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 저 멀리 (인도여행) BLUE 3 0615
첨단기술 중세사회
맥그로드 간지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노인이 과자를 가득 담은 망태기를 들고 와서는 여행자들 근처에 아무 말 없이 자리잡고 앉았어요. 처음에는 근처에 있는 여행자들에게 과자를 사라고 말을 붙이기도 했지만, 이내 다 귀찮다는 듯이 멍하게 하염없이 먼 산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죠. 살 테면 사고, 말 테면 말라는 식이었죠. 인도에는 이런 류의 장사치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 노인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어요. 이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신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살아서 지금까지 왔겠지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도에 도착한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 독특한 문화 때문에 정신적 충격을 꽤 크게 받은 상태였지요. 그 충격 중 하나는, 인도에 아직도 카스트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이었어요.
카스트제도는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져, 평생 그 신분으로 살아가야 하는 신분제 계급 제도지요. 모든 것은 처음부터 정해지는 거에요. 귀족은 처음부터 귀족이고, 거지는 처음부터 거지인 거죠. 요즘 같은 세상에도 그런 사회가 존재하나 의아해 할 수도 있어요. 특히 인도라는 곳이 그렇다고 하면, IT 강국으로 발돋움 하고 있다는 나라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놀라실 지도 모르죠. 사실 인도에 직접 가 보기 전까지는, 우리나라 나이 드신 분들이 족보 따지듯이, 사회적 편견 정도로 그 잔재만 겨우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생각보다 심각했어요. 법적으로는 없어졌지만, 사회적으로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인도에서는 이미 오십여 년 전에 계급차별금지 법이 제정되었어요. 그런데 이상과 현실이 다르듯, 법이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 세계와 무관하게, 아직도 계급을 통한 신분 차별은 인도를 지배하고 있어요. 교육 받은 사람들은 카스트제도를 해체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지요. 하지만 대다수의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계급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직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요.
아마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대해 배운 적이 있을 거에요.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귀족), 바이샤(평민), 수드라(노동자). 카스트제도는 이렇게 네 개의 계급으로 이루어진 계급제도지요.
네 개의 계급 외에, 계급 안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이 바로 달리트(dalit),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에요. 현재 인도 인구의 1/6이 달리트라고 하더군요. 옛날에 달리트들은 턱 밑에 그릇을 받치고, 엉덩이에는 빗자루를 달고 다녀야 했대요. 턱 밑의 그릇은 더러운 침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고, 엉덩이의 빗자루는 지나온 길에 남은 발자국도 더러우니 그걸 지우기 위한 것이었지요. 지금도 달리트들은 세탁, 청소, 시체 치우기 등의 일을 하거나, 거지로 살아가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천대받으며 무시당하면서 말이죠.
그나마 조금 달라진 것이라면, 여기도 역시 돈이 있으면 신분을 극복할 수 있다는 거에요. 물론 낮은 계급의 신분으로 돈을 벌기는 많이 힘들지만, 어떻게든 돈만 번다면야 이 꽉 막힌 계급 제 사회 속에서도 호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외국인은 카스트 제도에 해당되지 않는 존재들이지만, 엄격히 따지면 불가촉천민이에요. 그래서 일부 지체 높으신 집안 분들 중에는 외국인들과 함께 일을 하는 자식들에게, 매일 집에 들어오기 전에 정화의식을 치르는 사람들도 있지요. 물론 대체로 외국인들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보지는 않아요.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자기네들보다 돈이 많고, 그 돈을 쓰러 온 사람들이니까요.
계급차별이 있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인종차별도 있어요. 대체로 인도인들은 백인들을 좋아해요. 똑같은 말을 해도 백인들에게 더욱 신경 써 주고, 백인들에게 더 잘 해주는 경향이 있지요. 나보다 나중에 들어와서 주문을 한 백인에게, 나보다 먼저 음식을 갖다 주는 식당도 있었어요.
황인종들에 대한 대우는 좀 특이한데요, 황인종이라고 무조건 무시하지는 않아요. 똑같은 황인종이라도 얼굴이 하얗다면 백인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지요. 얼굴이 검은 황인종은 거의 외국인 대접을 못 받을 정도로 푸대접 받구요. 그래서 인도에 처음 발 디뎠을 때, 아직 햇볕에 얼굴이 타지 않았을 때는 괜찮게 대접 받다가, 한 달 즘 지나 얼굴이 까맣게 탔을 때는 거의 현지인 취급 당하며 무시당한 한국인들의 경험담도 들을 수 있었지요.
인도는 최근 IT 쪽으로 인력을 수출하며 국가 경쟁력을 높여 가고 있어요. 인도를 대상으로 펀드를 비롯한 다양한 투자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죠. 수많은 부족들간에 언어가 달라서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큰 자원이죠. 거기다 싼 인건비까지 합쳐서 제 2의 중국이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직은 그런 전망에 부정적이네요. 인도 사회 전체에 만연한 철저한 계급사회 의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능력이 뛰어나도 신분 때문에 좋은 곳에서 일 할 수 없는 그런 현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과연 인도가 크게 발전할 수 있을까요.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한 인도 청년이 말 하더군요. 자기는 계급사회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걸 고치고 싶다고. 그런데 자기 동네에 가면 자기보다 나이든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하고, 그 청년은 그들에게 반말투로 말을 한데요. 자기는 그러고 싶지 않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질 않으니 혼자서는 바꾸기 힘들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따라갈 수 밖에 없다고. 아무래도 세상을 혼자서 바꾸기는 무리겠죠.
아무쪼록 인도의 지식층들과 외국 문물을 접한 사람들부터 계급의식을 버려 나갔으면 좋겠네요. 아니 그보다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강하게 가지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계급의식이 해체되고 생각이 바뀌는 날이 오면, 인도는 아마 모든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바뀔 거에요. 지금도 충분히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도인들과의 만남들 속에서 ‘끔찍하다’를 외치고 떠나는 게 사실이니까요. 아무쪼록 빨리 그 날이 오기만을 바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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