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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림에도 가끔 이런 일이 있다: 아세안 문화관광축제전시 공연 2011. 10. 4. 04:53
읽다가 김 빠지지 않게 미리 알려 드리자면, 이 축제는 이미 끝났다. 라고 써놓고 보니, 서두에 이런걸 쓰면 또 읽기도 전에 김 새는 효과를 보이는 아주 익사이팅한 문장이네. 익사이팅 안 하면 말고.
'아세안 문화관광축제'는 지난 10월 3일까지 3일간 신도림 역 1번 출구 쪽의 디큐브 파크에서 열렸다.
어느날 지하철 타고 가다가 앞자리 앉은 여자의 짧은 치마를 무심코 보다가, 눈이 마주쳐서 뻘쭘한 시선을 위로 향했더니 이런 축제 한다는 광고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보통은 '재밌겠네, 가봐야지'하고는 까먹고 마는데, 사람이 심심하다보면 어릴 때 살구받기 하던 추억까지 떠오르며 몸부림 칠 때가 있느니, '아, 거기나 가 볼까'하고 별 기대도 없이 쭐래쭐래 동네 마실가듯 슬리퍼 질질 끌고 나간 곳에서 의외의 수확이 있었으니, 동쪽으로 가면 길하다는 오늘의 운세를 믿었다면 더 좋은 일이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안타까움을 한켠으로 미루고, 얼기설기 흐르는 시간에 축제라는 엉성한 수를 놓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뭔 문장이 이렇게 길어! 라고 스스로도 느끼고 있지만, 읽기 싫으면 치워라, 잠 못 드는 밤에 오랜만에 마음 놓고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포스팅. 아아 스트레스도 글쓰기로 풀고 있는 가련한 운명. 젝일, 빵도 못 굽는 타자기에 뭔 미련이 많아 버리지 못하고 이리도 깊게깊게 파고 드는지. 엉? 이건 또 뭔 말이래. 어쨌든 갔다. 봤다. 즐겼다. 끝(?).
신도림은 주로 2호선과 1호선을 갈아탈 때 환승역으로 이용하고, 가끔 마트 갈 때나 한번씩 상륙하는 미지의 대륙. 동네에 큰 마트가 없기 때문에, 마트에서 파는 물건이 그리울 때면 지하철 씩이나 타고 신도림 역으로 간다. 물론 물건 살 때는 왕복 2천 원 차비를 뽑을 수 있을 만큼의 물건을 사는 건 필수. 그걸 다 등에 지고 날라야 하는 수고로움이 따르지만, 가끔가다 이마트 초밥을 먹고 싶을 때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런 신도림에 디큐브 시티 같은 게 있다니. 어제 생긴 건가? 근 십 년 동안 가끔씩 신도림 육지로 기어 나가긴 했지만 디큐브 같은 건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걸. 그래서 축제 가기 전에 먼저 검색을 해야 했다. 혹시 광고에 나왔던 신도림이 그 신도림이 아니라 무슨 저 경기도 오지에 있는 신도림이 아닌가 하고.
그런데 왠걸, 그 친숙한(?) 신도림에 디큐브 시티라는 것이 떡하니 생겨 있고. 이건 마치 매트릭스 에이전트들이 시간을 멈추고 슈슈슉 만들어 놓은 건물인 듯, 어느날 갑자기 생긴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고. 어쨌든 있으니까 있는 거겠지 하며, 제아무리 말 못하는 건물이라도 그 존재성을 부정하면 얼마나 슬프겠냐며 찾아갔다.
신도림 역 1번 출구. 1번 출구, 1번 출구. 분명히 외워 갔는데 난 또 이마트로 통하는 그 큰 통로로 가버렸고. 습관이란 참 무섭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마트나 가버릴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피자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도 언제든지 살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1번 출구는 저 구석탱이 어둠구석 속에 돌아돌아 나가야 했는데, 거길 나가니까 이건 또 뭔 디큐브 파크라는게 또 어디 있는지 대체 알 수가 없네. 그 때 마침 운명처럼 들려오는 북소리. 시끌시끌한 박자들. 핸드폰 판매 도우미의 판촉행사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아 그래도 축제가 열린다니 그 소리 정도는 압도하겠지 싶어 소리를 따라 갔더니 무사히 도착. 뭔 이런 간단한 곳 오는 것까지 내게는 오지 여행스럽냐고 한탄.
디큐브 파크라는 곳으로 딱 나가니까 출구에 떡하니 '아세안 센터'라고 안내 겸 홍보 겸 뭔가 많이 하는 부스가 나왔다. 방석이라든가, 햇볕 가리게라든가, 손수건 대용이라든가, 화장지 대신 사용할 수 있으니까, 팜플렛이나 하나 받아볼까 하고 다가갔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아세안 여행 가이드북'! 아, 축제 가면 저거 준다 그랬지, 라고 급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저거도 주세요 했더니, 그 책은 각국 부스를 돌면서 스탬프를 다 받아와야 준단다. 버럭 솟아오른 귀차니즘에 됐어요 할 뻔 했지만, 일단 가이드북이잖나, 어찌 생긴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폐품으로 활용해도 좋고, 흔히 구할 수 없는 거라며 으스대며 선물 할 수도 있고, 정 싫으면 낙서장으로 이용해도 되고, 아니면 부품으로 해체해서 종이접기 해도 되고. 그러니까 책은 귀한 것. 받으면 좋은 것. 일단 받고 보는 것. 가만 보니 부스들도 오밀조밀 딱딱 붙어 있어서 약간의 샤이니즘(shy-ism)만 감수하면 얻을 수 있겠다 싶었다.
부스맨이 주는 A4 용지를 받아드니 각국 부스에서 받아 와야 하는 스템프는 총 10개. 일단 바로 옆에 있는 부스부터 가서 말도 없이 종이를 내밀었더니, 그냥 스탬프 꾹 찍어 준다. 흐음, 뭔가 조금 부족한데 싶기는 하지만, 뭐 딱히 그나라 정보라든지 관광정보 알아보고 싶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부스걸이 예쁘니까 아무 말이나 수작걸자 이건 또 아니고.
어쨌든 주최측이 나름 머리 썼네 싶었다. 이렇게 스탬프라도 찍어오게 해야 부스를 한 번이라도 방문하고, 그러면 간 김에 뭔가 해보자라는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러다가 팜플렛을 들고 오고, 집에 가다가 흘리고, 그걸 주운 사람은 운명에 이끌려 라오스로 가게 되고, 홀로 방비엔 강가에 앉아 라오 비어를 홀짝이던 여행자는 인연을 만나게 되는 나비효과가 있을 지도.
응, 좋은 거지 뭐. 사람은 각자 세상에서 맡은 역할이 있고, 자기도 모르게 메신저 역할을 할 수도 있으며,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맡은 역할은, 스탬프 얼른 찍고 썩 꺼지는 역할. 아주 중요한 엑스트라.
사실 부스를 돌면서 갔다온 나라들의 추억을 하나씩 꺼내 보려고 했는데, 아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심지어는 내가 라오스를 갔다 왔는지 말았는지조차, 라오스가 나인지 내가 라오스인지조차, 기억나질 않아 어젯밤 꿈조차. 아아 뭔가 좀 잘 못 된 것 같아, 하도 오래 해외여행을 못 떠났더니 정착민 바이러스가 옮았나봐. 그저 말 없이 스탬프나 꾹.
사람들은 뭔가 설명을 하고, 설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열심히 뭔가 쓰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구경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하던데, 대체 무엇을? 내겐 아무것도 없던걸. 하다가 며칠 전 친구와 긴 전화통화를 하며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무얼 해도 심드렁하고, 세상에 더이상 신기한 것도 없고, 딱히 가보고 싶은 곳도 없고, 이젠 음식도 다 거기서 거기. 더 새로운 게 뭐가 남았나 싶기도 하고, 또 새로운 게 나오면 뭘 하나 싶기도 하고, 떠나면 뭘 하나, 있으면 뭘 하나, 일 하면 성공하나, 성공하면 빨리가나, 빨리가면 빨리죽나, 닥쳐. 하며 끝내 다다른 결론은, 이건 시대의 우울이다, 총체적 시대병이 바이러스처럼 퍼져서 온 지구를 휩싸고 있는 거다, 어쩌면 외계인이 침공하기 쉽게 빗물에 약을 탄 건지도 모른다라며, 호주로 하는 국제전화로 쓸 데 없는 수다를 떨었었지. 전화를 끊고 머리에 파파팍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은, 돈 아까워 젝일.
하여튼 뭔가, 뭔가가 삐걱거리며 잘 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도 모르겠으니 어떻게 고쳐야 할 지 알 수 있을리는 더더욱 없고. 미드 히어로즈의 사일러가 되면 좋을텐데 싶기도 하면서, 어떻게 생각해보면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었다면 우린 더 빨리 세상에 지치고 말았을거야 싶기도 했다. 모든걸 다 보고나면 매력 없잖아, 아낌없이 주는 애인처럼. 그러니까 적당히 남겨 두는 게 좋은거다, 싶기도 하지만 그래선 안 돼, 스탬프를 다 모아가야 책을 주거든.
디큐브 파크는 중앙 무대를 중심으로 2층 구조라고나 할까, 층이 져 있어서, 각국 부스들도 두 개 파트로 나누어진 형태였다. 일부분만 돌다가 나머지는 어디있지? 하며 또 못 찾고 허우적 대며 공연이나 구경했다. 메인 무대에선 쉼 없이 각국의 전통 춤들이 선보이고 있는데, 공연장이 조금 작은듯 해서 그런지, 아니면 이 일대에 사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햇볕은 쨍쨍 자리는 꽉꽉.
어느나라 춤인지도 모른 채 보고 또 보고, 귀찮아서 사진도 안 찍고 대충대충 설렁설렁. 어차피 동네 마실가듯 놀러 간 거니까 라지만, 지하철 타고 마실이라니. 사실은 캄보디아의 압살라 춤을 보고 싶었는데, 순서를 보니 그건 이미 끝났다.
캄보디아의 압살라 춤은 꼭 보라고 추천해 주고 싶다. 아무거나 보지 말고, 국립 왕실 예술단인가 댄스단인가 하는 사람들이 공연하는 걸로 보기 바란다. 옷을 완전히 다 갖춰 입고, 아오자이처럼 몸매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며, 중간에 스트립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손짓 몸짓이 묘하게 애잔하다. 특히 고생고생 여행하다가 그 춤을 보면 참 뭐랄까, 왕이 저 춤을 보고 나면 그날 밤은 그냥 잠들지 못했겠는 걸 싶을 정도. 그래서 깊은 밤에 보면 더욱 빛난다. 보면 안다. 압살라 볼 때 앙코르 비어는 기본.
압살라 댄스를 볼 수 없는 걸 알고는 다시 정신을 집중해 스탬프 모으기에 돌입. 어떻게든 나머지 나라들의 부스를 찾아내고 말아야지! 라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딱히 숨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잘도 찾아가던데. 역시 다른 사람들이 귀신이라 그런 거다. 그러니 귀신같이 잘 찾는 거지. 나는 일반인이라서 못 찾는게 당연. 아 정말 세상은 이상해.
여기저기 뱅뱅 돌다보니 아시아 키친인가 아시아 치킨인가 하는 데서 한 남자가 베트남 쌀국수 홍보를 하고 있었다. '여러분들이 시내에서 먹을 수 있는 쌀국수는 진짜 베트남 쌀국수가 아니라 변형된 거고, 지금 여기서 파는 게 진짜 베트남 쌀국수 입니다. 오늘만 특별히 사천원'이라며 다소 부정확한 발음의 한국어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그의 열정이 참으로 감탄스럽고, 또 거기서 나오는 냄새도 정말 베트남 쌀국수의 그 아쌀하면서도 비릿하면서도 매콤하면서도, 오월의 새싹 돋아나는 풀 숲 아래 개미가 물어뜯는 풀잎의 절단면에서 나는 그런 냄새.
아아 이건 꼭 맛 봐야해, 싶었지만 안을 들여다보니 혼자서 먹기란 참 샤이한 분위기. 일단 먹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고, 직원은 많고, 지나다니는 구경꾼도 많은데다가, 여긴 또 일반 음식점이 아니라 축제장이라는 거. 일반 음식점에선 혼자 먹는 거 별로 안 가리는데, 이런 축제장이면 또 얘기가 다르다. 예전에, 몇 주 전인가, 축제장에서 혼자 밥 먹어 봤는데, 거 참 많이 왕따같고 찐따같고 양파같았다.
나는 왜 굳이 축제까지 와서 혼자 밥을 먹나 싶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이왕 굶은 거 한 끼 더 굶는다고 굶어죽나 싶기도 하고, 생각에 생각을 벗겨낼수록 싸하니 아려오기만 하고, 음식 맛은 모르겠고, 그냥 푹푹 퍼서 쑤셔 넣는 것만 같고, 이럴 거면 머하러 먹나 싶고, 결국 돈이 아깝고.
그래서 '진짜 베트남 쌀국수'라고 주장하는 그 쌀국수를 못 먹고 왔다는 이야기. 하지만 나중에 집으로 돌아오며, 아아 베트남 쌀국수라고 우기는 음식점들에 비해 완전 싼 가격이었는데 하면서 또 후회했다는 이야기. 왜 이럴까 우리나라는. 동남아 여행하다보면 야시장에서 혼자 쌀국수 먹는 사람들 엄청 많은데. 여자 혼자 쌀국수 국물 폭폭 퍼먹어 가며 각종 풀잎사귀들을 잘근잘근 씹으며 느릿느릿 쉬엄쉬엄 밥을 먹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데. 그래서 더욱 나가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결국 베트남 쌀국수의 유혹을 뿌리치며 엉엉 울며 달린 십만리 여정 끝에 발견한 나머지 국가들의 부스들. 그 중에는 필리핀 부스도 있었는데, 아, 필리핀을 보자마자 떠올라버렸다. 내 친구 녀석, 저번에 필리핀 여행 갈 때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도 데려 갔지, 돌봐줄 사람 없다고.
그런데 나는 아직 필리핀을 한 번도 못 가봤다. 아아, 강아지도 가는 필리핀을 나는 왜, 강아지도 밟아본 보라카이 해변을 나는 왜, 강아지도 먹어본 필리핀 머드크랩을 나는 왜, 왜, 왜, 왜!
사실 섬나라가 내 체질에 안 맞긴 하다. 섬나라 여행 갈 때마다 뭔가 일이 생기거나, 재미가 없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섬나라는 비행기로 가야한다는 건데, 이게 또 별로 마음에 안 든다. 큰 새의 배 속에 불량식품처럼 꾹꾹 쑤셔넣어져서는, 거대한 똥떵어리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바다를 건너야 하다니. 내가 똥떵어리냔 말이다, 공항이라는 이름의 화장실에 쑥 하니 싸지르게!
라는 이유도 있고, 옛날에 심각하게 찾아간 점집 처자가 내게는 섬나라가 상극이라 한 이유도 있고. 내심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짚어주니, 또 그게 완전 맞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은 완전 맞는 거라고 확신할 정도. 몇 년 전 호주를 가겠다는 계획도, 실제로는 여러가지 보통 사람들이라면 평생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이들이 연속적으로 터져서 못 가게 된 거지만, 따지고 보면 별로 가고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 점집 처자가 호주같은 섬나라는 가지 말라고 했거든. 그래서 난 앞으로 아메리카 같은 섬나라도 안 갈 생각. 물론 여행으로 한 번 쯤은 가봐야겠지만.
어쨌든 시간나면 그 친구네 집 찾아가봐야지. 강아지에게 보라카이의 햇살은 어땠냐며 쓰다듬어주는 척 하면서 꼬집고 때려야지.
태국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나름 살짝 기대했지만, 의외로 우산만 잔뜩 갖다 놓아서 약간 실망했고, 각 부스들에 생각보다 전시된 게 많지 않다는 것에 실망해서 조금 김 빠지기 시작할 때 쯤 어느새 다 모인 스탬프! 스탬프 열 용사가 모이면 무적의 가이드 북으로 변신!
스탬프를 찍어야 했던 나라는 총 10개국. 브루나이,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싱가포르, 타이랜드, 베트남.
스탬프 다 찍어놓고 가만히 보니, 나도 참 빨빨거리고 많이도 돌아다녔다 싶었다. 10개국 중에 못 가본 나라가 3개. 그 중 인도네시아는 그래도 발자국은 찍었으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가 본 곳으로 칠 수 있으니, 그럼 2개국. 브루나이와 필리핀.
브루나이는 한 번 쯤 가보고 싶은 곳이긴 한데, 큰 맘 먹지 않는 이상 쉽사리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고, 경비도 좀 많이 드는 편. 필리핀은 남들 다 가는 보라카이 같은 곳이라도 한 번 가보고 싶지만, 훗, 거기 혼자 가서 뭐하나 싶기도 하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를 엮어서 배로 섬들을 이어 다니는 코스를 나름 짜 보기도 했지만, 한마디로 미친 짓. 비행기로 이동하는 것보다 돈이 더 많이 드는 여정. 게다가 나는 배멀미 대마왕. 아아 진정 이 두 나라는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인가. 이 글을 보고 각국 관광청에서 초청해 주신다면 여행기 잘 쓰겠습니다, 굽신굽신 굽시니즘.
스탬프도 다 모았겠다, 설렁설렁 히적히적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더니, 아뿔사 다시 베트남 쌀국수 앞. 냄새에 이끌린 거야, 유령처럼 날아서 바퀴벌레처럼 찍찍이에 딱. 하지만 이번엔 자리가 없어서 다행. 단체손님인지 와글와글 자리를 다 차지해서 앉을 곳 없음. 땡 끝 디엔드.
스탬프 다 찍고 희희낙낙 안빈낙도하며 공연보며 동영상 찍고 앉아 있는데, 지나던 처자 둘이 빨리 가야 한다며 선착순이라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보였다. 웬 선착순 하며 종이를 봤더니 500명 선착순으로 준다고 적혀 있고. 보자마자 바로 일어나 그녀들을 재치고 도착. 안전하게 가이드북 선점.
공짜로 주는 가이드북이 뭐 그리 특별하겠나 싶어서 별로 기대는 안 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꽤 잘 돼 있는 편이었다. 특히 설명은 짧게 처리하고 지도를 많이 넣은 것이 마음에 들었고, 가벼운 책 한 권에 10개국 포인트만 간결하게 넣은 것도 나름 특징.
특별히 마음에 든 것은 지도들이 최신 개정판이라는 것. 작년에 나온 가이드북에도 라오스 같은 곳은 지도가 잘 못 된 것이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 다 잘 못 돼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버스터미널들이 최근에 다 외곽으로 옮겨졌는데, 시중에 판매되는 가이드북에서는 시내에 가깝게 있던 시절 그대로 그려 놔서, 현지에 도착하면 당황할 수 밖에 없고, 툭툭 기사들에게 속을 수 밖에 없는 것.
가이드북 저자에게 들어보니, 저자가 지도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해도, 출판사 측에서 돈 많이 든다고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한다. 사정을 모르는 독자들은 애꿏은 저자만 욕하고. 그래서 힘들 때가 많다고. 모르면 어쩔 수 없는 거기도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자본주의란 참 지랄맞다.
가이드북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가이드북이 뭐냐면 가이드북이다(Guide-book). 많은 사람들이 가이드북 들고 여행하는 걸 자유여행이라 부르고, 그것이 정녕 자유롭게 여행하는 방법이라며 패키지 여행자들을 무시하기도 하는데, 그건 참 어리석은 짓이다. 가이드북 또한 하나의 가이드니까. 어찌보면 가이드 고용할 돈 없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싼 가이드가 바로 가이드북 아닌가. 가이드북 여행자들은 가이드북 패키지 여행자일 뿐이지 않나. 그들 중 과연 몇이나 진정 자유롭게 길을 떠나는가.
이건 가이드북 여행자들을 또다시 패키지 여행자의 무리에 몰아넣어 비하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가이드북 여행자나 패키지 여행자나 오십보 백보일 뿐이니, 누가 잘났고 누가 못났고 할 필요 없다는 주장이다. 사실 또 가이드북 없이 '자유롭게' 여행하면 그게 또 멋있는 건가? 뭔가 대단한 건가? 그건 또 아니다, 그저 여행 스타일일 뿐.
한동안 가이드북 없이 여행을 다녔는데, 그건 또 참 못 할 짓이더라. 동남아 국가들이 우리나라처럼 관광안내소가 많은 것도 아니고, 행여나 있다 하더라도 지도를 슥슥 꺼내 주는 것도 아니다. 대다수 국가에서 관광안내소는 그냥 길 물어보는 곳일 뿐, 지도따윈 없다. 어떤 곳 스리랑카나 인도는 안내소 운영자가 자기가 운영하는 숙소나, 자신과 연계된 서비스들을 이용하라고 부추기기만 할 뿐, 제대로 된 정보는 전혀 얻을 수 없기도 하고.
뭐 나름 그것도 묘미. 사실 여행지는 그렇게 책에도 없는 곳을 부득부득 기어 들어가는 이상한 인간들에 의해 개발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아 나도 프론티어가 되려나 싶을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만의 장소를, 아주 우연히 발견하기도 했으니까 딱히 나쁘진 않은 방법인데, 문제는 고생을 좀 심하게 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언제든 준비된 노숙자의 자세여야 한다는 것.
여행사 다니는 친구에게 너같은 놈만 있으면 여행사 다 망한다는 소릴 듣기도 했고, 가이드북 관련 종사자에게 너같은 놈만 있으면 가이드북 장사 하나도 안 된다 소릴 듣기도 했지만, 난 가방 무거운 건 딱 질색인걸. 어떻게 사람들이 4킬로 넘는 가방을 매고 여행을 다니나 몰라. 옷은 안 갈아입으면 되고, 별로 넣을 것도 없는데.
아 뻘소리 너무 오래 했더니 손가락 아프고 잠온다, 이제 마무리 해야지.
아시아 국가들 전통춤을 재미있게 보았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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