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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정의 습관 중에서...
    잡다구리 2007. 6. 15. 15:23
    열정의 습관  -전경린
    (우연히 이 작가의 소설들을 접하고는 팬 아닌 팬이 되어버렸다. 문득문득 나오는 현란한 말들이 마치 하루키 소설처럼 부르조아틱 한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자꾸만 손이 가는... 묘한 글들이다.)

    76
    의사: 며칠 전에 친구를 만났는데, 고등학교 동창생이었어요. 한동안 말을 못 했어요. 입을 열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요. 거의 7분 동안이나 바라보기만 했죠. 친구도 가만히 보고만 있더군요. 몹시 학대받은 기분이 들었어요. 사느라고 살았는데, 그 친구 몰골이나 내 몰골이나 그동안 우리가 어디서 무슨 짓을 했나 하는 생각...

    83
    ...미홍은 잠시 생각했다. 나는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던가... 가장 나빴던 사랑이 떠올랐다. 현실을 설득하지 못한 채 주변을 마구 무너뜨리면서도 중단하지도 못하고 주체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막다른 곳까지 가버렸던 사랑들. 더러운 몰골로 혼자서 돌아와야 했던 나쁜 사랑들.

    84
    ...마치 쇠가 녹슬듯 우리는 현실 속에 노출되어 부식되고 산화되어 간다. 처음으로 삶을 느낀 그 순간부터, 살기 위해 숨을 쉬는 순간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죽음을 향해간다. 우리의 살갗은 금속처럼 부서지고 녹슬고 삭고 굳고 무표정해진다. 아무도 새삼스럽게 비명을 내지르지는 않는다. 너무나 오래된 병. 골수에 새겨진 병이므로, 무슨 게임처럼 비명을 내지르는 자는 자신의 비명 소리와 함께 전력을 다해 붙들고 있던 벽에서 거꾸로 떨어져버린다. 삶이란 점점 더 고급 단계로 접어드는 외국어 같아서 결국 모든 사람은 낙오하여 소통할 수 없는 세계의 잊혀진 뒷방에서 홀로 죽어간다.


    111
    언젠가 미홍은 전 재산을 페세타로 바꾸어 스페인의 모든 도시를 지나며 탕진할 것이다. 그래서 페세타가 완전히 떨어지면 무어 왕의 여름 궁전인 헤네라리페 근처 안달루시아의 빈민 언덕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곳에서 동굴을 하나 불하받아 집시의 집과 말 우리 사이에서 살며 그들의 춤과 노래를 배울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이곳에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124
    삶이란 습관으로 짜여지는 일상이고 사랑이란 한갓 그 틈새에서 작용하는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을 이성적으로 달랬다. 그녀는 인간의 본질이 89페센트 이상 감성으로 조성괸 존재라는 것을 아직 몰랐던 것이다. 이성이란, 자신이 장악하는 힘을 잃는 순간 그 단정함과 익숙함은 사라지고 가장 생경하고 무질서한 얼굴로 대면해야 하는 억압된 진실에 다르마니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모든 폭력과 살인과 광기란 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감정이 아니라, 냉혹한 이성이 일으키는 횡포인 것을 몰랐다.

    128
    -여자가 여자가 아니면, 그럼 뭐죠?
    -그냥 사람인 거죠.
    -그렇군요. 냉소적인 남자들이 말하는 식이군요.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여자와 남자와 아줌마.

    130
    가현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삶의 폭력성에 대해, 자연의 의지에 대해, 그녀가 극복할 수 없는 수치심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노파는 쌀을 세 포대나 재어놓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미안하네, 오래 살아서. 아무 소용도 없는 몸이 이리 오래 사니 세상에 면목이 없네....

    135
    어쩌면 장마철에 불어난 개울에 떠내려보낸 신발은 끝까지 따라가 찾는 법이 아닌지 모른다. 그냥 흘려보내야 하고 남은 한 짝은 집 근처 빈 터 풀숲에 버렸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결코 현실에 개입될 수 없는 사랑, 육체와 시간을 잃어버리고 표류하는, 유령 같은 추상적인 사랑. S가 떠나버린 뒤에 그녀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며 검은색 숄을 두르고 밤거리로 뛰쳐나온 그 여자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독거노인 집을 방문하며 더욱 열심히 쓸고 닦고 김치를 담고 부침개를 부칠 것이다.

    143
    -왜 사랑하려고 하세요?
    -...살고 싶어서요. 무의미조차 삭아빠져서, 숨을 쉬기에도 지쳤어요.

    - 당신이 그처럼 몰두할 여자를 찾고 싶다면, 먼저 여자에 대해 알아야 해요. 당신은 여자를 사랑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는 여자에대해 무지해요. 경험도 없고 상상력도 없고 지식도 이론도 없어요. 그렇죠? 당신은 어느날 갑자기 나를 떠올린 거에요. 무턱대고.
    ... 전 무턱대고 사랑하겠다는 남자를 믿지 않아요.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죠. 빈틈없이 잘 아는, 내가 모르는 부분까지 이미 알고 나를 희롱하는 어른스러운 남자를 원해요...

    149
    ...자기 생에서 신 벗을 자리를 발견한 사람은 행운아들이죠.

    161
    -사랑을 극복하면 사랑은 사라질까요? 더 심화될까요?
    어느날 미홍이 말했다.
    -더 심화되겠지.
    진성이 대답했다.

    -하지만 사랑을 극복하면 다른 모든 극복과 마찬가지로 점점 느낄 수 없어지고 유예되는 것이지. 그러다가 너무 깊어지면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잃어버리고 말아. 제 속에 있겠지만 실종되어 버리는 거야. 극복이란 그런 거야. 왜 사랑을 극복해야 하지?

    -사랑은 집착하는 거야. 두려움 없이 집착을 키우고 만에 하나 잃어햐 할 때는 태산 같은 집착의 고통을 순순히 치르는 거야. 그게 사랑이지. 사랑을 절약하고 집착의 고통에 빠질까봐 두려워하는건 진짜 사랑이 아니야. 난 지금과 같은 사랑을 원해. 마음껏 사랑하는 사랑을. 만질수 있고 당신 가랑이 속에 파고들 수 있고, 수없이 혀를 감고 당길 수 있는 이런 사랑을. 행위가 분명히 존재하는 매우 성적인 사랑을.

    170
    가현: 슬픔이라는 거... 참 이상해.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그런 경험... 요즘 난 허방다리를 듣듯 그런 슬픔에 자주 빠져. 책을 읽다가도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장바구니를 들고 현관에 들어서서 신발을 벗다가도, 문득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인교: 넌 너 자신의 사랑에 충실한 거야. 아무것도 따르지 마. 네 몸과 마음에 정직하면 돼.

    175
    미홍: ...왜 그러느냐고.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그 순간 내 눈에 눈물이 고였어. 그애도 그것을 보았어. 그애 눈에도 눈물이 맺히더라. 나는 어쩔 수 없다는 기분이 됐어.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거야.
    -가현: 왜 그런 거야?
    미홍: 나도 왜 그랬는지 며칠 생각을 해보았어. 그건, 그러니까 영혼의 오르가슴이었어.
    -맙소사,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이야기 내용이 중요했던 건 아니야. 어느 순간에 20여 년 동안 하루도 나를 잊은 적이 없다는 그 말이 그만 진실이 되고 마는 어떤 화학적 작용에 관한 거야.

    183
    ...갖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원해도 이 사랑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이란 거리에 떠도는 바람처럼 집을 나와 낯선 거리를 걸을 동안, 이렇게 낯선 해변에 나앉아 있는 동안 잠시 갖는 것이다.

    188
    생은 정돈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유동성 물질 같은 것이다. 지금은 다시 방황할 때이다. 다락방에서 꺼내진 인형의 눈이 다시 반짝 빛났다. 인교는 아픔을 느끼며 머리르 빗기 시작한다. 죄다 뽑아버릴 듯이 사납게... 치켜뜬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작가후기중에서...

    성은 더 이상 상품도 아니고 상처도 아니어야 하며 터무니없는 순결 의식으로 미화되어서도 안 된다. 더군다나 윤리적 담보에 매여서도 안 되고 습관의 질곡에서 굳어져서도 안 되며 함부로 포기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성이 스스로와 상대에 대한 생명력을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은 생각보다 기나긴 것이고 살아가는 동안 생의 모든 주체가 육체와 정신의추구를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문란하지 않으면서, 형식에 얽메어 단념하지도 않기를 바란다. 진정한 내용이 스스로 형식이 될 때까지... 그러므로 성은 방황을 멈추고 그 자체인 사랑으로 돌아가기까지 당분간 더 방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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