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평창동은 가나아트센터와 서울옥션을 비롯한 크고작은 갤러리들과 함께, 척 봐도 부자동네구나 싶은 집들이 널려 있어서 가는 사람 주눅들게 만드는 동네다. 마치 청담동 며느리 룩으로 해 가야 꿀리지 않을 듯 한 분위기.
사실 딱히 뭔가 찾아봐야겠다는 일정이 있지 않는 한은, 한 번 찾아가보기도 그리 만만치 않은 곳이다. 승용차가 없으면 상당히 교통이 불편한 곳이니까.
버스에서 내려 가나아트센터가 있는 큰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언덕 꼭대기에서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 나가면 토탈뮤지움이라는 미술관이 보인다.
토탈뮤지움 혹은 토탈미술관이라 불리는 이 미술관은, 2층이 1층인지, 1층이 지하인지 헷깔리는 건물 모양새로 일단 시선을 끈다. 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일설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미술관이라는 말도 있는데 그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댄 퍼잡스키 개인전, 'The News After The News'를 찾아갔다. 전시회 초반에는 작가가 직접 나와서 그림 그리는 모습도 보여주고 인터뷰도 했다 하는데, 이제 그는 돌아가고 조용히 전시물만 관람할 수 있다.
댄 퍼잡스키는 루마니아 사람으로, 낙서같은 사회만평 그림으로 알려진 예술가다. 사실 그림 그 자체의 예술성이나 미감보다는, 그 안에 들어있는 메시지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림만 슬쩍 봐서는, 누구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낙서에 지나지 않는 그의 그림이 작품으로 인정받는 것은, 단편적인 그림들 하나하나가 가지는 예술성보다는, 그가 인생 전반적으로 행해 온 활동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댄 퍼잡스키는 낙서같은 그의 그림으로 언론지에 상당히 오랜시간 시사만화처럼 기고를 해 왔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 공책을 들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그는, 스스로 그의 작품은 일종의 일기이고 기록이라고 했다. 사물이나 현상, 각종 사회적인 이슈들을 주관적으로 보고 느낀 것을 낙서처럼 표현한 것이다.
사실 그의 작품들을 보고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나도 저런 낙서 엄청 많이 그렸는데, 차마 블로그에도 올리기 쪽팔려서 그냥 놔뒀다가 다 버리고 말았지 하며.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주관적인 개성이 독특하게 잘 나타나기만 하면 예술이 된다는 기본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게지. 아니면 언젠가 찾아올 모든 개들에게 한 번 쯤 있다는 해 뜰 날 따위를 믿지 않았던 건지도.
어쨌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만 한 것을, 누구나 쉽게 할 수 없을 만큼 오래, 깊게, 끈질기게 해 왔기 때문에 예술가로 인정받는 것일 테다. 누군가의 작업을 한 단면만 잘라보고 모방하기란 쉬워도, 그 수많은 세월동안 오래오래 끈질기게 파고 들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니까.
배낭여행을 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유럽인 배낭여행족들이 말 했던 것처럼, 댄 퍼잡스키도 유로 통화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내가 만난 유럽인 여행자들 중 유로 통화권 정책을 좋게 이야기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한 무리의 프랑스 인들은 이런 푸념을 늘어놓았다. 유로 시대 이전에는 일주일에 두어 번 외식을 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치가 돼 버렸다는 현실.
한 나라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통화권 전체가 통화 정책을 펴기에는 다른 나라의 피해가 너무나 크므로 어찌 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부자 나라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나라는 결국 망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최근 그리스 사태도 이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일각에선 무슨 복지 포퓰리즘으로 나라가 망했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전문가라는 탈을 쓰고 나와서 하는데, 그정도 분석력으로 정치를 하고 경제질을 하니까 나라에 희망이 없지.
깊게 들어가면 역사적인 부분까지 들춰야 하니까 아주 간단하게만 언급하자면 이렇다. 그리스는 70년대 민주화 이후 우파 정권이 들어섰는데, 그 정권이 엄청난 실업률과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편 정책이 바로, 공무원, 교사, 경찰관, 소방관 등의 일자리를 대폭 늘린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는 공공부문 지출이 커졌다.
그래도 한동안 그럭저럭 굴러갔다. 그리스는 유럽에서도 비교적 물가가 낮은 지역이었고, 그 비교우위를 이용한 관광수입으로 먹고 살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유로존에 가입하면서부터 물가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비교적 싼 관광지라는 메리트 또한 사라졌다. 거기다가 전세계적 금융위기가 결정타를 가하니, 결국 정부가 파산할 수 밖에.
그걸 복지 때문에 망했다로 몰아 부치니, 국내 언론의 시점으로는 그리스 국민들이 나라가 망할 위기인데도 복지 줄인다고 징징거리며 돌 던지며 과격시위 하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이지.
우리나라도 그 꼴 나지 않으려면, 전국적인 대규모 토목공사를 자제하고, 전현직 고위직 공무원들의 월급과 연금을 파격적으로 줄이는 등으로, 공공부문 지출을 줄여야 한다.
아울러 유로존과 FTA로 대표되는 전세계적 신자유주의 물결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개발해야 하는데, 사실 우리나라 같은 무역의존국이 FTA를 거부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내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외부적인 압박 때문에 불가능 한 것이다, 좋든 싫든 울며 겨자먹기로 협상 테이블에 끌려 나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도 노련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통박 잘 굴려서 최소한 손해는 안 보도록 눈치 잘 보고, 협상 잘 해야 한다. 그래서 손해 보는 부분을 이익 보는 부분이 메꿔줘서 최소한 제로섬이 되게끔은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정부가 했던 한미 FTA는, 딴 거 볼 필요없이, 미 의회에서 반대가 극심했다는 것만 봐도 나름 잘 해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재협상 한 한미 FTA는, 미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찬성을 던졌다는 것만 봐도, 어떤 상황인지 잘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그리스나 필리핀 꼴로 전락한다면, 그건 복지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다.
작은 미술관을 꽉 채우고 있는 댄 퍼잡스키의 작품들 하나하나에는 의미있는 메시지들이 많다. 사실 그걸 보고 뭐 어쩌라는 거냐라고 되묻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이들 끌고 와서 이런 그림 보여주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는 교보재 역할로 사용해도 좋을 테다. 학교나 교과서에서는 말 해주지 않는 내용들로 말이다.
그런데 그 부작용은, 그러다보면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 대한 회의로 들어가게 되고, 그러면 세상은 참 드럽고 불결해로 귀결된다는 것. 결국 어차피 인간 사회는 다 그렇느니라라고 이해하려면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
전시장 한쪽 벽면은 댄 퍼잡스키가 한국 사회에 대해 그린 그림들이 장식하고 있다. 미술관 측 설명에 따르면, 전시회를 열기 전에 미리 한국 뉴스들을 한 뭉치 보냈다고 한다. 작가는 그 뉴스들을 읽고 느낀 점들을 그림으로 그렸다고. 물론 한국에 와서 짧은 시간 경험했던 것들을 녹여내기도 했을 테다.
그가 한국에 대해 표현한 그림들을 보면, 외국인들이 우리 사회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스마트폰만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람들과, 마치 군대같이 장화를 신고 행진하는 여성들, 크레인 위에서 생존을 외치는 모습과, 불고기, 그리고 소주. 우리는 일상에서 늘 접하는 뉴스들이라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 외국인의 시각에선 상당히 신기하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이 넓은 세상에, 그리고 이 좁은 나라에 신기하고도 희한한 일들이 많다는 것 또한 알 수 있고,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낙서를 해서 남겨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아트가 별거냐, 아트 하면 아트지. 청담동을 슬리퍼 질질 끌고 활보하는 내 인생도 아트다, 그래서 나도 아티스트고.
수많은 메시지들과 복잡한 사회현상들, 그리고 해결될 기미 없는 인간이라는 동물들의 희한한 짓거리들이 풍자되어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을 진지하게 고민하기엔 머리도 너무 복잡하고, 시간도 없고, 또 내가 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전시회에서는 아트가 별 개 아니구나라고 느끼고, 자신의 인생을 아티스틱하게 발전시킬 영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큰 보람 아닐까 싶다.
이 전시회는 모그 인터렉티브라는 회사가 문화 무슨 활동을 위해 기획한 것이라 하는데, 이 광고회사는 올포스트라는 메타블로그 비슷한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올포스트 사이트에서 이번 전시회 입장권을 무료로 얻었다는 것 말고는 별로 중요할 것 없는 이야기.
전시회 갔다오면서 나도 나름 낙서 하나 그려봤다. 전시회를 둘러보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느낀 점을 표현한 것.
처음에는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신기한 듯 두 눈 반짝반짝 폴짝폴짝 돌아다니지만, 점점 표정은 어두워지고, 지쳐가고, 결국 이해는 못 하겠고,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고,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그러다가 구경 끝내고 뭐 먹을 때 되면 다시 정신이 반짝반짝 후룩후룩 쩝쩝. 전시회는 먹으러 가는 것.
어쨌든 이것저것 다 집어치우고 상당히 중요한 정보가 하나 있는데, 평창동 갤러리 길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경복궁 역 근처에서 내리면 바로 문방구 하나가 보이고, 그 문방구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외국인 유학생 여인이 참하다는 것. 끝.
참고자료
* 댄 퍼잡스키 개인전 홈페이지: http://www.danperjovschi.kr/
* 토탈뮤지움: http://www.totalmuseum.org
* 모그 인터렉티브: http://mog.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