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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라나시에서 마지막 날에
    잡다구리 2007. 7. 3. 13:32
    지쳐버렸어요.
    이젠 길 가다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국말로 인사를 해 와도
    그냥 무시해 버리죠. 대꾸는 고사하고 거들떠도 안 보고 지나쳐 버려요.
    삼 할은 몸이 안 좋아서이구요,
    삼 할은 인도애들 잘못이죠. 워낙 피곤하게 구니까요.
    또 삼 할은 분위기 탓이죠. 관광지이니까 끝에는 결국 돈이거든요.
    그리고 나머지 일 할은, 운명이죠.
     
    피곤한 나날들의 연속이네요.
    바라나시라는 도시가 저랑 맞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마날리부터 슬금슬금 아파 오던 것이 이제 극에 달한 걸까요.
    지금은 가까운 거리 걷는 데도 땀이 줄줄 흘러 내리죠.
    연일 비가 와서 서늘한 날씨가 계속 되는 데도 말예요.
    입맛도 없어서 현지 음식은 입에도 못 데고 있어요.
    한 일주일 전부터 현지 음식은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더군요.
    그나마 한국 음식도 억지로 억지로 그릇을 비우는 중이죠.
    유일한 한 줄기 빛은 비타민 씨 알약이에요.
    그것만 그럭저럭 먹을 만 하더군요.
     
    오늘밤 바라나시에서 고락푸르로 가는 기차를 타죠.
    고락푸르에서 소나울리로 갈 거에요.
    소나울리는 국경 마을이라더군요.
    거기서 네팔로 들어갈 예정이에요.
     
    인도에 폭탄 테러도 일어나고 비도 많이 오고 해서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만 이제 별 상관 없어요,
    내일이면 네팔로 들어가 있을 테니까요.
    네팔에 가면 포카라에서 조용히 며칠 쉬어야겠어요.
    맛있는 티벳 음식들을 먹으며 한적한 날들을 보낼 생각이죠.
     
    만약 바라나시로 올 생각이 있는 분이라면 빨리 오는게 좋겠어요.
    몬순이 시작되어 연일 엄청난 비가 퍼붓고 있는데,
    사흘만에 가트들이 꽤 많이 물에 잠겼거든요.
    이 추세라면 몇 주 내에 강변으로 쭉 걸어다니는 건 불가능해 질 거에요.
     
    어제는 가트 화장터에서 화장하는 장면을 넋놓고 보고 있었죠.
    남들은 그 장면을 보면서 '인생무상'이나, '어떻게 살아야 할까'등을
    생각한 사람들도 많다고 하던데, 저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게 뭐 그리 특별하고 특이한 장면일까라는 의구심.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기한 장면도 아니지 않나요.
    감정이 무뎌져 버려서 그런 걸까요. 피곤에 지쳐 그런 걸까요.
     
    인도는 철학하는 곳이 아니라, 철학을 하게끔 하는 곳이다라는 말도 있어요.
    아마도 그건 철학을 하는, 혹은 하려는, 혹은 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들이
    인도를 찾기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요. 인도에 대한 환상은 버려요.
    특별한 의미를 두는 그 어떤 곳이라도 특별할 수 있죠.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의 장소를 인도에서 찾았을 뿐이죠.
    사람에 따라서는 도쿄에서도, 뉴욕에서도 철학을 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기차는 자정에 떠나죠.
    남인도 지역을 돌아보기 위해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오고 싶어요.
    단순히 가 보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라는 이유 외엔 없죠.
    물론, 북인도 중 라다크 지역은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죠.
    그쪽은 길도 험하고 갈 수 있는 시기도 정해져 있어서
    시간 맞춰 다시 한 번 가기는 정말 힘들 것 같지만요.
     
    어쨌든 이렇게 짧은 인도 여행이 막을 내리려 하고 있어요.
    바라나시에서 한 거라곤 강변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한 것 밖에 없는데.
    한국식당에서 죽치고 앉아 책 보고 수다떠는데 시간을 다 보내고 떠나네요.
    좀 아쉽기도 하고 잘 쉬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모르겠네요.
     
    일기장을 보니 여행을 시작한지 근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기분으로는 여행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밖에 안 된 것 같네요.
    물에 뜬 기름처럼 둥둥 떠서 거의 움직임이 없는 느낌이에요.
     
    새로운 환경을 접하면 새로운 느낌이 들까요.
    일단은 그런 것 바라지 않아요.
    항상 그랬죠, 새로운 것이란 다가오기 전의 설레임 뿐이에요.
    막상 닥쳐보면 별 것 아니죠.
    눈 앞에 다가서는 순간, 새로움은 평범함으로 바뀌어 버리니까요.
     
    왜 여행을 하는 걸까요, 왜 여행을 하는 걸까요.
    돈이 남아 돌아서 전세계에 부를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해서는 아닌데.
    시간이 남아 돌아서 좀 더 즐거운 놀이를 위해서 그러는 것도 아닌데.
    돈 써가며 고생해가며 왜 그 길을 굳이 가려는 걸까요, 왜.
     
    그 길, 굳이 가야만 하나요?
     
     
     
    p.s.
    인도에서 휴대전화 자동로밍이 된다고 해서 들고 왔는데,
    제가 가진 휴대전화는 구형이라 인도 로밍 기능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문자 보내도 받을 수 없어요.

    (200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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