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때문에 3편까지 쓰기는 하지만, 이제 더이상 길게 설명할 것은 없다. 포스팅 하나에 사진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귀찮은 일들이 생기기도 하고, 또 사진을 너무 많이 나열한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분량을 자른 것 뿐이다. 벽화전의 스케치를 본다는 의미에서 즐겨 주시라.
아침 일찍 나오신 분이 팀원들이 하루종일 쓸 색을 만들고 있다. 작업량이 많고, 팀원이 많은 만큼 종이컵보다는 일회용 접시에 한가득 색을 담았다. 수성 페인트는 주로 흰색을 섞어 색깔을 만들기 때문에, 색깔이 대체로 연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색 조합을 잘 사용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파스텔 톤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색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장점.
처음 전문가들의 짐을 보았을 때는 깜짝 놀랐다. 차 트렁크 한 가득 각양각색의 페인트들을 싣고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때그때 만든 색깔들이 남아서 보관하며 다니는 것 뿐이라 했다. 벽화 작업을 위해 새로 살 페인트 색깔은 대여섯 개 정도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서로 섞고 조합해서 만들면 된다. 흰색이 많이 쓰이기 때문에 흰 페인트는 큰 통으로 사는 것이 좋다.
페인트 붓도 생각보다는 쌌다. 사실 수채화나 유화처럼 붓이 좋을 필요가 없긴 하다. 대충 페인트 발라서 칠해 지기만 하면 되니까. 상태가 좋은 붓은 다시 씻어서 다음 작업에 사용하기도 하지만, 굳거나 망가진 붓은 과감히 버렸다. 흰색을 칠하는 붓은 따로 준비해 두는 것이 작업을 편하게 한다.
통여중 아이들이 그려놓은 벽 위에 세부적인 것들을 추가해서 좀 더 예쁘게 보이도록 작업하러 오신 선생님. 이 선생님 덕에 아이들의 그림에 아기자기한 부분들이 더해졌다.
외국인으로만 이루어진 팀인 만큼, 애덤과 터커에게는 통역사가 붙여졌다. 이 둘이 작업하는 동안 거의 매일 나와서 옆에서 도움을 준 통역사 분도 많이 수고하셨다.
동피랑 구판장 앞은 언제나 구경 온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고, 작업 하다가 잠시 쉴 때도 요긴한 곳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 경치가, 타지인들에게는 2주 내내 봐도 감탄스럽기만 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도 이런 곳에 허름한 집 하나 구해서 정착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참고로 강구항 전경은 낮보다는 밤이, 밤보다는 새벽이 더욱 볼 만 하다.
이 처자들이 통영 가이드 해 주기로 했는데, 결국 통영 구경은 하나도 못 하고 말았다. 나중에라도 꼭 한 번 다시 들러서 동피랑 말고 다른 곳들도 가 봐야지. 통영 가서 그 유명한 해저터널도 못 보고 왔다는 건 참... (별 볼 것 없다고는 하지만)
벽화는 대체로 하루종일 서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꽤 체력을 요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가만히 서서 그릴 수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땅바닥 구석이나 높은 곳을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그려야 할 때면 체력이 두 배로 요구된다. 벽화는 잘 그리기도 어렵지만, 그냥 그리기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사다리도 페인트도 누가 갖다주지 않는다. 아무리 전문가라도, 예술가라도 자기가 직접 옮기고 갖다 놓아야 한다. 집에 가기 전에는 또 대충 치우고, 사용한 도구도 본부에 갖다 놓아야만 한다. 도구들 다 갖춰주고 딱 그림만 그릴 수 있게 해 준게 아니다. 그림 그리는 것 외에도 여러가지로 힘이 들고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음악가족'은 거의 어머니와 딸 둘이서 그 큰 벽화를 다 완성시켰다. 물론 벽화를 처음 그려보는 가족이었다. 여러모로 시행착오를 거친 모습도 보였지만, 하루를 온종일 벽화작업에 바치는 것으로 극복해냈다. 다른 팀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소품들을 사용했고, 주변의 사물을 이용한 색다른 시도들도 눈에 띄는 팀이었다.
짜장면 빈 그릇이 쌓여 있는 것을 배경으로 이들이 작업하고 있는 모습도 사진을 찍었지만, 너무 처량해 보여서 차마 공개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처량하게 작업했다는 뜻은 아니다).
친구끼리, 연인끼리 팀을 이루고 벽화 작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팀들도 있었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벽화 작업을 한다는 그들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어서 즐겁다고 했다. 세상에 찾아보면, 힘은 좀 들지만, 즐겁게 일 할 수 있는 직업들은 얼마든지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바닥에 발을 들여 놓기가 어렵다는 건 별개의 문제지만.
터커의 약혼녀도 자주 들러 이들의 작업을 도왔다. 터커의 약혼녀는 제빵사 자격증이 있다 한다. 그래서 터커는 수시로 약혼녀가 만들어 준 거라며 빵이나 과자들을 내게도 나줘 주었다. 맛은 있었다. 특히 바나나 머핀은 통영에 빵집을 차려도 될 정도였다. 다만 약혼녀와의 너무 다정한 모습이 좀 샘이 났을 뿐.
하루에도 수십 번 동피랑 산동네 골목길을 오르내렸다. 작업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려고 오기도 했고, 경치를 감상하러 오기도 했으며, 구판장에 밥을 사 먹으러 가기도 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오르기도 했고, 각종 도구들을 빌리려고 가기도 했으며, 잠시 쉬러 가기 위해 오르기도 했다. 낮이면 낮대로, 밤이면 밤대로 오르고 또 오르고 올랐다. 때로는 너무 피곤하기도 했지만, 이 때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 보겠냐며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나, 무슨 일이든 그렇겠지만, 이제 저 길은 내 기억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아직 추억이라 부를 만큼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지만, 분명 후에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임이 틀림없다. 워낙 사람들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데 능력이 없어서, 그 때 그 곳에서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에게 아직 연락조차 드리지 못했다. 많이 고마웠고, 많이 즐거웠고, 많이 기억하고 있다고, 이 기회를 빌어 이야기 하고 싶다.
바다 저 멀리 어디론가 떠난 여행보다 더욱 값진 경험과 시간들을 내게 선물해 준 동피랑에게 깊이 고마움을 느낀다. 내 동피랑 관련 글에 조금의 애정이라도 느껴진다면, 그 마음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마워, 동피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