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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레 100 개의 위엄
    잡다구리 2013. 11. 6. 02:25

     

    지난주에 동네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들어간 조그만 할인마트에서 레토로트 카레를 한 개에 750원에 팔고 있었다. 어럽쇼 이게 웬 떡이냐하고는 냉큼 열 개를 집어왔다. 그리고 이번 주에 다시 가봤더니 이미 카레는 반 이상 팔리고 없었다.

    위기감을 느낀 나는, 오랜 고민과 고뇌의 시간 3초를 거친 다음, 이번 기회에 카레를 대량 사재기 해 놓기로 마음 먹었다. 일단 처음엔 다른 물건 살 것도 있었기 때문에 카레는 20개만 샀다. 집에 와서 짐을 부려놓자마자 다시 나가서 40개. 왕복 1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와 옥탑방을 기어 올라가야 한다는 압박과 부실해진 체력의 조화로 이미 두 번 왕복으로 죽을 것 같았지만, 있는 힘을 다해서 3차 시도 완료. 결국 나는 100 개의 카레를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평소에 레토로트 카레를 싸게 파는 마트는 이미 두어 개 점찍어 둔 곳들이 있다. 카레가 다 떨어져갈 때 쯤엔 산책 경로에 따라 여기나 저기로 가서 카레를 사는데, 대체로 할인한 가격은 990원. 그 정도라도 싸다며 막 열 개씩 사오고 했었다. 그에 비하면 이번 것은 정말 파격 세일이라 할 만 하다. 그래서 눈이 돌아갔던 거고.


    카레가 왜 이리 많이 필요하냐면, 점심 도시락을 카레로 싸가기 때문이다. 몇 개월 계약직으로 다니는 프리랜서 개발자 인생, 불안한 고용에 노는 기간 산출하면 그리 많지도 않은 수입. 그리고 돈은 있을 때 아껴야 한다는 어릴 때부터 받아온 교육. 그 조합이 바로 오늘의 카레 사태를 낳은 거다.

    파견으로 들어가서 일 하고 있는 대기업 지하의 구내식당 점심 가격은 오천 원. 밖에서 싼 메뉴 먹는 것보다는 대략 1~2천 원은 더 싸다. 하지만 그것조차 너무 돈 아까운 느낌이었다. 영양 밸런스고 뭣이고, 일단 그 돈을 주고 사 먹으면 맛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맛이 없으면 양이라도 많든지, 더 달라면 좀 더 주기라도 하든지. 세상에 개밥도 그렇게는 안 주겠다. 그래서 그거 먹을 바에야 그냥 도시락을 먹고 말지라고, 서너번 구내식당을 이용한 후 결심을 굳혔다.  

    물론 짜장도 있지만, 이상하게 레토로트 짜장을 밥에 비벼먹으면 속이 쓰리다. 그래서 카레에 올 인. 부족한 영양분은 일주일에 두어 번 참치 캔을 싸가면 된다. 우리동네 골목 수퍼에서 참치 캔 작은 것 하나에 1100원에 판다. 이렇게 대략 계산해보니, 카레 백 개를 사놔도 구내식당 한 달 점심 밥값이면 본전을 뽑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물론 맛과 경제적인 이유 말고도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안그래도 시간과 노동력을 갖다 바치는 갑 회사. 계약으로 정해진 것보다 더 많이 갖다 바치면서도 들어 엎지도 못하고 꾹꾹 참고 지내고 있는데, 거기다가 점심 밥값으로 돈까지 갖다 바치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구내식당 운영자가 자회사든 딴 회사든, 어쨌든 건물 임대료 등으로 해서 갑 회사에게 돈이 들어가니, 이렇게 내 모든걸 갖다 바쳐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 거다, 뭐가 이쁘다고.

    예전에 사람들이 대형마트 이용하지 말고, 소매점이나 재래시장같은 것 이용하자는 말이 많이 나왔을 때, 어떤 대기업 임원이 이렇게 말 했다. "소비도 이념적으로 하시나요?". 사람들은 그 말에 당황하며, 어떤 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어떤 이는 금새 맞장구를 쳤고, 또 어떤 이는 나름의 논리로 반박을 하기도 했지만, 그 어떤 사람도 이렇게 말 하는 사람은 없었다. "네, 맞습니다. 저는 소비를 이념적으로 합니다".


    이념[理念]: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생각이나 견해.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자본주의라는 것 자체가 사회 시스템이면서도 하나의 이념이다. 이 시스템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잘 맞는다는 생각, 인간이 발전시켜온 사회체제 중에서 그나마 가장 발전한 개념이라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견해. 그렇다면 이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큰 기둥인 생산과 소비는 이념적일 수 밖에 없다.

    단적으로 일반적인 대기업 사장이나 임원들이 노조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한가. 그리 탐탁치 않아한다. 왜 그런가. 회사의 효율을 끝까지 끌어올려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즉, 순수 자본주의에서의 생산이라는 이념을 추구하는 데 걸림돌이라는 거고, 다시말하자면 그들은 생산을 이념적으로 하고 있다는 거다. 그런데 소비는 이념적으로 하지 말라고? 그래야겠지, 생각 없는 소비자들이어야 좀 더 그들의 미끼를 물고, 그들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 할 테니까. (말이 너무 길어지니 결론만 간단히 하자.)

    소비는 이념적이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완벽한 체제가 아니라는 것은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이 필요한 거고, 또 그렇게 해 왔다.

    케네디가 빈곤자들에게 복지수당을 주겠다고 했을 때 의원들은 노발대발 얼굴을 붉혔고,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 했다. "저 새파란 빨갱이 놈이 나라를 공산당에게 팔아 넘기려 한다". 그 때까지만 해도, 아니 지금도, 그런 개념은 공산주의에서 온 개념이니까.

    그렇게 수정하고 바꾸어 온 사회체제였지만, 결국은 자본의 논리에 점철당하고 자본은 더욱 고도화 된 기교들을 자꾸만 고안한다. 그 결과, 아직 과정에 있지만, 빈익빈 부익부, 부 편중 현상이 더욱 심해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젠 누군가 큰 나리가 납시어 한 나라를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는 스토리는 현실성이 없다. 남은건 실존하고 있는 나. 그리고 나의 실존으로 증명되는 상대적 존재인 당신 뿐이다. 

    '우리'라는 개념은 그 존재성이 상대적인데, 내가 참여하지 않으면 그저 추상적인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참여하면 '우리'는 실존하는 추상 개념으로 객체화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지금 무언가 시작해야 하고, 나로부터 무언가 시작되게끔 해야 하는 이유다. 물론 그것이 우리로 퍼져나감을 미리 염두에 둔다면 나중에 지쳐 쓰러질 수도 있으니 그러지는 말자. 실존하는 내가 이렇게 한다면, 최소한 내 세상은 그런 세상이 되는 거다.

    따라서, 궁상으로 시작해서 사회 비판을 거쳐 철학 세계로 어설프게 중구난방 뻗어버린 이 글을 대략 마무리하자면, 생각하는 세상이 있고 그 일을 추구하는 데 별다른 불이익이 없으며 희생해야 할 대가가 충분히 감내할만 한 일이라면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게 맞지 않겠냐는 거다.

    아주 작은 일을 크게 부풀려서 그럴듯 하게 잘 포장해내는 것을 보면 난 참 예술가를 해야할 것 같은데 어쨌든, 처음엔 나 혼자 사무실에서 도시락을 까먹었지만 지금은 둘쑥날쑥해도 몇몇 사람이 도시락을 싸오기 시작했다. 거대 담론은 말발 따먹기 할 때나 쓰고, 실생활에서는 조그만 행동을 해보자. 최소한 나는 내 세상을 바꾸어나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 정도 일, 동의만 한다면 여러분들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p.s.
    아무래도 이거, 나중에 다시 읽으면서 후회할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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