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혼자 산다. 퇴근 후에도 집에 가기 싫어서, 일부러 밤 늦게까지 길거리를 쏘다니다 들어가곤 했다. 이미 차갑게 굳어버린 찬밥을 억지로 목구멍에 밀어 넣듯 열쇠를 밀어넣고 문을 열면, 맨 먼저 그를 맞아 주는 것은 늘 똑같은 하루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자신의 미래같은 어둠이었다. 도마뱀의 피부처럼 차갑게 식은 방, 그는 마치 유령처럼 오가며 그 속에 또아리를 틀었다. 이미 오래전에 질려버린 인스턴트 음식들을 꾸역꾸역 삼켰으며, 마지막으로 빤 게 언젠지 알 수 없는 온갖 냄새가 뒤범벅이 된 이불을 꾸역꾸역 덮어 쌌으며, 내일 또 돌아올 똑같은 삶을 위해 꾸역꾸역 쓰러져 자기를 반복했다. 그런 날이 영원히, 아주 오랜동안, 마치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반복되어, 산다는 건 그저 밥을 먹는 거고, 밥을 먹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선 회사를 나간다는, 그런 의미 외에 특별한 것은 없다고 이미 식어버린 가슴 속 저 깊에 못을 박아두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꾸역꾸역 살아갔다.
그렇게 2009년을 맞이했다. 이미 달력따위는 공휴일을 챙기는 용도 외엔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의 나열일 뿐이었다. 그나마도 비상근무체제라는 명목 하에 공휴일에도 불려 나가 회사 의자에 앉아 있어야만 했던 그런 날에 책상 위의 달력을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짜증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뿐이었다. 뭔가 급하고 중요한 일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듯이 사람들을 불러 앉혀 놓았지만, 사실은 몇몇 사람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자리에 앉아 인터넷이나 뒤지다가, 뮤직비디오나 보다가, 게임이나 하다가,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을 참지 못하고 조금 졸다가 밥이나 먹으러 가는 비상근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일이지만 이젠 대충 안다, 세상은 합리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혼자 불평하고, 생각하고, 따져보아도, 세상은 그냥 그렇게 굴러간다는 것을. 그래서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한 마리 개가 되어 밥그릇에 떠 넣어 주는 밥이나 대충 챙겨 먹으면 된다는 것을.
의미없이 보낸 시간 뒤에, 의미없는 밥을, 별로 배가 고프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이 먹으러 가니까, 꾸역꾸역, 목구멍에 떠 넘기려고 문을 나설 무렵, 성능 좋지 않은 냉장고 냉동실에 설얼은 얼음처럼 푸석푸석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라고 해야할까, 덜 얼은 우박이라고 해야할까. 어쨌든 아침부터 어둑했던 구름 아래로 이미 눈은 꽤 내려 있었고, 바깥은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혀 있었다. 아직 날씨가 흐려서 눈은 제 빛깔을 내지 못하고 어스름한 회백색을 띄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충 하얀색이라고 해도 될 만큼 충분히 맑고 깨끗했다. 이제 곧 사람들 발에 밟혀서 더럽고 시커멓고, 미끄럽기만 한 애물단지로 변할 운명. 그렇게 되려고 내려온 건 아닐테지만 어쩔 수 없지 하며 한 발 내딛는 순간, 갑자기 떠올라버렸다 그 옛날의 기억.
한창 세기말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종말론이 난무하고 어두운 말들과 생각들과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었던 1999년. 그 때 했던 약속이 있었다. 만약 우리가 살아 남는다면, 이라는 농담으로 시작했던 짧은 대화. 십 년 후엔 1월이 돼도 눈이 안 올 수도 있고, 8월에도 눈이 내릴 수도 있는, 그런 기상이변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라는, 세기말 사조에 어울리는 그런 상상을 하며 마음껏 우울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1월이 됐든, 8월이 됐든, 첫 눈이 내리면 여기서 다시 만나자라며 끝났던 그 대화. 실없는 농담 속에, 실없는 상상 속에, 실없는 약속. 그 후에도 몇 년을 아무렇지 않게 함께 다녔는데, 이제와서 갑자기, 느닷없이, 어이없이, 황당하게 그런 것이 떠오르다니. 저절로 피식하고 코웃음이 툭 터져나왔다.
일곱시간 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그는 결국 약속을 지켜버렸다. 약속이라고 할 수나 있을까, 그냥 실없이 주고받던 잡담 속에서 툭 던져졌던 한 마디 말이었을 뿐이었는데. 어쩌면 할 일 없이 회사에 앉아 시간만 죽이고 있는 자신이 한심함을 벗어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몇 년째 반복되는 프로그래밍 된 삶을 잠시나마 뛰쳐 나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혹시나 그렇게 넌지시 던진 한 마디 말이었지만, 그녀 역시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굳이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지만, 만나서 할 말도 별로 없지만, 만나면 뭘 해야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름 기대를 안고 갔던 건 사실이었겠지. 그러니까 부랴부랴 기차를 잡아타고 어둑해질 무렵 도착해서는, 그래도 행여나, 그래도 혹시나, 어쩌면 지금즘, 어쩌면 조금 있다가, 하며 밤 늦게까지 그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던 거겠지. 어딘가 쉬려고 들어갈 곳을 찾았을 때도 그 장소가 잘 보이는 곳으로 고르고 또 골랐고, 운 좋게도 마침 비어있던 어느 카페 일층 창 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눈을 때지 않고 있었으면서도 안절부절 못 했던 거였겠지.
아마도 나중에 누군가에게 이 얘기를 꺼낼 때가 있다면, 그냥 심심해서 한 번 가 봤다라고, 그런 약속 하나 즘 있는 것도 사는 재미 중에 하나가 아니겠느냐고, 딱히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었노라고, 이미 삶은 소설이나 영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그렇게 말 할 테지. 그래도 혹시나 하면서, 어쩌면 나도 이 거대하고 바보같은 시스템 속의 작고 보잘것 없는 하나의 부속품이 아니라, 주인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연 정도는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했었다는 사실은 마음 속 저 깊이 숨겨놓겠지. 몇 천 킬로미터 아래의 심해에 가라앉은 작고 작은 보석처럼 꼭꼭 숨겨져서는, 어느날 문득 그 기억 다시 떠오르는 날 오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조차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깊게 꽁꽁 묻혀지겠지. 그래도 혼자만의 비밀이라고 칭할 만 한 추억하나 생겼으니 그걸로 위한 삼으면 될런가.
밤 열한 시. 그는 눈 때문에 일곱시간이나 걸린 길을 다시 되돌아 갔다. 돌아가는 길은 밤이라, 어둠때문에 더 오래 걸렸다. 도착하면 아침, 바로 회사로 출근 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다시, 다시, 똑같은 생활이 기다리고 있겠지. 터덜터덜 기차는 선로를 따라 꾸역꾸역, 길을 재촉했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눈이 내렸고, 어두운 창 밖은, 내리는 눈에 가려서 깜깜한 어둠 말고는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산골 마을 오두막집 작은 불빛이라도 하나 보이지 않을까싶어 눈 가를 손바닥으로 막고 창문에 바싹 갖다 댔다.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세상은 너무 차갑다. 웬 눈이 이리도 꾸역꾸역 내리나. 어쩌면 기차가 하늘을 날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는, 어쩌면,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