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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한강 멍때리기 대회 -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의 퍼포먼스서울미디어메이트 2017. 5. 3. 18:45
4월 30일 일요일, 망원한강공원 성산대교 인근 잔디밭에서 '2017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말 그대로 한강변에서 멍때리는 대회인데, 사연 중심으로 참가신청을 받아 선정된 70여 명의 선수들이 출전했다.
참가한 선수들은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두 시간동안 주어진 자리에서 멍때리기를 해야 했고, 제대로 멍때리기를 하지 못 한 경우엔 옐로카드나 레드카드를 받기도 했다. 레드카드를 받으면 자리에서 끌려 나가 탈락 처리 됐는데,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은 훌륭한 멍때리기 실력을 보여서 끝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한강 멍때리기 대회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멍때리기 대회는 '한강 봄꽃축제' 일환으로 열렸다. 작년에 너무 더웠는지 올해는 개최 날짜가 조금 앞당겨졌는데, 그래도 낮 시간 한강변은 햇살이 따가웠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약간 쌀쌀한 날씨였는데, 마침 더워지기 시작한 때 대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간단한 대회 설명과 짧은 기체조(?) 시간을 가진 뒤, 바로 대회가 시작됐다. 경기가 시작되자 선수들은 요가메트에 앉아서 멍때리기를 시작했다. 정말 말 그대로 멍때리기였다.
대회 중에 선수들은 말을 할 수 없고, 미리 주어진 카드를 들어서 주최측에 서비스를 요구할 수 있었다.
빨강은 어깨 주무르기, 파랑은 물 한 컵, 검정은 부채질 받기, 노랑은 기타 사항이다. 대회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물이나 부채질 등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났지만, 대체로 별다른 요구 없이 두 시간 내내 멍때리기에 집중했다.
아마도 선수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그늘막이 아닐까 싶었다. 햇살이 따가우면 정신이 혼미해져서 멍때리기가 더 잘 되기 때문. 바람 솔솔 부는 그늘 아래 있으면 멍때리기를 하다가도 어느새 잠이 들기 때문에 그늘을 펼쳐주면 좀 더 흥미진진한 대회가 됐을 듯 싶다.
스태프들은 선수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도 하고, 틈틈이 심박측정도 했다. 시민투표와 심박수를 합산해서 우승자를 가려내는 방식이어서, 눈에 띄는 복장을 하고 안정적인 심박수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회자 말로는 작년에는 인도에서 온 참가자가 명상을 해서, 거의 죽음에 가까운 심박수를 유지했다 한다. 그래서 주최측이 논의 끝에 그 사람을 실격처리 했다고. 아무래도 그런 프로가 엄청난 기술을 선보이면, 대회가 점점 기인들의 열전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대회 참가자들은 단순히 참가해서 멍때리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직업을 나타내는 복장을 하고 오거나, 주장하고 싶은 것을 소품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실제 직업이 역무원인 분은 부정승차를 하지 말자는 푯말을 앞에 내놓기도 했고, 패밀리레스토랑 직원이라고 밝힌 참가자들은 레스토랑 메뉴판을 앞에 내놓기도 했다. 요리사 모자를 쓰고 온 실제 요리사도 있었고, 교복을 입고 온 학생들, 그리고 말레이시아 전통 복장을 입고 온 외국인 교환학생들도 있었다.
멍때리기 대회 홈페이지의 설명을 보면, 이 행사는 대회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퍼포먼스이기도 하다. 참가자 모두가 퍼포먼서로써,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삶과 함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멍때리기 대회는 시합 형식으로 내보이는 일종의 행위예술이다. 따라서 참가자들은 이날 하루만큼은 모두가 예술가였다.
어쨌든 일단은 대회이기 때문에 심판도 있다. 저승사자 옷을 입은 사람과 그 뒤를 따르는 포도대장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대회가 한 시간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첫 번째 탈락자가 발생했는데, 어린 아들, 딸과 함께 대회에 참가한 버스기사 직업을 가진 분이었다.
팀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어린 아이가 멍때리기에 실패해서 모두가 탈락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아이에게 두 시간 멍때리기는 좀 힘든 일이었을 테다.
멍때리기 대회는 나름 규칙이 있다. 정말 '멍때리기만 해야 한다'는 규칙이다. 핸드폰을 확인한다든지, 졸거나 잠을 자서도 안 된다. 웃거나 대화를 해서도 안 되고,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등의 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명상도 멍때리기라고 할 수가 없다. 멍때리기는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이니까.
'멍때리기'라고 하면 아주 쉽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특히 여행을 좀 해 본 사람들은 멍때리기를 많이 해 본 경험도 있기 때문에, 나름 나도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멍때리기 대회'는 멍때리기와 대회의 조합이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경치 좋은 곳에서 멍때리기는 정말 쉽다. 하지만 이곳은 사회자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마이크를 잡고 이런저런 말을 하는데, 때때로 웃기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늘엔 드론이 떠다니고, 기자들은 수시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라인 바깥에는 관객들이 웅성거리며 구경하고 있고, 저승사자와 스태프들이 돌아다니며 심박수를 체크하기도 한다. 또한 중간에 탈락자가 나오면 사람들이 몰려서 인터뷰를 하느라 분주해지기도 한다.
한 마디로 정말 산만하다. 어쩌면 이런 분위기에서 멍때리기를 하려면 오히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즉, 혼자 조용히 멍때리는 것과 이 대회에서 멍때리는 것은 크게 달랐다.
대회 후반에 접어들면서 몇 명의 탈락자가 생겼지만, 대부분은 두 시간을 꽉 채워 살아남았다. 그리고 심사를 거쳐 수상자가 가려졌다.
1등은 세 명의 친구들이 함께 잠옷을 입고 출전하여, '출근하기 싫어서 멍때림'을 온 몸으로 표현한 팀이 차지했다. 수상식엔 지난 대회 우승자인 '크러쉬'가 나와서 상장을 전달했다.
일단은 대회이기때문에 등수가 가려졌지만, 수상과 상관없이 이날 하루 만큼은 모두들 훌륭한 예술가였다. 물론 중간에 탈락하는 모습들까지도 재미있는 공연의 일부였다. 물론 퍼포먼스 같은 것 모르겠다고 해도 모두들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을 시간이지 않았을까 싶다.
한강 멍때리기 대회장 옆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텐트를 펼치고 쉬고 있었다. 그중에는 대회와 상관없이 잔디밭에 앉아 멍때리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비록 대회는 끝났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위해서 한강변에 텐트를 치고 멍때리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 방구석에서 멍때리는 것 보다 훨씬 상쾌한 멍때림으로 초능력이 생길지도 모른다.
* 참고: 멍때리기 대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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