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국제공항에서 서남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배를 타고 5분이면 갈 수 있는 무의도가 나오고, 무의도에 내려서 다시 서쪽으로 가면 실미해수욕장이 나온다. 실미해수욕장은 그 이름에서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미도가 아닌 무의도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그 해수욕장 앞쪽으로 매일 두어 번씩 썰물과 함께 바닷길이 열리는데, 그 길을 걸어가면 바로 ‘실미도’로 들어갈 수 있다. 차량이나 배로 가는 방법은 없고, 오직 바다가 열어주는 길을 통해 걸어서 들어가는 방법 밖엔 없는 아무도 살지 않는 작은 섬이다.
무의도 쪽에 위치한 '실미해수욕장'이 길이 2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백사장을 가지고 있고, 그곳에 각종 숙박업소나 식당 등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실미도를 찾아간 사람들도 숙식은 무의도 쪽에서 해결해야 한다. 실미도는 무인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실미도는 해발 80미터, 면적 2제곱 킬로미터의 작은 섬이다. 해안은 모래와 개펄로 뒤섞여 있고, 야트막한 언덕은 작은 오솔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수풀로 뒤덮여 있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그리 길지 않은 산책코스로 언덕을 넘어가면, 섬 반대편에 또 작고 아담한 공간이 나온다.
넓은 바다를 마주보고 있는 그 공간은 작은 백사장과 기이한 모습의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파도의 작은 손짓과, 바다를 바라보며 햇볕을 반사하는 바위들, 그리고 주위로 우거진 수목들 속의 그 작은 공간은, 지난 역사와 영화의 기억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저 평온하고 아담한 무인도 속의 한 작은 공터일 뿐이다.
한때는 영화 촬영지로 관심을 받으며 수많은 사람들로 붐벼서 간이 매점도 있었다는 그 공간, 그리고 더 옛날에는 무시무시한 훈련이 펼쳐졌던 그 섬에, 이제는 남은 흔적 하나 없이 파도만 무심히 해안을 감아 돈다.
영화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유명해지지도 않았을 그 작은 섬에서 잠시 세상의 시름 놓고 쉬어가도 좋다. 혹은 갯벌로 펼쳐지는 무의도로 통하는 바닷길 중간에서, 현지 어민들이 굴 양식을 한다고 출입을 금지시킨 지역을 피해서 조개나 소라 등을 주워도 좋을 테다.
아니면 끝없이 길게 펼쳐진 실미해수욕장에서 밝은 모래사장을 자박자박 밟으며, 섬이 주는 고즈넉한 시간을 한껏 만끽할 수도 있다. 이제는 잊혀진 역사와 영화의 현장은,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을 벗어나 약간의 사람들이 가끔씩 찾는 공원으로 그렇게 조용히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실미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단연 영화 실미도다. 그리고 그 섬 이름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은 것도, 아직도 그 섬을 한 번쯤 찾아가보려 하는 것도, 거의 대부분이 그 영화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실미도는 2003년 개봉해서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이 영화는 몇 년 앞서 출판된 동명의 소설을 참고로 만들어졌는데, 소설과 영화 모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실미도 사건’이라 불리는 그 사건은, 1971년 한 무리의 군인들이 청와대로 가려다가 저지당해 서울 시내에서 자폭한 사건이었다.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이 사건의 시작은 60년대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무장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했다가 대부분이 사살당한, 일명 ‘김신조 사건’, 혹은 ‘1.21 사태’라 불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체포된 김신조는 서슴없이 그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를 죽이러 온 것이라 밝혔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 해(1968년) 200만 명의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학생들에게 교련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보복성 조치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실미도 특수부대였다.
대통령을 비롯한 일부 핵심인사들만 존재를 알고 있었던 이 극비 특수부대는 중앙정보부가 만들고 공군이 관리를 맡았는데, 공식 명칭은 2325전대 209파견대, 68년 4월에 만들어졌다 해서 684 특공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각종 범죄자들로 훈련병들이 모집되었다고 돼 있지만, 실제로는 깡패 등의 잡범들과 일반인들로 꾸려진 부대였다 한다. 부대 인원도 김신조 특공대와 똑같이 31명이었는데, 원래는 3개월 정도 훈련해서 북한으로 침투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에 다다르는 지옥훈련을 받은 훈련생들은, 3개월 후에는 정말 귀신 같은 솜씨를 발휘하는 무서운 특공대로 변신해 있었다 한다.
하지만 북파계획은 취소됐고,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1969년에 중앙정보부장이 바뀌고, 1970년엔 8.15 선언으로 남북관계가 평화통일 쪽으로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이어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제 더 이상 ‘김일성을 죽인다’는 목적 하나로 만들어진 실미도 부대는 필요하지 않게 됐다.
이런 상황 속에 실미도 부대는 3년 넘게 혹독한 훈련만 받다가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렸고, 결국 1971년 8월 23일 실미도를 탈출해 서울로 진입했다가 저지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 속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신속한 재판과정을 거쳐 모조리 사형당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북파 공작을 위해 희생된 31명의 훈련생도 슬프지만, 그 사건으로 희생된 다른 무고한 사람들은 또 무슨 죄란 말인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원만하게 해결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들인데, 국가 고위관계자들의 복수심과 극렬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합쳐져서 만들어 낸 비극이 아닌가.
과연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고, 한 시대를 주름잡는 이데올로기란 어떤 것인가라는 큰 주제를 생각하기에 앞서, 아직도 조금만 주류에 벗어난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을 하면 서슴없이 빨갱이라 부르며 몰아치는 분위기 속에서, 실미도는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 않고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돌고 있는 현실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현대사 속에서 그렇게 억울하고 비틀어지고 꼬여진 사건들이 수없이 많았기에 사람들은, 경제가 중요하고 지역이 중요하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잘 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돈으로 대표되는 물질만능의 사회가 도래한 것도 시대적, 세계적 사조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되풀이 된 과거의 흔적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파악한 보호본능이 아닐까.
시대가 그렇고, 세상이 그렇고, 또 나라가 그런 것을 누가 누구를 탓하랴마는, 대국의 군사력에서 독립해 자주국방을 실현하자는 꿈이 벼랑 끝에서 무참히 사라져버린 이 땅에서, 다시 과거의 망령을 불러들여 좋았던 기억만을 되짚자는 수첩 속의 죽은 글귀들이 고개를 드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아무리 좋았던 술이라도 퇴색하면 맹물일 뿐. 그러니까 어느 맑은 하늘 아래 조용히 홀로 실미도를 찾아갈 때는, 이미 마개 따서 오래된 소주보다는 그 동네 가까이서 새로 산 시원한 술이 좋겠다. 비록 즐겨 마시던 술이 아니라서 다소 낯선 입맛에 당황스럽더라도, 한 번 마셔보면 또다시 찾을 정도의 훌륭한 술을 새로이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실미도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영종도선착장이나 인천국제공항 1층 입국장에서 222번 버스를 타고 잠진도 선착장 입구에서 내리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잠진도 선착장에서 수시로 오가는 배를 타면 5분 만에 무의도에 도착하는데, 여기서는 마을버스를 타면 실미도 해수욕장까지 갈 수 있다.
참고:
국립해양조사원 홈페이지에서 실미도의 바다갈라짐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실미도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도보밖에 없으므로, 바다갈라짐 시간에 맞춰서 가야 섬에 들어가볼 수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http://www.khoa.go.kr/app/seaDivide/sub.asp?rid=6&sgrp=D03&siteCmsCd=CM0016&topCmsCd=CM0190&cmsCd=CM0348&pnum=1&cnum=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