있어 친구인 것 아니겠냐고 위안 해 보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 뭔가 안타까움 하나가 가시처럼 콕콕 찔러온다. 위태위태한 임시 철제 계단을 오르는 듯 아슬아슬한 느낌과 함께. 너무 나 자신에게 몰두해 침잠해 있다는 것 알고는 있지만, 이 놈의 인간이 어찌된 녀석인지 파고 들수록 이상한 것들이 자꾸 나온다, 꾸역꾸역. 아주 끝장을 보자며 길 아닌 길에 들어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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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을 가장한 열 시간의 수다사진일기 2007. 7. 4. 13:39
제목으로 '처녀들의 저녁 수다'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처녀가 아니므로 그냥 부제로 하겠다. (조금 안타깝군, 이 기회에 처녀 해 버려?) 인도에서 만났던 토라와 헤나를 만났다. (둘 다 나 혼자 붙여서 나 혼자 사용하는 별명) 백수 트리플이라 사람 없는 한산한 평일 낮 열 두시에 만나자는 토라의 제안에 동의 해, 평소라면 밥 해 먹으려고 슬슬 움직이기 시작할 시간에 부리나케 약속 장소로 뛰어 나갔다. 둘 다 IT강국의 수혜를 입지 못한 사람들이라, 휴대전화기도 있다가 없다가 한다. 자기들이 소유한 전화기는 없고, 엄마나 친구나 친척에게 빌려 쓰기도 하는 상황. 열 두 시에서 이 분 즘 늦게 도착해 종각에서 보신각 타종 퍼포먼스를 끝 날 때까지 다 봤다. 둘 다 전화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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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보드카 바람에 실려 오면사진일기 2007. 7. 4. 13:31
축축하게 가랑비 내리는 11월처럼 내 입가에 우울한 빛이 떠 돌 때, 관을 쌓아두는 창고 앞에서 저절로 발길이 멈춰질 때, 내 영혼의 괴로움으로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을 때 나는 빨리 바다 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 허만 멜빌, '백경' 중에서-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온 몸을 휘감고 무언가 홀린 듯 거리를 나서도 난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이제 바람 그치면 꼼짝도 할 수 없을 텐데 돛을 올리고 떠나야 하는데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다리가 잘려진 앉은뱅이 시계처럼 꼼짝없이 주저앉아 맴도는 하루 난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누군가 손 내밀어 움직여 주기 바라는 혼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태엽인형 난 지금 무얼 하고 싶은 걸까. 이제 움직여 이제 움직여 이제 움직여 이제 움직여 그래 이제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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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정말 괜찮아요사진일기 2007. 7. 4. 13:30
까맣게 타오르는 세상 속에 불꽃이 일어나 너는 내게 말했지 이제 다 끝나 간다고 이제 아침 오면 더욱 까맣게 빛날 저 바닷속 썩어버린 물고기처럼 난 또 기어 들어가겠지 난 난 난 난 바라는 거 정말 없어 난 난 난 난 밝아오는 태양이 보고 싶지 넌 넌 넌 넌 바라는 거 너무 많아 넌 넌 넌 넌 태워버릴 불꽃이 필요 했지 잘 지내나요 어쩌다 생각이 나네요 원망 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죠 다시 생각도 하지 말자 다짐했었죠 마음처럼 안 되는 게 마음이잖아요 그래 어느 길목에서라도 우리 다시 만나는 날엔 난 너의 발모가지를 비틀어 주저 앉혀 버릴거야 아직 알 수 없는 그 어떤 희망의 시간이 있다 해도 니가 서 있는 그 곳은 환한 한 줄기 지옥빛 노을 세상이 썩어 가는 건 너 같은 욕망들 세상이 썩어 가는 건 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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