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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의 태양, 건청궁의 석양 - 국가브랜드위원회 이배용 위원장과 함께
    국내여행/서울 2011. 5. 13. 21:21


    그때가 그들이 찬란히 빛나던 때였다. 마침내 자신들을 꼭두각시로 삼고 오랜 기간 섭정을 해 왔던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고종은 스스로 서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경복궁 북쪽에 건청궁을 지었다. 오래된 궁궐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조선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자 하는 그의 바램 또한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마음으로 나라를 보살피리라 다짐했을 테다. 처음부터 냉대받고 미움 받았던 왕비는 회심의 미소를 띄웠으리라. 이제 왕과 함께 정말 자신들이 뜻했던 세상을 만들어 가리라는 부푼 꿈으로, 기와 너머 하늘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푸르게 보였으리라. 그때가 바로 그들이 찬란히 빛나던 때였다. 이제 그 누구의 간섭 없이 새로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자 다짐했을 때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모든 건물이 불타고 270여 년간 폐허 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1865년 고종 2년 때 대규모 재건공사를 시작했다. 물론 이 재건공사는 그 당시 섭정을 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시행한 것으로, 이 때 시행한 원납전은 상대 세력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원성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파는 꼴이 돼 버렸다. 1868년 고종은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1873년에는 대원군이 탄핵되었다.

    그 날, 어쩌면 왕과 왕비는 광화문을 한 번 둘러봤을 지도 모른다. 왕의 큰 덕이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의 광화문. 그 바로 안쪽에 있는 금천 위의 영재교를 걸으며 마음을 깨끗이 씻고, 근정전 귀퉁이의 해태 부부상을 함께 바라보며 우리를 지켜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빌었을 지도 모른다. 특히 왕비는 어미의 품을 파고드는 새끼 해태를 보며, 일찍 떠난 자식 생각에 눈물을 훔쳤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자식을 냉대하던 대원군의 기억과 함께 북돋는 설움으로.



    그 후로도 오래오래 그들은 틈 날 때마다 건청궁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테다. 건청궁을 지을 때 함께 만들었던 바로 앞의 연못과 정자, 향원정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갔을 테다. 오랜 시간 왕의 침전이었던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이었던 교태전이 체온이 식어갈 무렵, 건청궁에서는 전등을 밝히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환희와 동경의 감탄이 터졌을 테다.

    어느 사이엔가 이미 이 나라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외국인들을 통해, 그들이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와 신기한 문물들로 차츰 급변하는 시대에 눈을 뜨게 되었을 테다. 경희루와 향원정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외국인들 앞에서는 어깨가 으쓱했지만, 좀 더 개화를 앞당겨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마음이 늘 함께 했을 테다.



    그렇게 아름다운 계절은 순식간에 흘러갔지만 세상은 뜻하는 대로만 되지는 않았고, 대원군도 호락호락 죽어 지낼 사람이 아니었다. 이 아름다운 강산을 호시탐탐 노리는 외부 세력도 너무나 많았고, 또 그것을 잘 못 이용하는 실수도 저질렀다. 외부에서 휘젓는 세력들 틈바구니 속에서 내부 동요도 일어났고, 그걸 또 이용하는 교활한 무리들 속에서 왕과 왕비는 하루도 편할 날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일본 낭인 한 무리가 일사천리로 경복궁을 거쳐 건청궁으로 들이닥쳤다. 명성황후는 궁녀복으로 갈아입고 피신했지만 결국 무참하게 살해당했고, 시신 또한 소나무 숲에서 태워졌다. 열강들의 패권다툼 속에서 한 나라의 왕비가 외국인들 손에 칼부림을 당했고, 그와 함께 조선이라는 나라 또한 찬란한 빛을 잃고 말았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리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국모가 외국인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인 것 만큼은 확실하다. 그녀의 죽음은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안녕을 기하려면 그것을 유지하는 힘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녀의 영혼은 그런 메시지와 함께 아직도 경복궁과 건청궁을 맴돌고 있다.

     

    ▲ 경복궁은 1395년에 지어진 조선왕조 최초의 궁궐이다. 하지만 궁궐보다 먼저 종묘를 만들어, 조상을 모신다는 효의 의미와 함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두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왕의 큰 덕이 나라를 비춘다'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 광화문 안쪽으로 들어서면 궁성 안쪽의 첫번째 문인 흥례문이 나온다.



    ▲ 궁궐산책은 생각하기에 따라 재미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사시사철 언제나 볼 만 한 곳이기도 하다. 봄꽃과 함께 놓인 궁궐 안 모습은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풍경일 테다. 영제교 옆에 핀 봄꽃이 우리 궁궐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 주고 있다.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작은 개울이 흐르는데, 그것을 금천이라 한다. 그 위에는 영제교라는 다리가 놓여져 있다. 이 다리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들어가라는 의미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정치를 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 국가브랜드위원회 이배용 위원장과 함께 여러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외국인 블로거 또한 많이 모여서 함께 열성적으로 경복궁 탐사를 했다.



    ▲ 근정전을 오르는 계단 정 중앙에는 답도라는 장식이 부착되어 있다. 봉황이 나타나면 성군이 나온다는 전설을 토대로, 성군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봉황을 새겨 놓았다 한다.



    ▲ 근정전은 왕이 신하들의 조하를 받거나, 공식적인 행사, 사신들을 맞이하는 등의 일들을 행하던 경복궁의 중심이다. 근정전 입구 윗쪽은 그물을 쳐 놓아, 날짐승들이 들어와 둥지를 틀지 못하게 막았다. 날짐승들이 들어오면 또 다른 동물들이 들어와 살생이 벌어질까 우려해서 쳐 놓은 그물이다. 내부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고, 그 뒤로는 오봉병이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의 다섯 봉우리는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을 의미하는데, 각각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백두산 그리고 북악산을 뜻한다.



    ▲ 전설의 동물인 해태는 지킴이의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근정전 모퉁이에 있는 해태 부부상은 특이하게도 새끼를 품고 있다. 어미의 품을 파고 드는 새끼를 통해 왕실의 번영을 기렸으리라 짐작 된다. 경복궁을 놀러 온 신혼부부들은 이 해태부부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며 소원을 빌어도 좋겠다.



    ▲ 근정전 주변에는 4신상(천룡, 백호, 주작, 현무)과 12지신이 놓여 있다. 단순히 되는데로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시간적 방위적 의미에 따라, 그리고 힘과 크기의 균형이 잘 이루어지게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자신의 띠가 어디에 어떻게 놓여져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의 성물들은 무서운 모습이 아니라 앙증맞고 귀엽고 익살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어서, 누가 봐도 편하게 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 이배용 위원장이 특별히 추천한 원숭이 상. 마치 뭔가 골돌히 생각하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임금에게 생각하는 정치를 하라고 일깨워 주는 듯 하다고. 각도를 바꿔 가며 잘 살펴보면 정말 아주 고뇌에 찬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 사정전은 왕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던 편전으로, 근정전 뒷쪽에 위치해 있다.



    ▲ 세종대왕이 만든 해시계. 해를 보라 가리키면 손가락 보는 사람들이 꼭 있다.



    ▲ 왕의 침전인 강녕전. 건강하고 평안하라는 뜻의 이름이다. 하지만 그 바램과 달리 추락한 왕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



    ▲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인데, 교태는 주역의 괘 이름 중 하나로 음양의 조화를 의미한다. 왕이 교태전에 갈 때는 합궁일 등을 잡아서 가야 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한다. 그래도 동쪽 방은 왕이 올 때만 사용하도록 늘 비워두고 있었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왕이 잠을 청하는 곳이라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왕도 용이기 때문에 용의 기운이 서로 상충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고, 지붕이 차단되지 않고 넘어가게 해서 영속성을 의미하기도 했다 한다. 



    ▲ 왕도 아무 때나 갈 수 없었던 교태전을 우린 이제 거의 아무 때나 갈 수 있다. 왕비가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지만.






    ▲ 교태전 뒤뜰에 세워진 인공동산 아미산. 아미산이라는 중국의 아름다운 산을 본따 만들었다고 한다. 교태전 뒤뜰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주로 왕비가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마음 속의 한도 달래고, 화도 풀고, 눈물도 삼키며 하루하루 살았을 테다.  



    ▲ 태종이 왕자의 난 이후 창덕궁을 지어 기거하다가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경회루를 짓는 일이었다. 하늘의 기운을 받는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기도 하지만, 주로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푸는 데 쓰였다 한다. 예전 경복궁 가이드 설명에서도, 이번 이배용 위원장 설명에서도, 경회루의 달밤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는데, 대체 언제쯤 볼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난이라도 일으켜 왕으로 등극해야 볼 수 있으려나.



    ▲ 경회루 근처에는 너른 공터가 있는데, 원래는 공터가 아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각종 내각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찬 곳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건물이 헐리고, 일본인들이 통채로 가져가고 해서 이렇게 공터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이다. 지도자가 되려면 세자 때부터 선을 쌓아야 한다는 뜻으로 자선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자선당은 일제 강점기 때 오쿠라라는 호텔 주인이 통채로 파 가서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관동 대지진 때 모두 불타고 남은 돌만 정원석으로 썼는데, 1995년에 이 돌들을 다시 가져와 복원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자선당 곳곳에 보면 누렇게 불 먹은 돌들이 그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 영원과 영속을 의미하는 벽 문양. 왕이 있는 곳이니 만큼, 어느 하나 허투루 만든 것이 없다.






    ▲ 북악산과 함께 어우러진 경복궁 내부 모습. 궁궐 여행이라고 굳이 오래된 기와집만 보러 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잘 꾸며진 아름다운 공원과 함께 맑은 공기와 왕의 기운을 마신다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 건청궁 옥호루. 건청궁은 고종이 스스로 정치가로 자립하려는 의지로 경복궁 북쪽에 지었다. 옥호루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이다. 사건이 일어난 후 고종은 건청궁을 다시는 찾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이곳에는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들어섰고, 2006년에야 복원 되었다.



    ▲ 향원지와 향원정은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함께 만든 연못과 정자다. 아무래도 고종과 명성황후는 크고 웅장한 것 보다는 아기자기하고 아담한 것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 씁쓸한 역사 현장 방문을 끝내니 바로 해가 지기 시작했다. 멀리 명성황후가 '나는 이 땅의 국모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첨언)

    경복궁을 서너 번 가봤지만, 이렇게 한나절 내내 궁궐 안에 머문 적은 없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하더니, 전문가의 설명과 함께 따라가니 보이지 않던 것들도 새롭게 보였다.

    이배용 위원장은 이화여대 총장을 지냈던 인물인 만큼, 그리고 역사 전문가인 만큼, 그 어느 누구보다도 궁궐 이야기를 재미있게 자세하게 해 주어 더욱 들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다만 이분의 설명을 또 듣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말자, 경복궁에는 무료해설사들이 열성적으로 일하고 있다. 분명히 그냥 눈으로만 보고 지나치는 것 보다는 훨씬 낫다는 걸 보장 한다. 자세한 것은 경복궁 홈페이지를 참고하기 바란다.

    경복궁 홈페이지:
    http://www.royalpalac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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