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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도 오지라 불릴 만큼 산 구석에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는 마을, 빠이(Pai). 빠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빠이, 빠이 외치는 이유는, 그곳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보통의 관광지처럼 눈에 확 띄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적한 시골마을의 맑은 공기와 신선한 바람만으로도 온 몸이 깨끗해지는 느낌이랄까. 혹은 조그만 마을에서 노닥거리며 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하루하루 즐거움을 만끽하는 재미랄까. 아니면 혼자 외딴 방갈로에 콕 처박혀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책을 읽거나 하루종일 멍하니 있을 수 있는 자유랄까. '여행지에서는 여행을 해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을 풀어버릴 수 있는 곳,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곳. 빠이가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 빈둥거리기도 참 어려운 일. 하루이틀이면 방갈로에 콕 처박혀서 멍하니 먼 하늘이나 바라보는 것도 충분히 즐거운 일이지만, 빠이의 높고 푸른 하늘은 빨리 밖으로 나오라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 다정한 연인의 낮은 속삭임처럼 매혹적인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수도승의 경지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달한 사람일 터. 그런 분들은 딱히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마음의 여행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일 테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 푸른 하늘과 맑은 바람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참을 수 없는 반가움에 반짝반짝 빛나는 빠이의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그래서 가는 곳은 온천이나, 사원, 조그만 폭포들, 혹은 외곽의 작은 마을들이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토바이를 렌트해서 휑하니 다녀오는 드라이브를 즐긴다. 길가에 펼쳐진 논밭과 수목들 사이로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여행이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빠이니까.
나 역시도 그 푸른 하늘의 유혹에 넘어가 매일같이 스쿠터로 드라이브를 즐겼다. 매일매일 경로를 조금씩 바꾸기는 했지만, 그 중에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간 곳이 있다. 차이나 빌리지 너머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언덕 꼭대기. 빠이 외곽의 푸른 초목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그 곳. 이 글은 바로 그 언덕에 관한 이야기다.
빠이 외곽의 작은 마을, 차이나 빌리지
빠이(Pai)도 충분히 작은 시골마을이지만, 그 외곽으로는 더 작은 마을들이 조금씩 흩어져 있다. 날씨 좋고 하늘 맑을 때 그런 마을들을 누벼보는 것도 빠이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보람과 휴식 중 하나인데, 그 중 '차이나 빌리지(China Village)'는 작지만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비교적 잘 닦여진 왕복 이차선 아스팔트 길로 빠이 끝까지 나가서, 좁은 시멘트 길에 들어서서 계속 달리다보면 어느덧 넓게 탁 트인 공간이 나온다. 딱히 그늘이 될 만 한 것들이 없어서, 한낮에 태국의 태양을 온 몸으로 맞으며 가야하는 길. 스쿠터로 달려도 어느새 등이 땀으로 흥건히 젖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한적한 길이다.
그 길 끝에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는 차이나 빌리지는 사실 특별한 구경거리라 할 만 한 게 없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웬만한 중국인 마을들이 차이나 타운(china town)이라 이름 붙여지는 데 비해, 이 마을은 타운보다 훨씬 작은 규모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차이나 타운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고, 차이나 빌리지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차이나 빌리지에는 넓고 깨끗하지만 오밀조밀한 맛이 없는 정원과, 옛날 이곳의 전통 가옥들을 전시해놓은 넓은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옆쪽으로 식사나 차를 마실 수 있는 가게와 잡다한 기념품들을 파는 가게 몇 개가 있는데, 그것이 볼거리의 전부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 밥 한 끼 혹은 차 한 잔 하고 휑하니 떠나버린다.
하지만 차이나 빌리지는 관광객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그 공간이 전부가 아니다. 길을 따라 차이나 빌리지 안으로 좀 더 깊숙히 들어가면 언덕길이 계속 이어져 있는데, 그 언덕 위로 수많은 집들이 있다. 사람들이 주로 차이나 빌리지라고 부르며 짧게 구경하고 가는 산 아래 작은 공간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작은 관광지일 뿐이다. 가파른 경사의 언덕배기로 접어들어야 비로소 차이나 빌리지라는 마을의 일상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길도 그리 길지 않다. 산동네 사이로 놓여진 회백색 시멘트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언덕 끄트머리 즈음에서 이내 길이 뚝 끊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길이 끝나면 산으로 접어드는 흙길이 나오는데, 여기저기 움푹움푹 파여져 있고, 인적도 드물기 때문에 보통 별 거 없나보다 하고 돌아나가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 험한 오프로드에 겁을 먹지 않고 계속해서 가다보면, 빠이의 절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그 언덕을 볼 수 있다.
웬만한 지도에는 표시되지도 않는 곳이지만, 스쿠터 빌릴 때 주는 지도에는 조그맣게 'Yun Lai View Point'라고 표기돼 있다. 꼭대기에는 한자로 '雲來'라고 적혀있는 푯말 하나와, 아무도 살지 않는 낡은 집 한 채, 그리고 물탱크 역할을 하는 큰 수조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늘이 파랗게 빛날 때 그 위에 서 보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평온함과 상쾌함으로 아무생각 없이 반나절을 멍하니 보낼 수 있는 곳이다.
구름이 모이는 언덕, 雲來
빠이에서 4박 5일을 보내는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언덕에 올랐다. 꼭대기에 올라서면 탁 트이는 그 시야가 좋았고, 수조 안에 채워진 하늘이 좋았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푸르름이 좋았고, 바람을 타고 나풀거리는 나비의 날개짓이 좋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도 나름 운치를 더했고, 심지어 을씨년스럽게 말라버린 해바라기 꽃밭도 그 맑은 빛 아래서는 정겹게만 느껴졌다.
그곳은, 찾는 사람도 많지 않을 뿐더러 이따금 찾아오는 사람들도 잠깐 경치만 둘러보고 내려가는 정도여서, 혼자 조용히 있기에는 딱 안성맞춤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낡은 집의 허름한 지붕이 만들어주는 그늘 아래 퍼질러 앉아, 소책자를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생각을 하거나, 멍하니 있거나, 혹은 꾸벅꾸벅 졸기만 해도 무언가 신선한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 그 느낌이 좋아서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서너시간 지나버리곤 했다.
주로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보내며 이따금 사람들이 올라와도 소 닭 보듯 했기 때문에, 이 언덕 위에서 사람들과의 교류는 없었다. 딱 한 명, 붙임성 좋은 캐나다인 노인이 다가와 말을 걸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이 그 언덕에서 사람과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그 노인은 백발이 성성한데다 엄청난 배불뚝이여서 정상을 밟자마자 쓰러져 드러눕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을 땀으로 샤워한 듯 축축히 젖어서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아 자기 말고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끊임없이 다양한 주제로 수다를 떨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만큼, 그의 직업도 그 능력과 상당히 어울렸다. 캐나다에서 교사를 하다가 아시아 쪽으로 영어선생을 하며 한동안 돌아다녔고, 지금은 연금 받는 것으로 태국에서 소박하고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밑천 없이 영어 장사 하며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부러운데, 연금까지 받으며 다른 나라에서 생활할 수 있다니. 참 부럽고도, 부럽고도, 부러운 사람이었다.
그의 여권은 빽빽하게 찍힌 도장들로 빈 칸이 없을 정도였는데, 정작 캐나다에 있는 록키산맥은 비행기로 내려다 본 것이 전부라고 했다. 사람들이 록키산맥이 좋다고 말 하는 건 많이 들었지만, 자기는 기술이 더 발달돼서 하나도 안 걷고도 올라갈 수 있게 되면 그 때서나 가 볼 생각이란다. 편하고도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데 왜 그 험한 산으로 죽을 고생 하며 기어 올라가냐면서.
이야기가 조금 깊어지자, 사실 그 사람의 여행은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자기가 받는 연금 만으로는 생활하기에 벅찬데, 아시아 쪽으로 나오면 그걸로도 충분히 생활이 된다고. 그래서 이렇게 여행을 하는 것이 오히려 돈을 아끼고 모으는 셈이라고 했다.
사실 한국도 생활비를 따져보면 굉장히 물가가 높은 편이다. 내 경우는 한국에서도 생활비를 별로 안 쓰는 축에 속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한 달 생활비를 들고 나가면 태국에서 두 달에서 석 달은 버틸 수 있을 정도니까. 그 캐나다인 노인처럼 어떻게든 해외로 떠돌아 다니면서도 생활비를 대강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려운 일.
적당히 살면서 이런 언덕에 올라 명상이나 즐기는, 그런 소박한 삶을 꿈꾸기엔 너무나 힘든 세상. 어쩌면 해답은 가까이에 쉽게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원래 답이라는 게 찾고 보면 별 것 아닌데, 찾기 전까지는 굉장히 어려운 거니까. 지금 바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다음 생에는 영어권에서 태어나길 바라는 것 밖에는 없다. 그렇다고 파푸아뉴기니에서 태어나는 것 좀 그렇고 (파푸아뉴기니도 나름 영어권 국가다).
차이나 빌리지 입구의 조그만 식당
한 시간동안 쉴 새 없이 이어졌던 수다를 접고, 노인은 이제 시원한 폭포수에 몸을 담궈야겠다며 길을 나섰다. 함께 가겠냐고 그가 제안을 했지만, 나는 따로 갈 곳이 있었다. 차이나 빌리지 입구에 있는 조그만 식당. 이 언덕에 오르고 나면 항상 찾아가는 그 식당을 무시하고 지나칠 순 없었다. 사실 빠이 주변의 폭포들은 그다지 폭포라고 할 만 한 것도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고.
관광객들을 위한 조그만 관광지가 꾸며져 있는 차이나 빌리지 입구의 공터 옆쪽에는 식당이 몇 개 있다. 그 중에서도 기념품 가게들이 모여있는 상점가 옆쪽 길을 돌아서 들어가면, 안쪽에 조그맣게 자리잡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가게가 하나 있다. 조그만 테이블 여섯개 정도가 놓여진 작은 가게. 건물이라기보다는 공터에 지붕 하나 겨우 올린 모양을 하고 있는 소박한 집.
처음 그 가게를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첫날 그 언덕에서 내려온 다음, 배가 고파서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려고 스쿠터를 공터에 대고 있을 때였다. 기념품 가게 옆쪽 작은 골목에서 프랑스 어를 사용하는 가족들이 환하게 웃으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 저 안쪽에도 뭔가가 있구나라는 호기심에 무심코 들어간 것이 첫 만남. 아주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우연.
이름도, 간판도 없는 이 조그만 식당의 주 메뉴는 만두다. 메뉴판에 있는 거의 모든 음식들에 만두가 들어갔다. 심지에 중국식 라면을 팔면서도 만두라면만 팔 정도였다. 사실 빠이 시내에는 외국인들 입맛에 맞는 맛있고도 다양한 음식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 식당의 라면은 그리 맛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중국에서 만났다면 맛있다고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만두 맛은 상당히 좋았다. 찐만두도 괜찮았지만, 특히 감동했던 것은 샤오룽바오. 이런 곳에서 샤오룽바오를 맛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아주 제대로 된 샤오룽바오를!
샤오룽바오는 만두 안에 국물(육즙)이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물이 있는 줄 모르고 그냥 한 입 듬성 베어 물다가는 혓바닥을 데기 십상이다. 그래서 국물 떠 먹는 용도의 큰 스푼에 만두피를 살짝 찢어서 육즙을 조금 빼 내고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적당히 식은 샤오룽바오를 한 입 가득 통째로 넣고 호호 불며 먹는 것도 맛있게 먹는 방법이기는 하다.
샤오룽바오는 주로 상하이 쪽 만두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요즘은 중국 전역에 샤오룽바오를 파는 식당들이 있고, 대만에서도 꽤 유명한 샤오룽바오 집이 있다. 한국에도 명동에 유명한 체인점이 들어왔다고 소문은 들었는데, 아직 맛을 보지 못해서 어떤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태국에서 샤오룽바오를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싼 고급 음식점을 잘 가지 않아서 못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콕에서도 샤오룽바오를 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식당을 매일같이 찾아간 이유는 샤오룽바오 말고도 또 하나가 있다. 그 식당에는 종업원처럼 일 하는 여자들이 둘, 그리고 주인처럼 매일같이 붙어 있는 여인이 한 명 있었다. 태국 쪽 가게들, 특히 시골 쪽에는 조합이나 공동운영 형태로 운영되는 가게들이 많아서 누가 주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늘 가면 만날 수 있는 그 여인이 거의 대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것 만큼은 확실했다.
그 아낙은 거의 매일 테이블에 앉아서 이런저런 야채들을 다듬고 있었는데, 그 가녀린 손 끝에 다듬어져서 한 풀 한 풀 벗겨지는 가녀린 풀줄기가 보여주는 하얀 속살의 섹시함. 다부진 손길에 이파리를 파르르 떨며 내려앉는 줄기 껍데기의 나풀한 모습. 그리고 그 옆으로 하나, 하나 떨어져 내리는 파르란 이파리의 운무. 그래, 나는 그 풀줄기의 매력에 빠져서 매일 간 거다, 진짜다.
참한 내 누이
주인인 듯, 대장인 듯, 지배인인 듯 그 가게를 항상 지키고 있던 그녀, 여인이라기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내 누이 생각이 났다. 생김새도 비슷했을 뿐더러, 행실도 참한 것이 꼭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 누이는 우리 할아버지의 첫번째 아내의 후손이었다. 첫번째 아내가 세상을 여의자 새장가를 드셨는데, 그 두번째 아내가 바로 우리 할머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이른바 배 다른 후손이다.
우리가 얼굴을 볼 수 있는 때는 일년에 딱 두 번, 설날과 추석이 전부였다. 우리 할머니 밑으로 있는 직계 사촌들과는 가끔 따로 만나기도 하고 했지만, 그 쪽 집안과는 딱히 교류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그럴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그쪽 큰집의 그 누이는 좀 독특했다. 어릴 때부터 그쪽 큰집의 큰어머니가 그 누이에게, 우리쪽 집안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며 예절 교육을 좀 엄격히 시킨 탓이었다.
그 누이 나이가 다섯살이 채 되지 않았던 때 부터, 그녀는 명절 때마다 화장을 하고 밥상에 수저를 챙기며 우리를 맞았다. 그쪽 집안, 우리쪽 집안 통털어서 십여 명이 넘는 자매들이 있었지만, 명절 때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그 누이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이미 밥을 나르고, 수저를 챙기고, 과일을 손질하던 그녀의 손톱은, 내가 볼 땐 항상 물 들인지 얼마 되지 않은 봉숭아의 빨간 빛이 번져 있었다. 아마도 우리쪽 식구들이 온다고 며칠 전에 손에 물을 들여서 그랬을 테다.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 그녀를 보며, 쟤는 어째서 저럴까 하며 의아해했다.
그렇게 참했던 그녀도 사춘기에 접어들며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그 반항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도 더이상 수저를 챙기지 않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밥상 근처에 보이질 않으니 그녀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더욱 줄어들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우리쪽 사람들이 가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아니 인사를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어쩌든간에 조용히, 최대한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었다.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조용히 자기 방으로 건너가 있다가, 우리 일행이 산소를 향해 출발하면 그 때서야 따로 밥을 챙겨 먹곤 했으니까.
그렇게 조용히 있던 것이 습관이 된 탓인지, 차례상 일을 거들지 않기 시작한 때부터 그녀는 방 안에서 아예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그 작은 집에서 차례 지내기 전이나 산소에 오르기 전에 잠시 쉴 만 한 곳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에, 우리는 그녀의 방을 잠시 쉬는 거처로 이용하곤 했다. 그래서 그 때 잠시나마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우리 만남의 전부가 되었다.
보통 사춘기의 반항이라면 다들 떠올릴 만 한 그런 삐딱함과 외모적 꾸밈 등을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또 일반적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녀의 반항이라는 것은 참으로 소박했다. 수저를 챙기지 않는 것과,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이 반항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없을 때 자신의 식구들에게는 어떻게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그것이 전부였다.
남들은 그 나이에 화장을 하는 것이 반항인 것에 비하면 참 특이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한 번은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다가 큰어머니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기도 했는데, 사춘기의 반항이 트레이닝 복을 입고 집에 있는 거라니 하며 속으로 웃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반항이라는 것이 그리 완벽하지도 않았다. 수저를 챙겨 놓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식사가 끝나면 그릇을 챙기거나 설거지 하는 일은 도왔기 때문이다. 그 때, 이제 더이상 붉게 물들지 않은 그녀의 손톱을 보며, 그래도 그 참한 천성은 어쩌지 못하나 보구나 했었다. 이제는 나도, 그녀도 타지에서 생활을 한다며 더이상 서로 얼굴 볼 일도 없어져버린 아주 오래전 이야기.
생각해보니 누이라곤 하지만 이름도 여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좀 한심한 일이기도 하고, 어쩌면 타인보다 못한 핏줄관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일이니, 세상 살다보면 또 어디서 어떻게 다시 엮일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이 먼 이국땅에서 그 누이를 꼭 빼다 닮은 이국의 소녀를 만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겠지.
중국 남방계 핏줄이 흐르지만 태국에서 태어나 태국인으로 살고 있는 그녀. 중국어와 태국어를 동시에 모국어로 삼고 있으면서, 약간의 장사용 영어도 구사했다. 겨우 우리나라 고등학생 수준의 더듬더듬하는 영어 실력이었지만, 태국의 이런 시골구석 사람 치고는 대단한 일이다.
게다가 손님들에게 중국 윈난에서 들여오는 차라며 보이차를 공짜로 대접해 주고, 집에서 이 차를 마시고 싶으면 저기 포장된 차를 사면 된다고 수줍게 말 하는, 제법 세일즈 기법도 구사할 줄 아는 그녀. 그녀의 눈웃음 섞인 어설픈 영어 덕분에 딱히 별 필요도 없는 보이차를 2만 원 어치나 사 버렸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그 차를 잘 마시고 있고, 그 차를 마실 때마다 그녀를 떠올리곤 한다.
마지막 들른 날에는 버스 시간 때문에 그녀의 작별인사를 등 뒤로 묻어버린 것이 못내 아쉽고 마음에 걸리는 짐으로 남아 있지만,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그녀와 그녀의 이름을 모두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지금은 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못 하고 있다는 것도, 모두 다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아무쪼록 내 참한 누이와 그녀를 닮은 참한 이국의 소녀 모두, 그 변두리 작은 언덕 위에서 맞이하는 맑은 하늘, 하얀 구름, 푸른 바람의 포근한 기운처럼, 아무쪼록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아무쪼록 그녀들의 밝고 맑은 초목같은 미소처럼 계속계속 반짝반짝 빛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빠이 외곽의 구름이 모이는 그 작은 언덕에 관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