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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의 끝을 본 적 있었다
    사진일기 2010. 6. 15. 01:44




    언젠가 중국에서 하루 밤낮을 꼬박 달리는 기차를 탄 적 있다. 한 쪽 벽에 세 개씩 침대가 층층이 있었고, 각 침대들이 양쪽으로 각각 마주보는 형태의 침대칸. 침대칸 중에는 가장 싼 객실이었지만, 중국인들 특히 시골 사람들 물가로 봐서는 그리 싸다고 할 수는 없는 가격이었다.

    시골에서 출발한 기차라 그런지 승객도 별로 없었는데, 내 자리 맞은 편에는 내 또래의 중국 소녀 하나만 조용히 앉아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주춤주춤 흐르는 어색한 시간 끝에, 먹거리를 판매하는 사람이 통로를 지나왔다. 

    소녀는 보잘것 없이 아무렇게나 포장된 듯 한 투명한 비닐봉지에 싸여진 먹거리를 샀고, 느닷없이 내게 그걸 건네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야'라고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물고를 트게 된 대화는 서로 알듯 모를 듯 한 영어와 중국어로 끊길듯 끊길듯 하면서도 길게 길게 이어졌다.   



    소녀는 여권이 무엇인지, 비자가 무엇인지 몰랐다. 내가 보여준 여권을 보고는, '호적'이라 했다. 자기도 지금 가는 곳에 숙소가 있고, 그곳에 자기 호적이 있다 했다. 고향을 떠나 멀리서 일하고 있다는 그 소녀는, 단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천 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를 왔다가는 거라 했다. 그나마도 차비가 비싸서 평소엔 웬만해선 엄두를 낼 수 없다 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너나, 너네 한국인들은, 얼마나 돈을 많이 벌길래 이렇게 여행도 하고 그러니?"





    라오스에서 과일주스 노점을 하는 소녀가 말했다. "나도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그래서 이렇게 번 돈 대부분을 가족에게 갖다주지만, 따로 조금씩 모으고 있어". 그날그날 장사가 어떠냐에 따라 달라지고, 매일매일 돈을 모을 수도 없지만, 대충 하루에 반달러 정도씩 모으고 있다 했다.

    "나도 언젠가는 저 사람들처럼 저렇게 세상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닐테야" 라며, 길 건너편 고급 레스토랑 야외 좌석에서 한 잔에 30달러 짜리 와인을 홀짝이고 있는 유럽인들을 가리켰다. 그당시 나는 참 난감한 기분이었다. 그 소녀는 그 레스토랑 메뉴판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적 있을까. 그녀가 한나절 땡볕에 서서 일해 일주일을 차곡차곡 모은 돈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밥 한 끼 정도의 가치라는 사실을 상상이나 해 봤을까.

    섣부른 희망도, 섣부를 절망도 말해줄 수 없었고, 안겨주기 싫었다. 하루에 0.5달러로 세계여행의 꿈을 꾸고 있었던 그 소녀에게, 나는 옅은 미소 밖에 아무 것도 줄 수 없었다. 

     



    주말에 하닐없이 인사동을 거닐었다. 예전보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더 많아진 듯 했다. 국적도 참 다양해서, 서양인들은 물론이고,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아시아 각국 사람들까지 모여서 북적였다. 어쩌면 이 동네가 한국의 여행자거리가 돼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백팩커에게 필수적인 '싼 가격'이 없어서 여행자 거리가 형성되기는 어렵겠지만.

    한쪽 귀퉁이 그늘 아래 앉아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러는 혼자, 더러는 가족이, 더러는 패키지로 온 여행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즐거운 표정이었다. 초여름으로 접어든 날씨에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도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는 그들의 모습은, 한 마디로 환희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아, 나도 저렇게 빛 날 때가 있었지.

    이제서야 외국인 관광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현지인들의 시선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아니, 그들의 시선이 모두 그런 의미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단지 그들 중 일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다고 말 할 수 있을 뿐.

    나는 '이런 곳이라면 평생 뿌리 내리고 살아도 좋아'라고 생각했던 티벳 고원의 푸른 초원에서, 야크 몰이를 하는 한 청년은 '나도 너처럼 바람처럼 여기를 떠났으면 좋겠다'라고 했으니까. '그럼 우리, 바꿀까'라고 내가 건낸 말에, 그는 씨익 웃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농담은 참으로 잔인한 교만이었다. 그것을 잘 받아준 그의 넓은 아량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어떤 상황이든 상대적이긴 하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 다른 상황과 비교하게 되면, 상대우위가 생긴다. 누구는 평생 매일매일 고된 노동을 해도 여행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하지만, 누구는 한 일 년 일 하면 한 번 즘 훌쩍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러고보면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내 바램은 최소한 헛된 꿈으로 끝나지만은 않을 테니까.





    바람이 불고 있다. 정말 참고 견디기 힘든 희뿌연 악취의 둔탁한 공기 속에서, 저기 넓은 대륙 건너 히말라야에서 넘어온 향긋한 바람의 냄새가 살며시 코끝을 자극한다. 너무너무 희미해서 쉽게 알아챌 수는 없지만, 너무너무 강렬해서 한 번 맡으면 지울 수 없는 태고의 향기. 이미 나는 미쳐있고, 이미 나는 지쳐있다. 보들레르의 말처럼, 한 번 하늘의 끝을 본 자는 예전처럼 살아갈 수가 없다. 아아, 차라리 보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때늦은 후회도 해 보지만 그것마저 이내 잊혀진다. 이미 나는 열병에 걸렸고, 이미 나는 꿈속을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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