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따라가다
낡은 길이었다. 군데군데 부숴지고 무너진 길. 한 때는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었던 흔적만이 조금씩 남아있는 길. 여기도 처음부터 이렇게 내버려진 곳은 아니었노라고 온 몸으로 절규하듯 소리치듯 누워있는 길. 그나마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던 길은 모퉁이 절벽에 다다라서는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가까이 파도소리가 들렸지만 바다로 통하는 길은 다 막혀 있었고, 밝은 대낮이었지만 사람 하나 지나다니지 않는 을씨년스러움. 집들은 있었지만 인기척이 없었고, 바다는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있었지만 닿을 수 없었고, 뭔가는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갈까, 문득 멈추어진 발걸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찰라, 몇 걸음 앞에 느닷없이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짧은 코와 매서운 눈초리, 이마에 난 세 줄의 얼룩무늬가 인상적인, 등은 황토색이고 배쪽은 하얀 색인 작은 고양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걸어오는 모습도 본 적 없는데 어느새 내 앞에 서서는 나를 지긋이 쳐다보며 길고 맑은 소리를 냈다.
고양이는 무심히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나를 돌아보고는 따라오라고 짧게 제촉하는 소리를 냈다.
어느 집 작은 쪽문, 거의 허물어져서 반은 떨어져 있는 문짝 사이로 고양이가 슬금슬금 걸어갔다. 삐걱, 소리를 내며 문을 조금 젖히고는 나도 뒤따라 갔다.
그 안은 마당이었고, 한 쪽 옆으로 헐려진 채 방치된 집이 있었다. 허물어진 벽 사이로 가재도구들이 몇몇 눈에 띄었고, 작은 헝겊인형 하나가 찢어진 채 그 속에 놓여 있었다. 한 때는 사랑했을 냉정한 연인처럼, 집은 온기가 없었고 인형은 지쳐 있었고, 고양이는 그 위를 지나갔다.
작은 마당을 지나, 집의 일부분이 무너진 잔해들을 지나, 몇 백 년이고 그 곳에 서 있었을 것만 같은 현명한 노인같은 나무를 지나, 다시 작은 문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통로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마당은 바로 백사장과 연결되어 있었고, 짧은 백사장을 지나 너댓 걸음만에 바다에 닿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꿈결같이 바다로 흘러갔다.
잠시나마 함께 있어 줄 친구가 필요했던거니, 고양이는 작고 야무진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 잠시 바다바라기를 하자꾸나, 나는 잡동사니들이 버려진 작은 천막 옆의 약간 부숴진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신기하지 않니 세상은, 그냥 바람이 부는 것 뿐인데 내 마음이 흔들려.
이상하지 않니 우리는, 그냥 마음이 흔들리는 것 뿐인데 몸이 굳어버려.
그래도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으니까. 고양이는 자리를 옮겨 모래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여전히 시선은 바다를 응시한 채.
이상한 건 말이지, 하늘은 바다와 맞닿아있고, 바다는 모래와 맞닿아있고, 나는 그 모래 위에 있는데, 어째서 나는 바다에도 하늘에도 닿을 수 없냐는 거야.
나는 고양이가 엎드려 있는 모래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고, 고양이는 나를 피하듯 슬금슬금 일어나서 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다시 자리를 잡고 엎드렸다.
맞닿은 모든 것들은 쓸쓸하니까. 바다 그 자체의 색깔보다, 하늘 그 자체의 색깔보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의 경계선이 더욱 진하게 표시되듯이, 우리 사이에는 벽이 있고, 경계선이 있고, 간격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뚜렷한 색깔을 가진 존재들일수록 더욱 뚜렷한 벽과, 진한 경계선과, 넓은 간격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거겠지. 그래서 우리는 서로 맞닿을 수 없어. 바다가 너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너는 바다에게 다가갈 수 있지만, 그 속에 닿을 순 없지, 아무리 깊이 들어간다 해도, 아무리 멀리 나아간다 해도.
갑자기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화살처럼 따가운 햇볕만큼 강렬한 바람이 불어, 파도가 더욱 거세게 구름을 몰아냈다.
구름을 따라 떠밀리듯 날아온 한 마리 나비가 고양이 머리 위를 서성였다. 고양이는 힘차게 팔을 뻗어 나비를 쫓아냈다. 쉽게 떠나지 않는 나비, 몇 번의 공허한 휘저음. 마침내 나비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고양이는 다시 배를 깔고 엎드렸다.
난 말야, 나비를 좋아하지 않아. 나비가 내게 접근하는 걸 막으려고 팔을 휘둘러 쫓아내면, 다른 이들은 내가 나비를 좋아해서 잡으려 한다고 생각하거든. 정말 귀찮아, 벽을 깨고 들어오려는 것들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하지, 조금 더 많이 알고 싶어하지,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고 싶어하고, 조금 더 쉽게 만나고 싶어하지. 좀 더 많이, 좀 더 많이, 좀 더 많이. 그 욕심의 끝에선 더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것, 혹은 더이상 노력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뒤돌아서서 나가버리는 거야. 항상 그런 식이지, 몸은 붙어 있어도 이미 되돌아 나간 이는 평행선을 그을 수 밖에 없어. 그렇다면 애초부터 벽을 허물지 말았어야지. 무너진 벽만 남겨둔 채, 심심하면 들락날락 들여다보며 자신만의 안정감을 느끼며 평행선을 그어가면서도 말로는 서로 맞닿아 있다고들 해. 대체 무슨 짓인지.
그러니까 문이 없는 벽을 쌓을 필요가 있어. 밖에서 누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지혜도 필요해. 심심할 땐 그 벽에다 그림을 그려. 벽만 보고 가는 건 괜찮지만, 들어오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걸 알리는 표시.
그래야 이 잔인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어. 벽을 깨고 들어온 건 그 쪽이면서, 응답하지 않았다며 죄인이 되는 건 바로 나야. 어렵게 쌓았지만 허물어진 벽도 내 벽이고, 그걸 다시 쌓아 올려야 하는 것도 바로 나인데, 그런 내가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잔인한 세상이야. 그러니까 알려야 해, 다른 데로 가라고, 부디 세상에 다른 존재도 많으니까 나는 좀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갑자기 고양이가 몸을 일으켜 바닷가로 달려가더니 날랜 동작으로 바다 속의 무언가를 앞발로 쳐 냈다. 모래 위에는 방금 잡혀 나온 조그만 물고기가 아둥바둥 몸을 튀기며 아가미질을 하고 있었다.
그 깊고 어둡고 차가운 물 속에서 너를 꺼내 주겠다는 약속이 몇 번, 또 그 약속의 미끼를 물고 아픈 바늘을 참으며 물 밖으로 꺼내진 게 몇 번, 그러면서도 그 밝고 파란 햇살을 못 잊어 수평선 위를 아련히 거니는 어리석음.
아무리 무겁고, 어둡고, 절망적이고, 힘 든 저 깊고깊은 물 속이라지만, 그 밖을 나와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잠시의 따뜻함과 순간의 희망과, 찰라의 화려함 뒤에 찾아오는 죽음의 시간은 어찌하려고. 물고기는 필사적으로 몸을 파닥파닥 튀겨 올리더니 결국은 얕은 파도에 의지해 바다로 돌아갔다.
그런거야, 난 단지 바다를 사랑했을 뿐이고, 그 일부분인 파도를 어루만졌을 뿐인데 느닷없이 물고기 한 마리가 잡혀 나온 거지.
고양이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는 듯이 가늘게 눈을 뜨고는, 슬금슬금 움을 돌려 썩은 나무둥치 앞으로 가 앉아 앞발을 혀로 핥았다. 사랑이란 백 년 묵은 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같은 것이 아니야, 이미 썩어 무너져 흙바닥을 나뒹구는 나무둥치 속의 어둠같은 거야.
누군가는 그 속에서 쉬어가면서 아무 차이 없는 그늘일 뿐이라고 생각하겠지. 그 오랜 세월을 견디다가 어째서 더는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는지, 어째서 아무 연고도 없는 이 하얀 백사장에서 뒹굴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 없어.
고양이는 먼 수평선을 아련하게 바라보더니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짧은 작별인사를 남기고 내 곁을 떠나갔다. 그러니까 우리는 벽을 알려야 하는 거야. 여기 벽이 있다고, 아주 높고 두껍다고, 그러니까 그냥 가라고. 방심하는 사이 누군가 그 벽을 부수고 들어오면 또 나만 나쁜 놈이 되는 잔인한 세상이니까. 차라리 남의 벽을 부수고 다닐 수 없을 망정에야 애초부터 접근을 막는 수 밖에 없는 거지.
그리곤 폐허 속, 또다른 집의 무너진 잔해 속에 나는 남겨졌다. 멀리 바다소리를 뒤로하고 밀림같은 숲을 지나 다시 밝고 맑고 아름답게 부숴진 폐허 속에 발을 디뎠다. 바다보다 깨끗한, 하늘보다 명랑한, 숲보다 아늑한, 개울보다 다정한, 그러나 집보다 공포스러운 그 폐허 속에, 길 위에,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를 바라보는 나비의 눈물같은 발걸음을 사뿐사뿐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