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만 해도 내 인생이 이렇게 어둠의 구렁텅이에 푹 빠져서 오래오래 헤어나지 못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지. 그냥 스치는 바람이겠거니 하고 잠시 쉬러 나갔다오면 조금씩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했던 때. 하지만 점점 다가오는 어둠의 그림자 끄트머리 즘에서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던 때.
그 때도 지금도 사람들은 불경기 불경기 노래를 부르지만, 그 때도 지금도 나는 딱히 불경기인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 호경기가 있었던가, 가만 생각해보면 늘 불경기였다, 딱히 다를 것도 없었고, 호들갑 떨 필요 없었다.
그보다는 오랜만에 가진 친구들과의 모임이 내겐 더욱 자극적이었다. 해외여행 붐을 타고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이 꽤 많았던 것. 나도 어릴 때부터 책으로 그런 걸 읽으면서, 언젠가는 나도 유럽을 누벼 봐야지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서 많이 부러웠다.
하지만 이상은 높고 현실은 시궁창. 유럽여행은 고사하고 유럽까지 갈 차비도 없었다. 아, 이게뭔가, 남들은 유럽도 갔다오는데. 원래 가난이란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것. 다들 백 억씩 가지고 있는데 나만 십 억을 가지고 있다면 가난하다 느끼는 거다.
옛날에 우리나라도 올림픽 개최한다고 들떠있던 그 때, 한 켠에선 국제단체에서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나왔더랬다. 그 때만해도 우리나라는 국제 원조를 받고 있던 때. 올림픽까지 여는 나라인데 얼마나 가난해서 아직도 국제원조를 받고 있을까하며 국내 사찰을 온 국제단체. 이들을 데리고 아주아주 가난한 산동네 구경을 시켜줬단다.
산동네를 둘러보던 국제단체 사람들이 그 모습들을 보고 입이 딱 벌어지면서 놀랬단다. 사는 모습이 너무 가난해서 그런게 아니다. 가난하다고 소개시켜 준 집들을 돌아보니, 다들 형광등도 있고, 티비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없는 게 없는 것 아닌가. 이 정도면 다른 동남아의 가난한 사람들에 비하면 귀족 정도의 생활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말했다. '자, 이제 가난한 집을 보여 줘.'
그러니까 상대적 박탈감만 어찌 해결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절대적으로 봤을 때 그리 빈곤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다. 뭐 이런 말을 해도, 말이 그렇지, 빈곤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란 어렵고, 그닥 도움 되는 말도 안 되지만.
어쨌든 그 상대적 박탈감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라고 말 하고 싶었던 거다. 유럽여행도 못 가는데 앙코르 와트나 보고 오자, 그러면 굶어 죽어도 후회는 없겠다 싶었던 거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앙코르 와트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어느날 느닷없이 짐을 쌌고, 느닷없이 길을 떠났다.
이 여행은 2004년 겨울 어느 날 있었던 여행의 기록이다.
앙코르 왓을 보러 가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니 직항은 너무 비쌌다. 그래서 태국을 거쳐서 육로로 국경을 넘어 가는 방법을 택했다. 아무래도 고생은 좀 하겠지만, 그쪽이 돈은 좀 아낄 수 있으니까.
일단 인터넷에서 방콕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캄보디아로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얻은 다음, 큰 길 가로 나가서 제일 처음 눈에 띄는 아무 여행사나 들어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외친 한 마디. "내일 방콕 가는 비행기 표 주세요."
"내일요?"라며 나를 한 번 흘깃 보더니, 별 말 없이 검색을 해서 표를 예약해 준 여행사 직원. 이 때만 해도 난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처음이라 많이 설레고, 조금은 떨리기도 했던 기억.
이 때만 해도 부산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김해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편을 예매했다. 방콕까지 텍스 포함해서 약 42만원 정도로 기억되는데, 가격이 그리 싼 편은 아니었다. 다만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는 차비를 생각하면 그 정도면 괜찮다 싶어서 그냥 끊었다. 서울까지 다른 교통편으로 이동하기도 귀찮았고.
내가 잘 모르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당시 김해공항은 공항버스도 따로 없었다. 시내좌석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쭉 가면 공항에 도착하는 형태. 사실 가격 면에서 보면 그게 더 좋은데.
마치 고속버스터미널같이 생겼던 김해공항을 통해 비행기에 탑승했다. 생전 처음 공항검색대를 빠져나가면서, 아 저거 영화에서 많이 봤어, 저 앞에 가서 팔다리 벌리고 서면 되는 거였지. 하고 가서 섰더니 그냥 가란다. 줵일, 첫경험 해 보고 싶었는데. 한 겨울에 반팔 입고 돌아다니니 미친 걸로 느껴졌던걸까. ㅡㅅㅡ;
김해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김해평야와 낙동강을 보여주며 한 바퀴 뱅 돌았다. 기체가 거의 30도 기울면서 고도도 동시에 높였는데, 이 때 난 조금만 건드리면 입에서 불꽃같은 걸 뿜을 태세였다. 거의 이륙하자마자 착륙한 짧은 비행 속에서 이미 속은 다 베려놨다. 컨디션 급 강하.
개항한 지 얼마 안 되는 깨끗한 인천국제공항을 보니까 김해공항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고 깨끗했다. 여행 처음 가는 시골 촌놈 티 풀풀 풍기면서 여기저기 기웃기웃. 여기서 약 세 시간 정도 대기했다가 JAL기로 갈아탔다.
(이 때만 해도 비행기가 신기해 보였음.)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도쿄 나리타 공항까지 갔다. 중간에 기내식이라고 속에 불만 지르는 도시락 하나 줬는데, 쪼그리고 앉아서 그거 먹다가 얹혔다. 아주 컨디션 죽여준다. ㅠ.ㅠ
나리타 공항에서 6시간인가 7시간인가 대기했다. 아주 기가 막히는 건, 물도 한 모금 못 마시고 그렇게 널브러져 있었다는 거. 공항 안에서 뭔가 사먹으려 해도 일본돈 엔화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간혹 달러 받는 데도 있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서 그래 한 번 개겨보자라는 오기만 더 생겼고.
아 몰라라~ 하고 의자에 드러누웠더니 멍하니 천장만 보고 시간을 보냈다. 짐 무거워진다고 가이드북도 다 놔두고 온 상태라, 읽을 거라고는 인터넷 보고 메모한 종이 몇 장이 전부였다. 그걸 읽고 또 읽어서 다 외워버렸을 때 즘 다시 비행기를 탑승했다.
도무지 이 좁은 공간에선 음식물을 입 안에 밀어넣는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로 나온 음식들은 조금만 먹고, 나머지는 모두 가방에 챙겨 넣었다. 맥주는 두 캔 확보. ㅡㅅㅡ/
돌아올 때도 이렇게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에 아주 몸서리가 쳐 졌다. 아무리 싸도 다음부턴 이렇게는 절대로 안 가야지라는 교훈을 얻었으니, 나름 얻는 게 있었던 여정. 이 여행 이후부터 웬만하면 비행기를 타지 말자라는 철학(?)을 가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