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니다보면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 자기가 겪은 일을 말 해 줬는데, 나중에 그 사람이 낸 책 보니까 마치 자기가 직접 그걸 겪은 것 처럼 써 놨더라.' 라는 말은 정말 수 없이 많이 들었다.
또한, '여행자들 사이에 떠도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오래된 영웅담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써 놨더라.'라는 말 역시도.
옛날에 여행 초보였을 때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난 이렇게 반응 했다. '어차피 출처도 불분명 한 건데 누구 건지 어떻게 알아' 내지는, '심심하니까 험담 하는 거 아닐까' 라는 시큰둥한 반응.
그러다가 한국 여행자들이 많이 모이는 태국의 한 숙소에서 못 볼 걸 보고 말았다. 처음 들어 올 때부터 숙소 사람들에게 엄청 살갑게 대하던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첫날부터 수시로 자기가 이것저것 먹을 것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여행 좀 오래하고, 에피소드 많이 가지고 있고, 이야기 좀 재미있게, 많이 하는 사람 몇몇을 압축해서, 그 사람들만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먹이더라.
사람들은 다들 처음엔 '그럴 수도 있지'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여행 하다보면 그렇게 한 턱 내고, 주고받고 그러는 거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니까.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그 사람을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거 전부 다 수첩에 꼼꼼하게 적고, 세세한 부분까지 꼬치꼬치 캐 묻고, 밥 사주면서 은근히 새로운 이야기 해 달라고 조르는 등 아주 피곤하게 굴더란다. 딱 취재하러 온 사람이라는 게 표시가 난다면서.
그 사람이 그 기록을 가지고 어디다 썼는지는 나는 모른다. 그런데 그런 걸 어디다 쓰겠나. 뻔하지 뭐.
최근에는 그런 의혹에 쐐기를 박는 일이 있었다. 출판업계에서 일 했었다는 사람을 만나버린 것. 시중에 나와있는 여행서 중 일부는 전문작가와 함께 작업 한 거라고. 사실 아직까지도 별로 믿고싶지 않은 말이다. 그런데 안 믿을 수도 없다.
뭐, 그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들의 반응이 내겐 더욱 충격이었다. 내 주위 사람들 몇몇에게 그 얘기를 해 줬더니, 여행서라고 서점에 나와 있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픽션이 가미됐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행기는 사실만을 적는다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나 철 없이 순진무구했던 것인가.
헌데, 이 즈음에서 국어사전을 들춰보자.
* 여행기 =
기행문 :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것을 적은 글. 대체로 일기체, 편지 형식, 수필, 보고 형식 따위로 쓴다.
*
견문록 : 보고 들은 지식을 기록하여 놓은 글.
(
다음 국어사전에서 발췌)
사전적 의미로 봤을 때, 여행기는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적는 글이다. 상상한 것을 쓴다고 되어 있지 않다. 남이 겪은 일을 듣고 썼다 하더라도, 그걸 마치 자기가 겪은 것 처럼 썼다면 그건 소설 아닌가.
아, 뭐, 그래, 다 좋다, 어차피 여행기라는 것, 사람들에게 환상을 불러 일으켜서 대리만족감을 느끼게 해 주는 거니까. 그런 면에서 소설이 됐든, 다큐가 됐든 상관은 없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그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고, 그걸 들고 여행하는 사람들은 대체 누가 책임 져 주지? 나도 여행하다가 그런 사람들 꽤 만났는데. 그 중에는 그런 책에 나온 장소들을 모두 둘러보는 게 계획이라던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 그렇게 여행하다가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세상 참 이해하기도 어렵고, 적응하기도 어렵다. 여태까지 여행기라면 누구나 사명감을 가지고 100% 사실만을 적을 거라고 믿었던 나 자신이 참 한심하고, 또 어떤 것에서 어떻게 속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세상이 다 거짓의 덩어리같아 보인다.
어쨌거나 이제 나도 여행기로 소설을 써야겠다. 그러면 아마 아주 재밌는 로맨스도 마구 나올테고, 갱단에게 쫓기는 서스팬스도 나올테고, 하루하루 다이나믹한 일들을 써 내면서, 여러가지 스펙터클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 채울 수 있을 테다. 그러곤 뻔뻔해지는 거지. 그걸 보고 따라서 여행하는 놈은 지가 멍청한 거지 뭐, 하고 비웃어 주는 뻔뻔함 말이다. 그래, 세상이 그렇다잖아. 그러니까 나도 적응을 좀 해야 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