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띠아이 끄데이 (Banteay Kdei) 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은 '춤 추는 소녀들의 홀' 이었다. 벽과 기둥 여기저기에 '압사라'가 새겨져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곳이다. '압사라 (혹은 압살라 Apsara)'는 '춤 추는 여신', '천상의 무희'를 뜻하고, 캄보디아 전통춤의 이름이기도 하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압사라는 익살스러운 몸짓과 앙증맞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매혹적이라기보다는 귀엽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반띠아이 끄데이'는 거의 건물 형태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흔이 아니다. 무너질 것을 대비해서 버팀목을 세워둬야 할 정도로 훼손이 심한 건물도 있고, 다 무너지고 기둥이나 벽의 일부만 간신히 서 있는 곳도 있다. 어디서나 돌 무더기를 볼 수 있으며, 어디서나 폐허의 냄새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다지 슬프다거나 우울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 이 곳의 매력.
다른 사원들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도 구석구석 잘 살펴보면 은근히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폐허는 폐허지만 완전히 무너져내려 쓸모없는 폐허는 아니라는 것. 세상에 무너져도, 쓰러져도, 부숴져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지며 매력을 발산하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내 인생 또한 그러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잠시 가져 보았다.
이 사원은 '따 께우 (Ta Keo)'. 앙코르 유적의 다른 사원들과는 달리, 굵직한 선으로 시원시원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사원들이 보여주는 오밀조밀한 장식과 복잡한 조각들이 없어서 다소 밋밋한 느낌을 주지만, 다른 사원들과는 달리 시원시원한 모습으로 장엄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사원은 미완성으로 남겨졌다고 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앙코르 왓'과 닮아 있어서, '앙코르 왓'의 남성 버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탑의 모습을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듯, 다른 사원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어쩌면 오밀조밀 섬세하게 조각하고 쌓아가던 작업에 지쳐서, 이번 건물은 그냥 듬성듬성 막 갖다 지어보자 한 것은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이렇게 쌓아놓은 다음에 다른 유적들처럼 조각을 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탑 꼭대기에 쌓아놓은 돌 덩어리들이 무척 큰 것에 놀랐다. 저 큰 덩어리를 어떻게 저 위에 쌓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무너지지 않게, 탑의 모양을 갖춰 가면서 쌓았어야 했을 텐데. 대단하긴 참 대단하다. 어쨌든 큰 덩어리들이 크게크게 하나씩 툭툭 던져져 있는 느낌이라서, 좀 무뚝뚝한 느낌의 사원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웬지 '그래, 난 이렇게 생겼어, 어쩔거냐' 이러면서, 세상일에 별 관심 없는 무뚝뚝한 사람의 모습같지 않은가.
'따 께우'를 보고나서 나는 패닉에 빠졌다. 사실은 이 근처 어디선가부터 우리 일행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전에는 유적 하나를 보고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일대에서는 한 시에 크끼리 테라스에서 만나자라는 약속을 하고는 완전히 따로따로 움직였다. 아무래도 서로서로 보고싶은 것이 다르고, 하고싶은 것이 달랐으니까 그런 시간이 내심 반가웠다. 그래서 나는 조그만 유적지까지도 보고 다녔던 거였고.
그런데 약속시간이 다 되어 '코끼리 테라스'로 가려고 갔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이건 정말 앙코르 유적의 미스터리다.
내가 본 유적이 '따 께우'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도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분명히 코끼리 테라스가 나와야 하는 거였다. 아 그런데 아무리 가도 '코끼리 테라스'가 안 나오는거라. 뭔가 이 근처에 마의 사각지대라든가, 웜홀, 혹은 에너지 자장같은 게 형성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결론은 길을 잃었다는 거. ㅠ.ㅠ
시간은 다 됐는데 어쩌지, 하고 있다가 근처에 허름한 오두막집 가게가 몇 개 보였다. 염치불구하고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길을 잃어서 그런데 전화 한 통만 쓰자고 했다. 그 가게를 지키고 있던 한 아낙, 자기 핸드폰은 돈을 안 내서 발신이 안 된다면서, 자기가 직접 옆집으로 핸드폰을 빌리러 갔다. 그랬더니 그 집도 돈을 안 내서 발신이 안 되고, 그 옆집도 그렇고, 그 옆집도 그렇고... ;ㅁ;
결국 이 처자, 길 가는 사람 한 명을 '헤이-!'하고 불러 세우더니 핸드폰을 빌려서는 내게 갖다줬다. 대낮, 사람많은 공터에서 거의 뺏기다시피 핸드폰을 빌려준 그 사람은 멍하니 보고 서 있었고. ㅡㅅㅡ;
택시기사의 명함을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걸어서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 했다. 가게 처자에게 전화기를 건네줘서 위치 설명을 하게 했고, 곧 데리러 온다는 대답을 들었다. 친절하고, (지나치게) 활달한 그 처자는, 여기서 기다리라며 의자도 내 줬고~
캄보디아인들이 고맘다고 말 할 때 하는 방식으로 합장을 하며 고맙다고 말 했더니, 이 처자가 글쎄 갑자기 팔려고 내놓은 수박 한 덩이를 뚝 잘라 내 주는 것 아닌가. 우왕- '목 마르지? 뭐 마실래?' 하길래, 콜라 달라고 하고는 돈 주니까, 됐다면서 한사코 안 받는다고 뿌리치고. 우왕~ ;ㅁ;/
기다리는 시간이 좀 길어지니까 코코넛도 한 통 잘라주고... 아, 이 즘 되면 너무 부담스러운데... ;ㅁ;
괜찮다고 거절하니까, 어차피 숲에 널린거 따 오는 거니까 괜찮다면서 빨대 꽂아서 턱 내민다. 우왕-
이렇게 얻어먹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왕 이렇게 됐으니 기념품이나 사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제일 만만한, 앙코르 왓이나 사면상(얼굴)이 그려진 티셔츠와 손수건을 여러장 샀다.
여기서 한가지 신기했던 것은, 내가 다양한 색깔을 원하니까 옆집, 옆집을 쭉 다니면서 물건들을 색깔별로 그냥 가져오는 거였다. 가게별로 칸막이는 쳐 졌지만, 사실은 공동소유나 다름 없다고 말 하면서. 그러고보니 아까 수박도 다른 집 거였는데... ㅡㅅㅡ;;;
어쩌면 공동소유가 아니라 이 처자가 대장이라서 그냥 막 가져오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돈 주면 뭐 알아서 나눠 가지겠지.
그래서 예정에도 없었던 기념품을 여기서 사게 됐다. 난 여행가도 기념품 같은 거 안 사는 편인데,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기념품을 사 와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됐다. 에잉, 기념품 그거 어찌나 귀찮고 들고다니기 힘들던지... 다시는 기념품따위 사 오지 않을거라고 다짐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제 누가 울며 빌어도 기념품 따윈 절대 안 사갈테다.
그렇게 한참을 노닥거리고 있으니 일행이 탄 차가 왔고, 난 서둘러 차를 타고 이곳을 떠나게 됐다. 이후 택시기사와 일행은, 차를 내릴 때마다 길 잘 찾아오라고 놀렸다. ㅠ.ㅠ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택시기사의 명함이 없었다면 난 거기서 그 처자랑 행복하게 잘 살게 됐을지도 모른다라는... 뭐, 상상은 자유. ㅡㅅㅡ/
꼬마들이 땡볕에 나가서 물병 들고 서 있는 모습. 저렇게 하루종일 서서 '아이스 워터'를 외친다. 집안 일을 돕는다며 저러고 있는게 어떻게 보면 대견스럽지만, 어떻게 보면 참 안쓰러웠다. 그래도 학교는 꼬박꼬박 나가고 있다고 하니, 더 나은 미래가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수 밖에.