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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삶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 스리랑카 여행기
    해외여행/스리랑카 2009 2011. 1. 11. 12:21

    2009, Sri Lanka, Galle
    (2009, Sri Lanka, Galle)



    내 삶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맛있지 않았고, 어떤 사람을 만나도 즐겁지 않았으며, 늘 가던 그 길은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었다. 어떤 책을 읽어도 흥미롭지 않았으며, 어떤 영화를 봐도 쉽사리 지쳤고, 어떤 그림을 봐도, 어떤 연극을 봐도, 어떤 전시를 봐도 내 눈빛은, 더이상 호기심에 반짝반짝 빛나지 않았다.

    무심한 듯 하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지켜보던 세상도 이젠 모두 다 지겨웠고, 때때로 그리던 그림도, 때때로 쓰던 글도, 때때로 부르던 사랑의 노래들도, 다 귀찮고, 다 부질없고, 덧없는 짓거리로 여겨졌다. 활기를 얻겠다며 떠난 국내여행에서는 참담한 외로움만 잔뜩 안고 돌아왔으며, 바쁘게 지내다보면 나아지겠지 해서 벌이고 또 벌이던 일들은 결국 배신이라는 이름으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덧없는 시간들을 아무런 의미 없이 넘쳐 흐르는 약수터의 물처럼 흘려 보내고, 소비하고, 낭비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무 일도 없는 무더운 여름 뜨거운 햇볕 아래서, 낙타의 등뼈를 부러뜨리는 마지막 한 줄기 지푸라기가 무심한 바람에 이끌려 툭, 하고 떨어졌다. 차라리 이럴 거면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어. 미래따윈 어찌돼도 상관없어. 그래서 다시 지긋지긋한 일상에 안녕을 외치며, 그렇게 다시 길을 떠났다.



    애초의 목적지는 인도였다.

    아직 가보지 못한 남인도를 한바퀴 돌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나를 자극할 만 한 그 어떤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 많이 겪은 곳도 아니고, 그리 자주 가는 곳도 아니고, 그리 익숙할 이유도, 그리 지겨울 이유도 전혀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마치 태어나기 전부터 겪었던 것처럼, 모든게 익숙하고 낮익은 모습. 더위가 나를 삼켰던 건지, 세상이 나를 모로 내몰았던 건지, 혹은 이제 나는 뭔가 크게 잘못돼 버린건지 모르겠지만, 한낮의 뙤약볕 아래서 더이상 새로울 것 없는 새로운 장소와 사람들의 모습들을 멍하니 지켜보며,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대출이나 몽땅 받아서 아마존이나 갈 걸 그랬나. 무기력의 저 깊은 심연에 빠져 있으면서도 현실은 현실이었다. 어째서 나는 좀 더 대책없는 길을 떠나지 못했던 걸까. 끝끝내 내 형편에 맞는 곳으로만 범위를 축소하고, 그 좁은 범위 안에서만 맴돌았던 나 자신에게 무한한 우주의 별들같은 자책감이 쏟아져내렸다. 급기야 후회하고야 말았던 그 여정, 후회는 무심함을 동반했고, 무심함은 또다른 무기력을 낳았다. 한 마디로 그건, 지겨운 일상에서 또 다른 일상으로 옮겨간 것 뿐이었다.

    그렇게 십여 일을 무기력하고도 의기소침하면서 침울하게 뒹굴거리며 배회하며 빈둥거렸다. 그러던 어느날 오후, 깨진 콘크리트 벽의 육중한 무게 옆을 삼륜차가 흐느끼듯 나뒹굴던 폐허 옆 노란색 담벼락 아래서, 아무 이유 없이 꺼내든 지도 위에 작은 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그 섬을 본 순간 마다가스카르가 떠올랐다.

    평소에 한 번 쯤 가보고 싶었던 그 섬. 그곳에 대한 설명이나 사진들보다는, 그 이름 자체에 이끌려 언젠가는 한 번 가봐야지 생각했던 그 섬. 하지만 이 위치에 그 섬이 있을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나중에라도 누군가 내게 그 섬에 간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귀찮고 게으르게 눈을 비비며 이렇게 말 할 테다. 마다가스카르 때문이라고.

    인도 땅 끝 옆쪽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작은 섬. 마치 인도양에 떠 있는 한 방울 눈물같은 모양의 섬. 어찌 섬이 이렇게도 슬픈 모양일까.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슬픈 모습일까. 하며 꾸물꾸물 생각의 고리를 이어가던 그 때, 느닷없는 스콜의 시작을 알리는 굵은 빗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황량한 폐허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나는, 단지 카메라가 젖으면 곤란하다는 이유로 황급히 몸을 일으켜, 비를 그을 수 있을 만 한 건물들이 있는 시내로 뛰어갔다. 마침 눈에 띄었던 길 모퉁이 노천 빵가게.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흐르던 구멍난 천막 아래 섰더니, 다짜고짜 건네주던 짜이 한 잔. 돌아보니 시커먼 얼굴에 허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어주던 펑퍼짐한 얼굴의 후덕한 아저씨. 그리고 그 너머 계단 위로 보인 빨간색 여행사. 

    한 시간 여 지난 후, 굵은 비가 그치고 다시 파란 하늘과 따가운 햇살이 내 목을 따끔하게 후려칠 때, 나는 깨달았다. 내 손에 스리랑카로 가는 저가항공 왕복 티켓이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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