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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나는 인간이었다 - 관세청 탐지견 훈련센터 복제견에 대한 단상국내여행/경기도 2010. 10. 1. 15:30
"아무도 나와 똑같이 닮을 수는 없다.
심지어 어떤 때는, 나도 나와 닮기 힘들 때가 있다."
- 탈루아 뱅크헤드(Tallulah Bankhead)
한 손에는 술잔, 한 손에는 담배. 그리고 그윽하게 내리깐 눈처럼 쫙 깔린 음성으로 끈적하게,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알링"으로 불렀던 여자.
20세기 초반에 미국의 여배우로 활동했던 '탈루아 뱅크헤드(혹은, 탈루라 뱅크헤드)'는,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감독의 '구명보트(Lifeboat)'와, 게리쿠퍼(Gary Cooper)와 함께 출연한 'Devil and the Deep' 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작품활동보다, 평소에 드러나는 자신만의 개성과 위트로 더욱 유명한 배우였다.
여러모로 꽉 막힌 시대였던 그 당시에 그녀는 스스로 자신이 바이섹슈얼(Bisexual)이라 밝혔다. 그리고 수많은 미남, 미녀배우, 사회 저명인사 등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그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그녀는 거침없는 행동과 말들로 늘 화젯거리였다.
사람이름을 기억하는 게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을 '다알링(darling)'으로 불렀던 그녀에 대해, 지금까지도 수많은 에피소드와 말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에피소드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하루는 늘 술을 입에 달고 살던 탈루아에게, 의사가 술을 마시고 싶을 때마다 사과를 먹으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탈루아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끈적한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하지만 다알링, 하루에 사과 육십 개는 좀…"
탈루아 뱅크헤드(Tallulah Bankhead), 사진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갑자기 그녀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녀의 명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와 똑같이 닮을 수는 없다. 심지어 어떤 땐, 나도 나와 닮기 힘들 때가 있다"라는 그 말.
내 눈앞에서 실제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복제견을 보면서, 반 즘 얼얼한 정신으로 멍하니 사진을 찍으며, 암흑처럼 까만 머릿속에 느닷없이 그 말이 떠올라버렸다.
"다시 생을 산다면 난 똑같은 실수들을 저지를 거야 - 단지 좀 더 일찍."
- 탈루아 뱅크헤드(Tallulah Bankhead)
탐지견훈련센터에 들어서자마자 특유의 개 노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곳은 세관에서 각종 마약이나 폭발물, 위험물 등을 찾아내는 탐지견을 훈련시키는 곳이었다. 탐지견들을 훈련시키는 모습과, 짐 속에 숨겨진 마약을 찾아내는 시범을 보고, 우리 안에 있는 탐지견들 (혹은 탐지견 후보들)을 보는 일정이었다.
사람을 잘 따르고, 함께 장난치기도 좋아하는 탐지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몸값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탐지견들의 똑똑하고 영리한 모습을 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우리 일행의 눈앞에 데리고 나온 것은 적잖이 충격이었다. 바로 복제견이었다.
개들이 사람보다 냄새를 잘 맡기 때문에, 아무 개나 탐지견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 탐지견으로 사용하기 좋은 품종이 따로 있다. 그 좋은 품종으로 열 마리를 데려와서 열심히 훈련시키면, 그 중 두 마리 정도만 최종합격 해서 탐지견으로 활동한다. 최종합격 해서 탐지견으로 실전투입 되는 개의 몸값은 자그마치 1억이라 한다.
20~30% 정도의 합격률. 데려온 개가 탐지견이 되지 못했다해서 반품할 수도 없는 일. 게다가 일단 다들 좋은 품종이므로 몸값도 비싸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탐지견으로 우수한 능력을 보여준 개를 복제해서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2007년에 탐지견 복제를 시행했고, 그 해 10월에 일곱 마리의 복제견이 태어났다 한다. 탐지견으로 우수한 능력을 보여준 ‘체이스’라는 녀석의 체세포를 이용한 복제였다. '체이스'의 체세포를 다른 개의 난자에 넣고, 대리모를 이용해서 복제하는 방법이었다.
'체이스'의 복제견들 일곱 마리 중 한 마리는 부상을 당했고, 나머지 여섯 마리는 모두 탐지견 테스트에 합격했다. 그래서 다들 지금 현장에 투입되어 탐지견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거의 100%의 합격률. 그리고 이들은 다른 탐지견들보다 뛰어난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 한다.
복제견들이 아직 어떨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좀 더 운영해서 시험과정을 거친 다음에 본격적인 도입을 생각해 볼 예정이라 했다. 이미 탐지견 정자은행도 운영하고 있으므로,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앞으로 탐지견들은 대부분 복제견으로 대체되지 않을까 싶다.
탐지견훈련센터에서 우리 눈앞에 데리고 나온 녀석들은, 체세포 복제의 소스로 쓰여진 ‘체이스’와, 그의 복제견 중 하나인 ‘투피’였다. 투피는 부상을 당해서 다리를 절고 있었고, 그래서 현장투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각종 미디어와 언론을 통해서 복제된 생명체들에 대한 글과 사진은 많이 보았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눈앞에서 가까이 보기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들이 다른 개들과 다른 것도 아니었고, 뭔가 이상한 느낌이나 포스를 풍기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DNA가 99.9% 똑 같은 두 존재가 내 눈앞에 나란히 서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정신이 혼미했던 거였다. 두 녀석은 정말 생김새가 똑같았다. 털갈이를 하고 있어서 얼굴색이 서로 달라 보이긴 했지만, 그것만 아니면 완전히 똑 같은 모습이라 했다. 게다가 성격 또한 비슷해서, 둘이 붙여놓으면 항상 싸운다고 한다. 완전히 두 개체인 '나'였다.
'나 자신'이라 불러도 될 만큼이나 똑 같은 타인이라니. 아니, 바로 '나 자신'인 타인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의 관계는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친구일까, 가족일까, 나일까. 만약 당신이 나라면, 나는 대체 누구인 걸까. 그리고 그들의 윤회의 고리는 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 과업 중에 가장 어려운 마지막 시험이다.
다른 모든 것은 그 준비 작업에 불과하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하나의 체세포에서 탄생한 여럿의 복제 생명체들이라 할지라도, 살아가는 환경과 경험과 만남이 제각기 다 다르다. 모든 개체가 완벽하게 똑 같은 환경에서, 똑 같은 경험을 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만약 나의 경험과 살아온 과정에 의해 내가 정의된다면, 나는 오롯이 나 자신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다. 비록 나와 똑 같은 유전자를 가진 생명체들이 몇몇 더 있다 하더라도.
하지만 복제된 '나'들이 나와 똑 같은 생김새로, 나와 똑 같은 성격과, 똑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다면, 그 '나'들은 똑 같은 한 사람을 사랑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어차피 끌림도 개개인의 취향 차이이고, 제 눈의 안경이니까.
그렇다면 '나'로 태어난 우리들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만 하는 걸까.
만약 그렇지 않고, 다른 '나'들이 각각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비극이 아닐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처해진 상황과, 환경과, 경험에 따라 바뀌는 사랑이라면, 그것이 과연 사랑일까.
이미 한 사람을 겪어보고 난 다음에, 또 다른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것이라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들은 제각각 각자의 첫사랑을 할 테고, 두 번째를 맞을 테고, 또 세 번째, 네 번째 등을 맞을 테다. 병렬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사랑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내'가 단 한 사람이 아닌 제각기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조금 슬픈 일이지 않은가.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은, 나를 복제한 논리대로 해서,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을, 나의 수만큼 복제하는 걸까.
"자기 자신을 싸구려 취급하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역시 싸구려 취급을 받을 것이다."
- 윌리엄 헤즐릿
눈앞에 놓여진 복제 생명체를 보며,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내 짧은 지식과 경험으로는, 생명윤리라는 이 어려운 주제에 대하여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답은 고사하고 어떤 견해를 내놓기조차 어렵고, 무섭고, 두렵고, 복잡하다.
다만 나는 그들을 보며, 나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볼 뿐이었다.
제각기 다른 유일한(unique) 개체로 태어났으면서도, 복제된 것처럼 살아가는 세상. 똑 같은 방식을, 똑 같은 인식을, 똑 같은 생각을, 똑 같은 생활양식을 강요 받으며, 또 스스로에게 강요하며 살아가는 세상.
이미 부지불식간에 복제는 널리 행해지고 있었고, 또 행해지고 있다. 그 속에서 서서히 달구어지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그렇게 적응하고, 순응하며, ‘사는 게 다 그렇지’하며 살아가는 세상이다. 어느 의미 없는 밤거리, 느즈막한 술자리에서 나올 듯 한 그런 푸념은, 언제가 그렇듯 곧 잊혀지고 잠과 함께 사라진다.
평소와 같이 눈을 뜬 어느 날 아침,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게 아닌데'. 그러면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지각을 감수하고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겠지. 그리고는 다시, 또 똑같이, 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일어나 나가겠지. 하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가장 큰 피해를 끼친 말은 바로, '지금껏 항상 그렇게 해왔어’라는 말이다 (그레이스 호퍼)".
지금이 최악이야, 지금은 버텨야만 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이러이러해서 이것을 할 수 없고, 저러저러해서 저것을 할 수도 없으며, 또 다른 대안들이라곤 다들 현실성 없는 것들 뿐이야. 나는 그저, 지금은,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어. 하며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낭비해 왔던가.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낭비해야만 하는 걸까. 과연 나 같은 겁쟁이는 그것이 운명인걸까.
"'지금이 최악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직은 최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겁쟁이는 죽음에 앞서 여러 차례 죽지만, 용기 있는 자는 한 번밖에 죽지 않는다 (셰익스피어)".
용기를 내야 한다. 삶이라는 여행을, 노란 깃발을 들고 있는 가이드 따위에게 내맡길 수는 없다. 비록 나 스스로 어디까지, 얼만큼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어느 목적지에 가고자 여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가기 위해서 여행한다. 나는 여행을 위해서 여행한다. 중요한 것은 이동하는 것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나 자신을 오롯이 나 자신이게 만들 수 있는,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 방법뿐이다.
흔히들 자신을 소개할 때면, 자신의 직업이나 소속을 먼저 밝힌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는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인양, 자신을 대표하는 이미지인양 여긴다. 하지만 살면서 가지는 수많은 역할들과, 직업들. 내가 지금 나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 내가 지금 중요시 하고 있는 그것들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사실들일 뿐, 절대 나 자신이 될 수는 없다.
영화배우로도 꽤 유명했던 탈루아 뱅크헤드. 하지만 그녀 역시 다른 여배우들로 충분히 대체될 수 있는 위치였을 뿐이고, 인기가 떨어지면 그대로 잊혀질 직업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그 오랜 시간을 넘어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는 까닭은, 그녀의 미모보다는 그녀가 했던 행동과 그 강렬한 자의식의 표출 때문이었을테다.
그녀가 행했던 삶의 방식을 좋게 보든, 아니꼽게 보든, 그건 보는 사람들의 입장일 뿐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어떠하든간에 그녀는 변하지 않았을 테고, 실제로도 사람들 말에 따라 변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비록 직업이 배우라도, 그리고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이런저런 역할을 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규정짓는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을 테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내가 살아간 그리고 살고 있는 이 하루의 총합이지 않을까.
"'오늘'이란, 너무 평범한 날인 동시에,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괴테)". 나의 여행은 수많은 오늘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게 주어진 현실의 시간은 오늘 단 하루, 지금 이 순간 뿐이다. 나의 오늘이 나를 만들 테고, 이 하루가 내게 주어진 세상의 전부일 것이다. 그 하루가 나를 남과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내가 내 자신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결국 결론은 교과서같은 답으로 나와버렸다. 비록 사회 적응자로 훌륭하게 디자인 되어 편안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지라도, 복제개체 중 하나로 이 생을 마감하지는 말아야겠다는 것. 비록 복제개체로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 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졌어도, 나는 온몸으로 거부해야겠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존재로, 싸우고 또 싸워, 인간이 되어가야겠다.
"나는 인간이었다. 그것은 싸우는 자(者)라는 것을 의미한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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